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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림이라도 개척하라 (수 17:14 - 수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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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림이라도 개척하라
여호수아 17:14-18:6

(17:14)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16) 요셉 자손이 가로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17)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일러 가로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18: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 그 땅이 이미 그들의 앞에 돌아와 복종하였음이나 (2)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얻지 못한 자가 오히려 일곱 지파라 (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4) 너희는 매지파에 삼 인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 기업에 상당하게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5) 그들이 그 땅을 일곱 부분에 나누되 유다는 남편 자기 경내에 거하고 요셉의 족속은 그 북편 자기 경내에 거한즉 (6) 그 남은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 곳 내게로 가져올지니 내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뽑으리라

지난 시간에는 유다 지파의 갈렙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요셉 두 지파와 나머지 일곱 지파가 기업을 차지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스스로 개척하라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개척정신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보면 요셉 지파가 여호수아 앞에 나아와 항의 합니다. 자기들은 큰 지파인데 어째서 한 분깃만 주냐는 항의였습니다. 사실 요셉 지파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 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바로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입니다. 여호수아 또한 에브라임 지파출신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항의는 잘못되었습니다. 이들은 실제 한 몫만 받은 것이 아니라 세 몫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몫은 요단 강을 건너기 전 동편 땅에서 므낫세 절반 지파가 받았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를 위하여는 16장에 요단 서편 땅에서 기업을 분배받는 과정이 나옵니다. 17장에는 나머지 므낫세 절반 지파에게 기업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많은 땅을 차지할만큼 그들이 정말 수가 많았는가?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장정들의 수를 계수했던 민수기 기록에 비하면 그들의 수가 월등히 많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므낫세 지파의 장정 수는 52,700명이었고, 에브라임 지파의 인구는  32,500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이미 요단 동편 땅에서 기업을 분배받은 후였기에 실제 요단 서편에서 분배받을 요셉 자손의 장정 기준 인구 수는 아마 모두 합쳐 6만을 넘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숫자는 유다 지파의 76,500명이나 단 지파의 64,400 명 등 다른 지파의 숫자에 비해 결코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요셉 두 지파가 불만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들이 그리는 그림이 컸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이 두 지파의 조상이 되는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49장 22절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그 유명한 야곱의 축복입니다. 요셉 지파는 이 말씀대로 샘 곁에 심겨진 나무처럼 담을 넘어 번성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꿈이 큰 사람은 지금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땅 끝을 향하여 달려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며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어냈던 히딩크 감독처럼 정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울었던 알렉산더처럼 땅끝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알렉산더는 자기 아버지 필립포스 2세가 자주 전쟁에 나가는 것도 기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정복해야 될 땅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요셉 두 지파는 숫자는 다른 지파와 비슷했지만 그 꿈이 컸기에 자기 분깃이 작아보였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들이 너무 편한 길만 택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점령하기 쉬운 곳만 찾다보니 땅이 좁아 보입니다. 이런 요셉 두 지파를 향하여 여호수아는 먼저 그들을 추켜 세워줍니다. “너희는 큰 민족이다”(17:15), “너희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는 지파다”(17:17)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합니다. 이렇게 칭찬한 후 두 지파가 가야 할 곳을 지정해 줍니다. 첫째,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이 거하는 삼림으로 가라(15). 둘째, 가나안 사람들이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로 내려가라(16). 그런데 이 두 곳 중 한 곳은 삼림이 많은 산지이기에 거하기에 적당하지 못하고, 다른 한 곳은 가나안 사람들이 철병거를 가지고 있기에 점령하기에 쉽지 않은 곳입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를 향하여 이미 있는 땅 가지고 불만을 갖지 말고 스스로 땅을 개척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개척자는 창조자들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밟는 걸음이 곧 새 길이 됩니다. 개척자들이 있었기에 신대륙이 발견이 되고 마침내 인류는 동쪽 끝과 서쪽 끝이 만나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학 개척자들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마침내 비행기를 만들어 내고 급기야 달나라에까지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척자의 길은 외롭지만 이들이 있기에 인류는 발전을 해왔습니다.

