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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빛을 발견한 기쁨 (요 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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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빛을 발견한 기쁨
요한복음 8장 12-20절

  몇 년 전에 독일 다름슈타트에 있는 바실리아슐링크 여사가 이끄는 가나안 공동체를 방문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인상깊은 경험을 했습니다. 매일 저녁 [빛 가운데 교제] 시간이 있었습니다. [빛 가운데 교제]란 하루 동안 지내면서 서로에 대하여 본 것을 말해 주는 시간입니다. 본인이 미처 깨닫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해 주는 시간입니다. 아름답고 좋았던 모습도, 추하고 악했던 모습도 다 말해 줍니다.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왠 일인지 오늘 종일 얼굴을 찌푸리고 계셨어요? 그 때 벌컥 화를 내시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어요.” 왜 이렇게 합니까? 혹시 하루 사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어떤 잘못을 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놀라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임을 마치고 우리가 교회에서 나누는 교제는 어둠 속의 교제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생활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자신을 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하여 본 것도 본인에게 다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말합니다. 우리가 가나안 공동체와 같이 주님의 임재를 깊이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밝은 빛이 비취는 것같은 놀라운 기뿜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고 우리가 빛 가운데 교제하지 못하는 것을 그 때 깊이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빛 가운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는 가리고 감출 것이 없이 모든 빛
그런데 빛 가운데 사는 것은 결단이 된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매우 힘듭니다. 눈병 하나 나도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꺼려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할 때 주저하는 이들이 많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성적으로 어둠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빛이 비췰 때 “와!” 하고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고, “악!” 하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숨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반응은 어떨 것 같습니까?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숨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아담의 후손입니다. 마치 바퀴 벌레들이 빛이 비추이면 구석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싫어하고 죽이려 한 것도 예수님이 빛이셨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만 번지르하게 꾸미는데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하고 있으면 중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마 23:26-28)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그러나 바리새인만 그렇습니까?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도 바리새인 처럼 겉을 꾸미는데는 선수이지 않습니까? 우리도 속은 엉망이면서도 겉은 멀쩡한 것 처럼 잘 차려입고 나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속습니다. 그러니 남을 비난하고 판단하지 않습니까? 저는 바리새인처럼 겉을 꾸미는데 그 선수 중에 대표 선수였습니다. 저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착하고 성실하고 모범생이라는. 그러나 제 속은 말할 수 없이 더러웠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꾸미고 사는 것이 제 진짜 모습인 줄로 스스로 착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안다면 그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 빛보다는 어둠이 더 익숙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속까지 다 드러나는 것이 두렵고. 은밀히 행하는 것을 포기하기 싫은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게 살려고 하면 무서운 결과가 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드러나야 할 것은 드러나야 합니다. 지금 드러나야 합니다. 죄가 없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실상은 감추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은 다 드러날 때가 옵니다.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결국은 감출 수가 없이 다 드러나는 때가 옵니다. 그 때가 마지막 심판 날이면 절망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러내시나요? 여기서 해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아야 됩니다. 내 속에 숨겨져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보아야 됩니다. 빛으로 비추어주지 않으면 자기도 자기를 정확하게 모릅니다. 회개할 수 있으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 죄가 어떤지를 모르면 십자가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절박하지가 않습니다. 내 진짜 모습을 모르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야 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직도 내 죄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게 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빛입니다. 숨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죄가 드러나는 것이 복입니다. 생명의 회개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보혈의 은총이 임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자아가 처리됩니다. 그 때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 고통스럽고 두렵지만 이것이 살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숨고 피하면 정말 두려운 날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나폴리의 오스나총독이 어느 날 바르셀로나의 죄수선을 순시할 때, 죄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떤 경위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억울하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한 사람만이 죽을 죄를 범했노라고, 처자식을 굶기지 않기 위해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도적질을 했다고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습니다. 그 때 오스나 총독이 지팡이를 들어 그 사람의 잔등을 내리치면서 “이 못된 놈아! 이곳은 의인들만 있는 곳인데도 너 같은 죄인이 들어와 있다니 당장 나가라!” 고 호통을 치며 그 곳에서 내보냈다고 합니다.
  회개하면 삽니다. 회개하지 못하여 죽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했습니다.
우리가 눈이 밝은 것 같지만 실제로 보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세상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나면 비명을 지를 일이 많습니다. 

  결혼하는 여성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첫 손에 꼽는 선물은 다이아몬드 반지일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에서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이 개발되기 전 18세기까지만 해도 법적으로 다이아몬드는 왕후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아프리카 대륙에는 다이아몬드를 둘러싸고 무서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은 주민들과 아이들이었습니다. 이 실상을 영화화한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극중 주인공인 대니아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 모든 것은 낭만적인 결혼을 꿈꾸는 여자들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다이아몬드는 이런 악순환을 거쳐 신부의 손에 끼워지는 것입니다. 알고 나면 다이몬드의 매력이 사라집니다.

