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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로운 선택, 영화로운 결과(마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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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선택, 영화로운 결과(마 7:13-14)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일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선택할 수 없이 주어진 상태를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하여 결정할 수 있고 또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가 선택할 수 없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또 선택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냐 하면 내가 비록 원치 않았지만 이와 같은 사정이 나에게 주어졌을 때 내가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 나의 최선을 다하느냐, 아니면 나에게 억지로 주어진 상황이니 나는 끝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그 가운데 어려워만 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생각해 보면 결국 우리의 모든 삶은 우리의 선택 여하에 따라 결국 마음의 기쁨도, 마지막 최종적인 결과도 우리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가 마음에 ‘주일이 되니 예배드리러 가야지.’ 하고 마음의 결정과 선택을 하셨기에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일되면 예배드리러 교회에 가야지.’ 라고 결정한 그 결정에 따라서 우리의 모든 다음 약속이나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선택에는 큰 선택과 작은 선택들, 그리고 상위개념의 선택과 하위개념의 선택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큰 선택, 상위개념의 선택이라는 것은 그것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하위개념, 즉 종속적인 작은 개념의 선택들이 자동적으로 따라와 거기에 종속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지. 하나님께 헌신해야지. 나는 믿음의 아름다운 길을 가야지.’ 라는 마음의 결심을 했다면 그와 같은 결심을 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믿음대로 살고 말씀을 이루려고 하는 결심을 했다면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십일조 생활을 한다거나 아니면 내 시간과 몸을 내어서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헌신한다거나 또 내가 전도를 한다거나 내가 또 성경을 읽는다거나 아니면 어려운 이웃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같이 나눈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입니다.

즉, 우리들에게 상위적인 선택이 이루어지면 하위적인 종속적인 선택은 당연히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대로 살고 말씀을 이루는 삶이 돼야 되겠다고 결정했다면 주일이 됐는데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들에게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선택, 중요한 결정들을 이루는데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기준으로 하여서 이루어진다면 우리들에게 너무나 기쁘고 복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데 그 선택은 반드시 즐겁고 기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그 선택을 하는 과정 속에서 아픔도 있고, 슬픔도 있고, 눈물도 있지만, 우리들에게서 진정으로 기쁜 선택이라는 것은 과정 중에 있는 작은 아픔들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어떤 일이 있으나 그것을 능가하는 더 큰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을 주는 선택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리라는 이와 같은 고백은 바로 사도바울의 인생에 있어서 큰 위기를 앞두고 고백하는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그의 선교여행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의 사역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성령에 의해서 이미 감지하기는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그렇게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서 마지막사역을 이루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듯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은 <사도행전의 20장 22절, 23절>의 앞 절에 미리 고백한 것처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즉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나 오는 사도바울의 제자들도 “선생님이 거기 가면 선생님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결국은 죽게 될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자들도 바울 선생님이 예루살렘에 가면 감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 잡혀서 죽게 될 것입니다.” 하고 한결같이 말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을 사도바울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말리고 은사 받은 자들이 말리기 전에 그는 이미 알고 있었고, 이제 따라서 그의 마지막 길을 가기 위해서 밀레도에 머물렀을 때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부릅니다.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이 와서 사도바울과 마지막 석별의 정을 나누게 됩니다.
“나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나는 내가 당할 어떤 일을 이미 알고 있고 어떤 일이 나에게 구체적으로 올지 나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이제 당신들이 나를 볼 수 있는 마지막길이 될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목을 껴안고 슬피 울고 정말 그들에게 기도해주고 석별의 정을 나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면서 석별의 정을 나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의 마음속에 부담도 있고, 아픔도 있고, 슬픔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과 부담과 슬픔을 능가하는 더 큰 기쁨이 있기에 그는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위하여 그는 달려가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내용들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의 뜻을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들에게 기쁘고 감사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선택은 과연 어디에 근거를 두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질 환난과 아픔과 결박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결정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것을 넘어선 하나님의 원대한 은혜와 사랑과 기쁨 속에 선택의 결정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에 따라서 결정이 이루어지고 그것에 따라 우리는 결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에는 지혜로운 선택과 영화로운 결과가 우리들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은혜의 결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바울의 경우를 보았지만 예수님의 경우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면케하옵소서”
예수님은 아픔과 고독과 소외 속에서 이와 같이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기로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고백합니다.
“아버지여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드렸던 겁니다.
