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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빌 16: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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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빌16:23-34)

<참고> 2차 전도여행 지도 - 무시아, 드로아, 비두니아, 마게도냐, 빌립보

(행 16: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행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 일행이 밤 중에 기도하고 있었다. 원래 그들의 계획은 소아시아의 서북쪽에 위치한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막으셔서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관문인 드로아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드로아에서 밤 중에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여! 어디로 갈까요?”

기도 중에 환상을 보게 되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손짓을 하면서...
-“이리로 건너와 우리를 도와주시오!”

사도 바울은 이 환상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을 믿고 바다를 건넜다. 미지의 세계인 마게도냐, 현재 유럽의 그리스 지역이다. 그리고 바울 일행이 도착한 곳은 빌립보란 성이었다.

낯선 땅에 와서 먼저 그들이 할 일은 그 지역을 탐색하는 일과 기도처를 찾는 것이었다. 기도처를 찾기 위해 나서다가 처음 만난 사람이 자주장사 루디아였다. 이 여인은 즉시 복음을 받아 들이고 빌립보 지역의 첫 신자가 되었다.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이 모두 세례를 받았고, 바울 일행을 융숭히 대접하고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날 기도하기 위해 기도처로 나가다가 귀신들려 점치는 여인을 만났다. 그런데 이 점치는 여인이 바울 일행이 지나갈 때마다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전파하는 자여!

바울이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질러댔다. 바울의 마음이 괴로워서 그 여인에게로 다가가 귀신을 쫓아내 주었다.

(행 16: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 점치는 여인는 요즘 말로하면 족집게 무당이었다. 상당한 인기가 있었고, 이 여인을 고용했던 주인들의 수입이 솔찮게 많았던 것이다. 그 여인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고 신통력이 떨어지자 이제 더 이상 점치는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화가 난 주인들이 사도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빌립보 공안 당국에 고발하였다.
(행 16: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행 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당의 주인들이 사도 바울 일행을 고발한 내용은 선교활동으로 인해 민심을 동요케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보복할 마음으로 계교를 꾸민 것이다.

빌립보성의 당국자들은 자초 지종 사건의 개요를 알아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사도 바울과 실라를 고문하고 매질을 해서 감옥에 집어 넣었다. 오늘 읽은 본문 23-24절의 내용이다.

(행 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 16: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죄질이 아주 나쁜 흉악범 취급을 받고 토굴과 같은 지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사도 바울 일행이 감옥에 갇힐 만한 범죄 행위가 있었는가? 그들이 도적질을 했는가? 아니면 사기극을 벌였는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본문 24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성경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당혹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도리어 도움을 주고 이롭게 하였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매질과 감옥살였다.

만약 이런 일들이 여러분들에게서 일어났다면 어떤 반응이 나타나리라 생각되는가?
-“하나님,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해야만 합니까?”

하나님을 향하여서 항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는 사건을 지금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1977년도, 성인이 된 후 처음 교회에 출석하고 은혜받았다.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던 어느날 나의 신앙을 뿌리채 흔드는 한 사건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서울 성북구 미아동의 어느 교회 여전도사님, 교인의 부탁을 받고 병자를 위해서 안찰기도를 해 주었는데 그 환자가 사망하여 구속된 사건이다. 나는 한 동안 그 사건에 대하여 이해가 되질 않아 혼란 가운데 지낸 적이 있다.

하나님의 종이, 병자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면 낫게 하지는 못할 망정 죽이지는 말아야지. 사랑하는 맘으로 병자를 위해 기도해 주었는데 그 댓가가 과실치사혐의로 구속당해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다니...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신문 기사만 가지고 볼 때,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곤경에 가운데 빠뜨리는 하나님을 내가 믿을 필요가 있을까?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시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고민은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번 분당 샘물교회 아프칸 봉사단 사건의 일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향하여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붓고 있다.
“왜 쓸데 없는 짓을 하고 다니냐? 왜 문제만 일으키냐? 기독교인들은 나라에 도움이 안된다.”

인솔자인 배형규목사가 살해 당하고 22명의 청년들이 인질로 붙잡혀 억류된 상태에서 그리스도인들마져도 이해가 안된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려 온다.

상은 못받을지라도 안전 만큼은 보장 받았어야 되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선교하겠느냐? 심지어 인터넷 댓글에, “배목사 총맞을 때 하나님은 뭐했지?”

기독교인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그리고 위험과 고난 가운데 빠져드는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무책임 등등... 이런 일들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혼돈에 빠지고 낙심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건도 시대와 장소만 다를 뿐 내용은 같은 것이다. 다른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복음을 전했는데 돌아온 건 왜 매와 감옥이었느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매맞고 갇힌 상황에서의 바울과 실라의 행동을 보면 더욱 이해가 되질 않는다.
(행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있어야만 했다.
- 하나님, 애초에 우리는 이곳에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셔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매맞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야만 합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신이 살아계시다면 빨리 꺼내 주세요. 그리고 저 원수들을 처벌해 주세요! 이것이 정상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평 원망하지 않았다. 도리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양했다. 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이라면 이와 같은 광신적 태도를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만약 그 당시에 신문이나 인터넷이 있었다면 이런 기사들이 보도되었을 때 광신자라 고 매도했을 것이다. 왜 너희 하나님이 보호주시지 않았느냐고 조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광신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성령에 이끌린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어떤 기도를 했을까? 기도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빨리 무혐의 처리되어 출소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까요? 만약 그런 기도를 드렸다면 찬송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윤선목사님은, “이 두 사람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믿고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찾을 수 있었고,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당면한 환경에 눌리지 않았고 도리어 그 환경을 발 아래 짓밟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참된 믿음은, 이해할 수도 없는 극한 고통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런 믿음에는 반드시 역사가 있다. 악조건 속에서도 기도와 찬송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행 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행 16: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행 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 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행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행 16: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1)기적이 일어났다.
지진이 나고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착고가 다 풀렸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만 조용히 건져내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느끼게 하셨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다른 죄수들은 비웃고 조롱했을 것이다. “미친 놈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옥터를 흔드실 때 비웃던 무리들은 두려움에 떨고 후회했을 것이다. 이번 아프칸 봉사단에 대하여 가명으로 댓글을 달고 얼굴을 숨긴채 악담과 조롱의 말을 퍼부었던 무리들도 언젠가는 그들의 말로 인해 후회하게 될 것이다.