  양구의 어느 여집사님은 교회에서 늘 찬양단원으로 섬기시는 분인데  그 분은 “주님, 저는 보석도 하나 없습니다.” 하며 자기가 패물 하나 없는 것 때문에 늘 슬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찬양하는데 ‘네가 나의 보석이란다.’ 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너무나 감격하였답니다.

  제가 목회하다가 충격을 받은 일이 여러 번 있었지만, 가장 큰 충격 중 하나는 속장님이신 한 남자 권사님께 주일에 결석하시는 속도원들을 심방하시라는 말씀을 드리는데 면박을 당했던 일입니다.

  그 권사님께서 버럭 화를 내시며 “목사님, 우리도 숨 좀 쉬고 삽시다.” 하시는 것입니다. “주일에 못 나오실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전화하고 찾아 가면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내 버려 두세요.” 저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최대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설득을 하였습니다. “권사님, 믿음이 약해서 못나오는 경우도 있고, 시험이 들어서 안 나오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심방하고 권면하다 보면 다시 열심히 나오게 되지 않겠습니까? 권사님들이 그렇게 열심히 섬겨주셔야 교회도 부흥되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권사님께서 정색을 하면서 저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성공을 위하여 왜 우리가 혹사당해야 합니까?” 저는 그 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화도 나오고 당황하기도 해서 감정을 추스리기도 어려웠습니다. 그 날 밤 하소연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이런 경우도 있습니까? 교회 부흥이 저를 위한 것입니까?” 저는 주님께서 당연히 “유목사야, 힘을 내. 힘들지? 세상에 별의 별 사람들이 많아. 그러나 내가 있잫아.”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저는 제 마음에 그런 동기가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목회를 교회 부흥, 교회 성장을 위하여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와 교인을 제 목회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무서운 목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날 새벽, 교회와 교인들과 저 자신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그 날 밤 저는 비로서 하나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은 부흥을 일으키는 목사도 아니고, 기적을 행하는 능력도 아니고, 어떤 사람도 어떤 사명도 사랑할 줄 아는 목사임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시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보지 못하기에 버리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제 70년 후면 예루살렘이 완전히 무너지고 그 후 1900년 동안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훝어질 것을 몰랐습니다. 주님이 경고하고 말씀하셨는데도. 알았다면 그러한 율법 논쟁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했습니다.
시편 84편 5-7절에서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했습니다.
지금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시온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명의 빛을 따라가는 자가 영생에 이릅니다. 여러분,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생 천국을 보는 눈을 가진 자는 진실이 무엇인지 보게 합니다. 빛 가운데서 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아프카니스탄 의료 선교팀 배형규목사의 순교로 온 국민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과 함께 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입니다. 의료 선교팀의 인질 사태와 배형규목사의 순교가 무모한 개죽음인가? 지업자득인가? 그러나 빛 가운데서 이 모든 일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을 만한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141년 전인 1866년 우리나라는 아프카니스탄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27세 영국의 토마스목사가 대동강변에서 참수당했습니다. 탈레반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르지 않은 것을 보아야 합니다. 토마스목사 순교 당시 가족이나 영국 교회나 국민들, 교인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 후 계속하여 의사와 간호사, 선교사들이 조선의 문을 두드렸고 결국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누구의 죽음이 기억되고 있습니까? 그 때 당시 편안하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후손들마저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토마스목사의 이름은 더욱 존귀히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동란 시기에 극도로 위험하고 치안 부재 상태에 있던 한국에 수많은 서구 교회가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봉사활동을 전개했었습니다.
  배형규목사, 그 이름이 아프카니스탄 선교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배형규목사, 우리와 한 시대에 함께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떨까요? 빛이 비취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아프카니스탄 단기 선교팀의 일은 한국 교회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선교를 나가면서도 우리 안전만 생각했습니다. 교통사고라도 나면 안되었습니다. 여름 캠프를 가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교는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계 6:10-11) “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1907년 전 순교자 보다 최근 100년 동안의 순교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지난 금요일 IHOP 집회 때 한동대 총학생회장 강윤희자매가 눈물로 기도 인도를 했는데 며칠 전 아프카니스탄 바로 그 현장에서 돌아온 자매입니다. 순교의 각오로 열방으로 나아갈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생명의 빛을 발견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그도 빛을 발하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밝은 사람입니다. 결코 “내 죄! 내 죄!” 하며 살지 않습니다. 빛 가운데서 죄를 깨닫는 동시에 죄인인 자신에게 부어주시는 폭포수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밝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워도 정도를 걷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생명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 영국 BBC 방송에서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62세 된 존브레드릭이라는 사람이 병원에서 췌장암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는 남은 삶이라도 풍족하게 살고 싶다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평생 모은 재산을 다 탕진하며 흥청망청 살았습니다. 그런데  재산을 다 써 버리고 나니 암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날듯이 기뻤지만 그것도 잠시, 다음 순간 찾아온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여집사님도 암으로 6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너무나 절망이 되었으나 곧 자기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꾼 돈을 갚고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보고 맺혀진 관계를 다 풀었는데 6개월이 지났는데도 별로 더 나빠지지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암이 아니고 오진이었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돈도 많이 쓰고 옷도 다 나눠 줘 버렸는데 후회가 되지 않으세요?”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지난 6개월처럼 진지하게 내 인생을 살아간 때가 없었습니다. 이 마음 가짐으로 그대로 나머지 제 인생도 살았으면 좋겠어요.”
영생의 눈을 뜬 사람은 사는 모습이 다릅니다.