즉 십자가의 쓴잔을 지는데 마음의 부담이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 못 박혔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절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쓴잔을 받기로 마음에 결정을 하고, 십자가상에서도 “그러나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부탁합니다.” 하고 모든 일을 이루고 마치 그의 지상의 사역을 완성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에도 아픔과 부담되는 일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결국 온전한 십자가를 지는 일을 결정하였고 십자가의 사역을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은 내게 있어서 잠시 적으로 어떤 고난이 있다, 아픔이 있다, 기호적인 선호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이룰 보다 원대한 계획과 꿈을 바라보며 우리는 어떤 선택과 결정을 이루게 되고 그것에 따라서 결과가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소위 말하는 산상수훈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7장>까지 ‘산상의 수훈’을 말씀하셨는데 <5장>은 천국의 백성의 자격, <6장>은 천국의 백성의 삶, <7장>은 천국백성에 대한 권면의 말씀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7장 13,14절> 이하를 보게 되면 세 부류의 참과 거짓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가지 문, 즉 두 가지 길에 대해서 기록이 되어 있고, 그다음에 두 가지 나무의 기록됨으로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에 대해서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두 가지 집, 즉 반석위에 세운 집과 모래위에 세운 집을 통해서 가르쳐 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삶을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같은 말씀을 통해서 천국 백성의 삶, 그리고 그것을 종합하여 어떤 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려 올바른 성도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첫 번째 보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선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전제하고 있습니다. 선택이 있을 수 있다.
오늘 본문을 보는데 과연 선택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오늘 본문은 강력하게 우리에게 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요.
뭐냐 하면 여기 문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넓은 문이 있고 하나는 좁은 문이 있다. 그러면서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넓은 문으로는 가기도 편하고 가는 사람도 많아서 아주 좋은데 그 길로 가면 멸망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다. 그런데 여기 좁은 길이 있는데 좁은 길은 길도 좁고 사람들도 많지 않고 가는 사람들도 없어서 외롭고 어렵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쁨과 평안과 영원한 생명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선택하라는 말이에요? 좁은 길로 가라는 강요입니까?
어떻게 이 말씀을 듣고 선택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까?
이 길로 가면 좋은 것 같지만 멸망하는 길이야. 이 길로 가면 힘든 것 같지만 생명의 길이야. 너는 어떤 길로 갈래?
우리한테 선택하라는 건가요, 좁은 길로 가라고 강요하는 겁니까?
저는 아무리 봐도 이 문장은 강요하는 문장인 것 같아요.
너희 믿음의 백성은 이 길로 가라. 그래야 이게 축복의 길이고 너희가 진정으로 사는 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또 이것을 선택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정답이 주어졌다고 해서 정답만을 찾아서 가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중고등학생들 요즘 공부하느라고 애들을 쓰는데 학생들은 그런 것 알잖습니까? 공부 열심히 하면 시험에 합격하고 공부 열심히 하지 않고 신나게 놀면 결과적으로 불합격한다는 것 알아요, 몰라요?
그럼 학교에 가기위해서 마음먹었다면 불합격하기를 원하는 학생들은 없거든요. 다 합격하기를 원하거든요. 그럼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겠지요? 노는 것은 좀 덜 놀고. 답을 다 알죠? 그것 몰라서 떨어지는 학생은 없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답을 다 알려줬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선택하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선택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합격하기는 원하지만 그래도 답을 알고 있는데 그 답대로 살지 않고, 그래도 나는 지금 이 순간 뭔가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나는 좀 쉬자. 놀자. 재미있게 신나게 지내자.’ 하는 이런 선택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정답이 주어져서 선택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정답이 주어져도 그 정답을 선택할 것인가, 안 선택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믿음대로 살고,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 중에서 믿음대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정직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남에게 배려하며 살고, 정말 이렇게 살고 싶은데 그게 우리 해답이라는 것은 다 알아요. 그런데 우리 그렇게 살아가기 쉽습니까? 쉽지 않아요. 맨 날 어려운 상황을 당하면 우리는 또 달라진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볼 때 우리는 결국 선택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다. 가는 사람도 적어 고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으로 가는 문이다. 라고 우리들에게 답을 가르쳐 주면서 그런데 너희는 여기서 또 한 번 선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답을 줬는데 너희가 답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기호나 잠시의 편안함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비교를 잠시 살펴보면 넓은 문으로 가는 길은 그 길이 넓고 가기도 쉽단 말입니다. 가는 사람이 많아서 동무할 사람들도 많은 것입니다. 사람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가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져요.
여러분 식당 들어갈 때도 사람이 많은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하죠?