2)간수의 가정을 구원하셨다.
간수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옥문이 다 열려 있었다. 죄수들이 다 탈옥한 줄로 알고 그는 자결하려고 검을 빼들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만류했다.
-“탈옥한 사람은 아무도 없소. 다 여기 있소!”

간수가 떨며 바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바울이 말했다. 유명한 전도 메시지.. 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결과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간수의 가정을 구원코자 바울과 실라를 감옥으로 들여 보내신 것이다. 간수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가족이 구원받고 세례를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빌립보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셨다. 루디아를 비롯하여 간수 가족이 빌립보교회의 주도적인 일꾼들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짐 엘리엇이란 미국인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1956년 에쿠아도르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그곳 인디언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젊은 아내와 아기가 뒤에 남겨졌다. 수 십년이 지난 후, 살해에 가담했던 5명 중 세 명은 인디언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미국 언론에서는 잘 교육받은 청년들이 위험한 오지에 들어가서 죽임을 당한 것은 "불필요한 낭비 (unnecessary waste)" 라는 비난했었다.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선교사가 복음을 들고 이 땅을 밟을 때 이곳은 아프칸보다 더 위험한 지역이었다. 그의 친구들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말렸다. 비신자들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비신앙적 눈으로 볼 때 위험한 지역에 선교사로 들어가는 것은 무모한 소비적 도전이라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낯설고 물설은 이땅에 들어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봉사하였다. 새문안교회와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과 YMCA, 성경번역과 한글보급, 영한사전등... 우리의 근대사에서 기독교와 선교사의 역할을 빼면 역사가 성립되지 않을 만큼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만약 서구의 선교사들이 편안함과 안전만을 추구하면서 이 땅을 아프칸과 같은 위험한 지역으로 기피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복음의 빛을 비추기 위해 유능한 젊은 청년들을 위험한 이곳으로 들여 보내신 것이다.


오늘 바울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1)이해할 수 없는 곤고한 일을 당했을 때 잠잠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죄나 실수로 말미암은 것들이다. 그러나 때로는 진실로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썼는대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사태가 악화되고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성경에도 있다. 욥은 당대의 의인이요 경건한 사람이었다. 아무런 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순식간에 다 잃고 말았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에 악창이 나서 무너진 자신의 집 기왓장으로 긁고 앉아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그 아내가 욥을 향하여 악담을 퍼부었다.

(욥 2: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때 욥이 이렇게 대답했다.
(욥 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2)이런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만날 좋은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루마니아의 목사로서 공산주의자들에게 1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서방으로 추방당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의 저서 [지하 감옥]이란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감옥에서 보낸 햇수가 저에게는 너무 긴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홀로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믿음이나 사랑을 넘어선 어떤 기쁨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14년 간의 수감 생활이 긴 것 으로 여겨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는 옥중에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있게 만났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원치 않는 사고, 질병, 실패, 이별, 죽음 등으로 괴로워 하게 된다. 신앙생활에 더욱 열심을 냈는데 일이 더욱 꼬이고 상황이 더욱 나빠지기도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나님을 나에 대하여 관심이 없으신가보다. 별 생각이 다 든다.

이때가 바로 기도할 때이다.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다. 하나님이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마음 속에 의심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의 소리가 밀려오면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라. 내 안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느껴질 때까지 기도하라. 더욱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증거했다.

(히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마귀의 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 오라. 뒤로 물러가서 시험 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3)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를 고난 가운데로 밀어 넣으셨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하여 당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빌립보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실 계획을 이루셨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내가 고통 가운데 헤멜 때, 그것의 끝이 보이지 않고 더욱 가중되어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하나님은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자녀들을 포기하지 아니 하신다.

설령 배형규목사 처럼 그의 목숨을 잃게 하시고, 그의 가족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기게 하신다 할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 일행을 감옥 속으로 밀어 넣는 고난을 통해 빌립보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봉사와 희생은 반드시 아름답고 선한 역사를 이루게 하실 것이다.

단기 선교 한 번씩 다녀오면 신앙의 자세가 확 바뀐다는 간증을 종종 듣는다. 너무 자주,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울과 실라가 당했던 극한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천국과 같은 환경이라 생각된다. 바울과 실라가 당한 고난을 생각하면 짜증과 불평, 화낼 일이 전혀 없을 것 이다.

혹 여러분 중에 고난 중에 있다고 생각하는 분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잡으라. 고난 가운데 주님을 만나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붙드시며, 회복시키시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급한 마음에 입술로 털어내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기도하며 잠잠히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를 바라보는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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