  한 일본인이 1940년 초 미국 샌프란시스코 교외에서 장미 농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스위스에서 이민 온 그리스도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장미 농장을 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매우 가까이 지냈습니다. 스위스에서 온 그리스도인이 늘 이 일본인에게 전도를 하였지만 그 때마다 조용히 미소만 짓고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일본 사람들은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에 들어가는 이 일본 사람에게 이웃 집에 사는 그리스도인 스위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가 있는 동안 내가 농장을 잘 돌봐 주겠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은 겉으로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스위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나의 하나님을 믿으세요. 안심하고 떠나세요.”

  일본 사람이 전쟁이 끝나 2년 만에 농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기차 역에서 내리자 이웃 스위스 사람이 “Welcome back home!”이라고 쓴 큰 플랑카드를 들고 역으로 환영을 나왔습니다. 집에 와 보니 농장은 자신이 가꿀 때보다 더 아름답고 깨끗하게 잘 관리되었고 아름다운 장미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부엌에 들어가 보았더니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농장에서 나온 수익금을 저금해 놓은 통장이 있고 그 옆에는 조그마한 카드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딱 두 줄이 쓰여 있었습니다.

“God loves you!(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You could start again.(당신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그는 무릎을 끓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고백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싶습니다.” 마침내 그는 주님 앞에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살고 싶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삶 속에 빛이 드러납니다.

오늘 말씀을 들을 때 빛은 부담스럽고, 솔직히 어둠이 편하게 여겨졌던 분, 지금은 마음이 변화되었기를 바랍니다. 빛이 좋아져야 합니다. 생명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철저히 지킨다고 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하나님을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성경 책은 가지고 다닐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에 대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향하여 서지 않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여전히 사람에게 있고 문제에 있고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내가 바라보지 않으면 그림자만 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빛을 경험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진정한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예수님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등지면 빛은 보이지 않고 그늘만 보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를 믿어서는 안됩니다.

  IHOP 금요 집회 강사 Garry Wienz는 60이 가까우신 분인데 아내를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고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겨우 이틀을 보지 못했는데! 이메일로 만나는 것 말고 전화로 말하는 것 말고 아내와 함께 있고 함께 지내는 것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나이도 지긋하신 강사님이 그러시니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알고 싶으신 것이 이와 같다는 말에 도전이 되었습니다.

사랑학 교과서를 가지고 있다고 사랑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사랑에 대한 이론, 신학, 수많은 책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성경 책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읽었다고 설교 중에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다고 예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마음의 욕구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시는 분이 게십니까?
예수님을 향하여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예수님입니까?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예수님입니까?
관심이 세상인 사람은 예수님이 빛이신 만큼 그림자만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돌아서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번 IHOP 컨퍼런스에서 빛이신 예수님을 경험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느끼며 울고 웃고 찬양하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찬양하며 언제 시간이 지나는지 모르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말씀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어서 말씀의 은혜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좀 실망스러웠을지 모릅니다. 집회가 너무 감정적인 것 아닌가 하는 평가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빛이신데, 이 빛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강렬한 빛으로 주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예수님을 이처럼 강한 써치라이트나 레이져빔 같은 빛으로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깊은 죄악 속에 있거나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는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예수님의 빛은 마치 다이아몬드 빛에 비유될 수 있을까요? 다이아몬드 빛은 하나가 아닙니다. 다이아몬드를 연마할 때, 기술자가 컷하는 면마다 다른 각도로 다른 빛을 발하기에 생기는 아름다움입니다. 그 빛은 강하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황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이 아름다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다양한 빛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만 절대시 하는 것은 참 빛을 모르는다는 뜻입니다. 성경 66권이 다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의 빛을 발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체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모세5경, 역사서, 복음서, 시편, 잠언, 전도서 등이 발하는 빛이 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하나입니다. 강렬한 레이져 같은 빛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의 빛도 있습니다. 그 모든 빛이 함께 어우러져 황홀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빛되신 예수님께로 나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답답할 때 그저 빛이신 예수님께로 향하여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 오시고 우리가 빛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빛이 내게 비추이고 내가 주님의 빛을 알고 그 빛은 나를 통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빛이 나를 통해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두려움 마음이 있습니까? 아직도 어둠 속에 숨어야 될 형편입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감추인 것은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될 수가 있습니다. 어둠 속에 다니지 않으려면 주님이 보여주셔야 됩니다. 무엇이 살 길인지를. 여러분이 빛으로 충만한 은혜를 받고 있어야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비로서 빛이신 예수님을 여러분을 통해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이 그와 같은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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