“어 왜 이렇게 붐벼?” 하며 들어가죠?
한 집은 붐비고 한 집은 한산해요. 그러면 “저 집은 너무 붐벼. 나는 한산한 집으로 편하게 가야지.” 하지 않고 꼭 붐비는 집에 기다렸다가 밥을 먹어요. 거 참 이상하단 말입니다.
서점에 가서도 책을 고르다가 어떤 책을 고르나? 그러다가 결국은 어떤 책 골라 나오죠?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이 뭐예요?” 하고 물어보고 실컷 고르고는 책은 엉뚱한 것 사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그런 것이 있잖습니까?
저도 그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요즘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이 뭡니까?” 물어보고 저도 골라오고, 신문에서 또 보고 “아, 이런 책들이 있구나!” 하고 골라오기도 하거든요.

왜냐하면 요즘사람들은 주로 어떤 책을 읽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저도 또 알고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한단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내 뜻과 동조해주고 나와 함께 갈 때 심정적으로 편안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은 길도 좁고 가는 사람도 없어요. 즉 고독하고 외롭고 이거 내 생각이 맞는가? 내 생각이 맞고 정말 좋으면 사람이 왜 이렇게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있어서 주님이 가기를 원하시는 좁은 문, 소위 오른 문-생명의 길이라는 것은 고독과 아픔과 소외와 슬픔과 외로움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길이고, 그와 같은 값을 치러야 우리는 결국 좁은 문으로 가되 그것이 영광과 기쁨의 길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등가의 원칙이 있는 것 같아요. 일방적인 것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기분 좋게 쉬었는데 결과가 좋다. 아니면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과가 나쁘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렇게 안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분 좋게 잘 놀았으면 또 슬프게 시험에도 떨어져야 정상입니다.
또 열심히 공부했으면 고통스러웠지만 합격하는 것이 정상이란 말입니다. 세상은 등가의 원칙이 있고 공평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 예배당에 왔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런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잠이 솔솔 와서 한 잠 푹 잤더니 아주 내가 시원하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은혜라고 생각하지요. 제가 예배당에서 자는 사람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얼마나 마음이 편하면 자겠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제가 설교를 잘 했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잘 주무신 거죠. 정말 자려고 폼 잡는 사람도 계시네.

여러분 또 이렇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가 정말 오늘 너무너무 피곤해서......’ 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너무너무 피곤해서 정말 예배시간에 졸릴 때도 있습니다. 저도 새벽기도 설교 끝나고 너무 피곤해서 요 앞에서 너무너무 피곤해서 좀 자다 기도하거든요. 그런데 맨 날 자지는 않아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 너무너무 피곤해요. 그런데 내가 정말 정신을 차려서 하나님께 찬송을 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중에 내 마음에 탁 부딪히는 은혜의 말씀이 내 가슴을 깊이 새겨주셔서 내가 은혜를 받고 그 말씀을 붙잡고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이런 때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들에게 정말 내가 피곤한데 하나님이 주신 평안의 잠을 잘 것인가, 아니면 피곤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정말 귀 기울여서 들을 것인가, 내가 예배 한 시간 드리는데 내가 정말 우리 장로님들 기도하시는데 그 기도에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기도하면 나는 그 시간 쉴 것인가, 그렇죠? 우리교회 장로님들은 정말 기도 짧게 해서 쉴 수도 없지만 아주 기도 오래하는 교회는 그 시간에 쉬는 분들도 꽤 돼요.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의 마음에 분명한 선택은 필요한 겁니다.

선택은 또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우리 삶에 이런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런 ‘기준’이란 말입니다.
언젠가 심방을 하다가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구역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심방을 했는데 그 구역장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거기 새신자들이 많았습니다. 초신자들도 많고.
“목사님, 우리 구역은 처음에 교회 왔을 때부터 최소한의 신앙의 기본선을 정해놓고 믿음생활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말이 참 마음에 은혜가 되더라고요. 뭐냐 하면 아주 초신자고 새신자이고 이런 사람들인데 믿음생활은 처음부터 약하게 하면 그저 시간되면 교회 한 번 나오지 하는 정도로 생각되면 이건 도저히 진보가 없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믿음생활은 이런 확실한 금을 긋고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가르쳤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주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온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또 말씀을 꼭 읽는다. 하나님 앞에 기도는 한다. 그리고 예수 믿은 다음부터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도 쉽게 표현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이런 것 등 마음에 드는 몇 가지 수칙을 정했겠지요? 그렇죠?
그런데 그것이 놀랍게도 교회 처음 나온 사람이 구역장 따라서 새벽기도부터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참 인생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구역장으로 만나면 처음부터 새벽기도 나오고 교회는 이렇게 다니는구나. 교회에 다니려고 했으니 이렇게 해야지. 그래서 교회 나오는 사람은 새벽기도부터 나오는 줄 알아요. 10년 넘어서도 안 나오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삶이라는 것은 정말 어떤 선을 정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해 놓는 것과 결정하지 않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은 가는 거야. 내가 숨 쉬고 있는 한은 가.’ 라고 생각하면 여러분 주일되어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흔들릴 것 없어요. 아무리 어떤 일이 있어도 “나 잠깐만 교회 갔다 올 테니까 그 다음에.” 라고 얘기할 겁니다. 당연히.
그런데 그런 결정을 안 해놓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야돼나? 말아야 되나? 하는 갈등으로 인하여 소모하는 에너지가 더 큰 것입니다.

우리 출발선이 매우 중요합니다. 20점선에서 출발하면 출발은 쉬운데 가야할 길이 멀어요. 70점 선에서 출발하면 처음에 출발선라인에 서는 것은 어렵지만 가야할 길을 이미 많이 갔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달하기 훨씬 쉬운 것을 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분명히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출발할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신앙의 기본적인 선을 그리고 그 선에서 출발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에게 선택에 대한 결과가 있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결과로 우리는 영화로워지기도 하고 참람해지기도 합니다.
넓은 문으로 가면 결과는 어떨까요? 편안하지만 결과는 고통스러움, 아픔이 있는 것이고 좁은 문으로 가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있고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터득하게 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는 신앙의 산전수전을 겪어야 됩니다. 때로는 마음에 시험도 받아보고 그것을 극복도 해봐야 되고 때로는 낙심도 해보고 그 가운데 일어나보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도 받고 그것을 치료하는 과정도 있어야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 안에서 굳어지는 겁니다. 더욱더 굳건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믿음의 백성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평강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우리는 선택에 있어서 반드시 어떤 결과를 바라보고 선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 중에서 과정가운데 어떤 아픔이 있어서 결과가 기쁘다면 그 과정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이 있고, 과정이 어려우면 과정에 대한 선택조차 안하려는 사람들이 있음을 봅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마른하늘에 방주를 만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그냥 귓전으로 스쳐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아니 무슨 마른하늘에 지금 비가 온다고 배를 만들어. 비가 오면 얼마나 오겠어.”
그러면서 노아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비가 와서 온 세상이 잠기게 됐을 때 노아와 더불어 그 식구들까지도 구원을 받게 된 겁니다. 노아가 믿음을 가지고 의롭게 행동했기 때문에 노아와 그 주변의 식구들까지도 구원을 받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은 사람 옆에 있으면 같이 은혜를 받는 거지요? 우리 옆에 사람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은혜 받으셨습니까?”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은혜 받는 사람 옆에 있으면 같이 은혜 받고, 벼락 맞는 사람 옆에 있으면 같이 벼락 맞습니다.
여러분, 이거 우스운 얘기지만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벼락 맞는 사람 옆에 있으면 그 사람도 같이 벼락 맞아요. 그러니까 내 옆에 어떤 사람과 같이 있느냐 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내가 내 옆의 사람을 축복받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축복받는 백성이 되고, 내가 축복을 받으려면 내가 축복받는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디가야 할지, 누구와 있어야 될지, 우리는 마음에 심각하게 결정해야 됩니다.
노아는 모든 사람이 미쳤다고 했지만 그는 마음에 분명히 기준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기준을 가지고 선택했습니다.

모세는 파란만장한 삶의 길을 갔습니다. 어린 갓난아이가 부모를 떠나서 나일강물에 떠내려가고 바로의 공주에게 건짐을 당해서 그의 아들이 되고 또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축복하셔서 그의 친모가 그의 유모가 되었고 자라서 그 친모를 통해서 히브리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마음에 히브리인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고 그 결과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애굽사람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살인자의 위치에 서서 결국 그는 그것이 발각될까 두려워 광야로 도망하였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무능하게 지내고 그는 모든 꿈을 저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와 민족을 일으켜 세워 출애굽 시킬 영광의 소망과 꿈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전과 같았으면 그냥 내가 해보고 싶었을 텐데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목동으로 살다보니까 이미 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단 말입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지팡이와 아론을 세워주시고 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 참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한 것 같아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당시에 애굽의 궁이 어디입니까? 당시에 그와 같은 그 고대국가의 권위를 가진 애굽의 궁이 어디입니까? 그런데 모세는 그냥 터덜터덜 남루한 옷을 입고 아론 한 명 데리고 지팡이 하나 들고 거기에 가서 어떻게 바로왕을 만났겠습니까? 그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다 역사와 섭리를 통해서 바로하고 대면하게 한 것 아닙니까? 문지기가 모세가 와서 갑자기 내가 왕을 좀 만나고 싶다. 나는 모세다. 그러면 그 문지기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왕한테 전해주겠어요? 모세라는 사람이 와서 당신을 만나겠답니다. 하고 전해주기나 하겠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과정은 성경에 다 생략되어 있지만 그 과정가운데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을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모세와 바로가 쟁투하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키며 큰 재앙이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넘어졌던 바로는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납니다. 모세도 대단하지만 바로는 더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인간의 강함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세가 승리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이 내용에 대해서 이렇게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내 속에 생명의 성령의 법과 사망의 육신의 법이 싸우는도다 라고 이와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이 죄의 소욕도 끈질기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한 번 받았으면 죄의 소욕은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마치 바로가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넘어졌다가도 또 일어나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혜의 법을 수시로 덧입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죄에 휘둘려 다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받아야 하며 날마다 새로운 권능과 은총과 힘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도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선택들이 새롭게 이루어지며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왕의 재물, 즉 우상에게 드렸던 우상재물을 먹지 않았고, 그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쓰임을 받아서 적국에 불려가서 포로로 잡혀갔지만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고, 총리로서 한 왕을 섬긴 것이 아니라 왕이 여러 명 바뀔 때마다 총리로 재 등용되어서 결국 그는 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선택의 기준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나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사자 굴에 던져져도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기준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선택의 기준이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중요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이런 말씀 많이 하죠?
“목사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정말 결정을 해야 되는데 이것을 해야 될지, 저것을 해야 할지, 제가 어떤 경우라도 좋으니 하나님께서 ‘이것이다.’라고 확신만 주신다면 하나님을 기대하면 저는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선택을 못하겠습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죠? 어려워도 하나님의 길이라고 하면 우리는 따릅니다. 그런데 그걸 잘 모르겠지요?

사람을 만나야 될지 말아야 될지, 집을 팔아야 될지 사야 될지, 회사를 끝까지 유지해야 될지 지금 정리해야 될지, 아니면 또 내가 새로운 사업을 해야 될지, 어떤 사업을 해야 될지, 아니면 지금의 것을 끝까지 해야 될지, 너무나 답답한 때가 많단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 어떻게 하지요? 어떻게 선택하지요? 어떻게 결정하지요? 어떤 기준에서 하지요? 그럴 때는 내 눈앞의 일을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거기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와 내가 보고 있는 상황을 전체적인 배경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이 도무지 내게 결정이 안 될 때는 한 걸음 뒤로 물러 나와서 내가 생각했던 그 상황을 전체 상황 속에서, 그 배경 속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느껴지는 것이 뭐죠? 아! 처음에 이게 전부인줄 알았는데 이것 때문에 내 인생이 전부 결정되고 끝나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이것은 내 삶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내 삶의 일부입니다.

그것이 내 삶의 일부로 보여 지고, 내가 이것이 어떻게 결정 되도 내 인생이 끝나지 않고 그걸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이루어져도 나는 회복하여 끝까지 갈 수 있다는 마음의 확신이 듭니다. 그때는 어떤 결정을 여러분이 내리셔도 결국 우리 인생에 있어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진정한 승리가 무엇일까요? 넘어지거나 실패하지 않거나 실수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승리일까요? 넘어져도, 실패해도, 실수해도 그것을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길을 갑니다. 뭐 산길을 가든지 어디 갑니다. 그런데 갈래 길이 나왔습니다.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이리로 가자고 했습니다. 거기로 가는데 영 길이 아니고 가다가 되돌아와야 될 길이었습니다. 거기서 우리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까?
거기서 사람들이 왜 이리 오자고 그랬느냐? 알지도 못하면서 이리로 오자고 그랬느냐? 탓하고 괜히 우리를 피곤하게 했다. 오늘 기분 잡쳤다. 거기서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다 끝나는 겁니다. 그걸로 다 끝나는 겁니다. 길을 잘못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격도 드러나고 모든 면에서 모임도 망가지고 자기 자신도 다 깨지고 모든 게 다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 한참가다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아! 여기 아니군요. 아휴 우리들에게 여기까지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다시 가면 되죠. 앞에 서서 다시 가주십시오.’ 하고 생각한다면 그건 얼마나 다릅니까? 그것을 통해서 인격도 빛나고 화합도 이루어지고 모임도 더 견고해지고 우리가 오히려 운동도 더 많이 했으니 참 좋네요. 또 그것이 학습효과가 되어서 다음에는 똑같은 경우가 있을 때 또 더 잘 판단해 갈수 있겠지요.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려움을 기회로 삼아서 그것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더 큰 것을 이루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순간순간 우리들에게 주어진 선택 속에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누리고자 하면 우리의 선택은 어떤 경우에도 기쁨이요, 은혜요, 승리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잘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모든 것은 잘 결정해서 잘되는 것이 아니라 잘 안된 것도 잘 된 것으로 누리고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음식 잘 만드는 사람은 맛없게 된 음식도 맛있게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늘 그런 생각하는데 우리 삶에 때로 실수하고 실패하고 아프고 넘어져도 중요한 것은 그게 그렇게 크지 않은 것이 돼야 합니다.
내가 실수했어요. 실패했어요. 낙심했어요. 넘어졌어요. 그런데 내 인생 끝이다하고 그걸로 끝나면 끝이에요.
그런데 ‘아, 이거 별것 아니야. 또 일어나서 가면 되는 거지 뭐.’ 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의연하고 대범해지고 커지면 그 다음에는 별것 아니란 말입니다. 별 것 아닙니다. 우린 끝까지 갈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 언제나 어려운 일 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해결나면 그 일을 큰 것으로 보지 않고 작게 볼 수 있는 내 마음의 크기가 커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크기가 커져보면 이제 그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 앞에 결정하기에 신중하고, 신중한 것을 우리는 정말 신중하게 얘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신중하게 행동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다가도 내가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잘 안돼요. 그때 어떻게 생각해요.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또 기도하다보면 마침내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가보다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이거구나!’ 라고 우리 마음에 확신이 온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우리에게 확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왜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합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가지 못하는 것은 길이 험하고 협착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지 않으니까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기 때문입니다.

롯의 아내를 알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니까 아브라함 때문에 소돔성에 있는 롯까지 구해주시는 겁니다. 롯을 구해주려니까 롯의 딸과 롯의 아내와 그리고 롯의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까지도 구원해주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김으로 말미암아 따라오지 않아서 그들은 구원을 못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비극입니다.

딸 둘과 롯의 아내가 나왔는데 롯의 아내는 나오다가 너무나 미련이 많아서 뒤를 돌아보다 그냥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것들을 볼 때 우리의 삶 가운데 다른 사람이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면 그것을 통해서 기쁨과 은혜와 의연함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든지 우리에게 어려움이 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가운데 우뚝 섬으로 말미암아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인물들이 되는 겁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장 큰 역사를 보여줘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에게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닥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좁은 문으로, 은혜의 길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마음에 동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려움이 있고 쓸쓸하고 외롭고 고독해 질 때 내가 쓸쓸하고 외롭기 때문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고, 내가 어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는 것이고, 내가 정말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감사할 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늘 선택하고 늘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선택과 결정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인가 이루어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세 가지와 싸워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두 번째는 내 삶에 주어진 내 삶의 목표, 내 삶의 사명과의 싸움입니다.
세 번째는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제한된 시간 내에 일을 해야 합니다.
남한테 칭찬해주는 것도 아주 적시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 일을 해야 될 아주 합당한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제출기간 끝났는데 제출해봐야 받아주지도 않아요. 내가 준비 안됐다고 시험 연기해달라고 시험이 연기가 되나요? 그러니까 시간이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삶의 목표와의 싸움, 주어진 시간과의 싸움”
이 세 가지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것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싸움과의 승리를 위해서 우리는 중요한 결정의 순간, 결정을 해야 되고, 결정할 때는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되고 결정할 때 우리가 외롭고 고독할지라도 우리는 마음에 동요되지 않고 우리의 결정이 심지어는 우리를 아픔과 고통가운데 빠뜨렸다 할지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순간 더 일어나 하나님의 역사를 끝까지 이룰 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의 마음에 우리는 분명한 선택의 기준을 가지고, 그리고 우리들은 자신 있고 확실하게 선택하고, 선택하고 결정한 것에 대해서 어떤 결과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그 가운데 다시 일어나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 선택의 길을 분명하게 선택하시고 기쁨으로 그 일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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