개척자의 삶의 대표적인 본보기로 덴마크의 그룬트비와 달가스를 들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덴마크는 깨끗하고 아름답고 부유한 낙농 국가입니다. 그러나 이 땅은 원래부터 그렇게 아름다웠던 땅은 아니었습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바다보다 낮습니다. 북해와 발트해의 바닷바람에 시달리며 돌과 모래, 잡초만이 무성한 황무지였습니다. 이런 나라를 바꾼 것은 그룬트비와 그의 영향을 받은 달가스의 개척정신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19세기에 활동했습니다. 덴마크는 지금의 독일(프러시아)과 잇달은 전쟁에서 패배해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어야 했고, 주요 곡창지대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온 국민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이들이 들고 나왔던 유명한 구호가 바로 “밖에서 빼앗긴 땅을 안에서 찾자”는 구호였습니다.

처음 이 운동을 일으켰던 그룬트비는 오늘날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그는 무엇보다 국민정신 개조운동에 주력했습니다. 그룬트비는 원래 목사였습니다. 코펜하겐 신학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그는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생각을 가진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목사 자격을 얻기 위한 설교 시연에서 그는 10분 동안 “덴마크 교회 목사들이여 회개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기존 교회와 신학에 대한 이런 비판적인 태도 때문에 7년 동안 목사직이 정지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초기에 조그만 섬으로 발령이 되었습니다. 그룬트비는 자기와 같은 사람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에 열등감에 빠졌고 급기야 노이로제와 우울증으로 신경쇠약에 걸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그룬트비가 42살에 성령체험을 합니다. “뱀이여! 뱀이여!”하며 자기 몸을 감고 있던 뱀으로부터 풀려나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룬트비 목사는 성령 체험 후 모든 병에서 낫게 되었고 교만이 깨어지고 자유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 자기 조국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되는 데 그 환상은 덴마크가 잘살 수 있다, 소망이 있다는 환상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국민을 각성시키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조국을 사랑하라, 셋째 백성을 사랑하라 는 세 가지 사랑 곧 삼애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룬트비 목사는 황무지가 문제가 아니라 황무지가 된 백성들의 마음이 더 문제라는 것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룬트비는 최초로 젊은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국민고등학교를 열어 신앙교육, 국민정신 개조, 개척정신 고취, 인재양성 등에 힘썼습니다.

이에 감화를 받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달가스입니다.  달가스는 “황무지 유틀란트 반도의 모래 언덕을 장미꽃 향기가 가득한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로 바꾸자”면서 대대적인 개간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덴마크는 북극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에 여름에도 서리가 내릴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찬 바람을 막기 위해 먼저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노력을 통해 덴마크는 세계에서도 선진적인 낙농국가, 화훼국가, 조림국가가 되었습니다.

개척자의 보람

우리 안에도 여전히 개척해야 될 분야가 많습니다. 우리의 눈이 바로 이 미개척지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개척자 정신을 가진 청년들이 많은 민족일수록 살아있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요즘 대학가의 풍토는 너무 유감스럽습니다. 젊은이들이 꿈을 찾고 비전을 찾아가기 보다는 안정된 직장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소망이 없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정착했던 곳은 가나안 산지였습니다. 강수량도 많지 않고 흙먼지가 날리고 돌멩이도 많은 석회암 지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을 가보면 서구 사회보다 나을 정도로 모든 것이 풍요롭게 변화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성지순례를 가보면 옛 애굽인 이집트는 마치 시골 같고 이스라엘은 세련된 도시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땅을 주시기보다 사람을 바꾸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은 고난 가운데 연단을 받아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개척정신을 가지길 원하였고, 여기에 성공에 비결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개척은 물론 힘이 듭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람 있습니다. 새로운 땅을 밟는 맛이 있습니다. 창조자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계 중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세계를 찾아내는 기쁨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더욱더 간절히 기도하게 만드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위대한 사람은 개척자들입니다.

개척자의 보람은 일찍이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도 예찬된 바 있습니다.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파우스트는 어느 날 찾아 온 악마 메피스토팔레스와 계약을 맺습니다. 그 계약의 내용은 파우스트가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는 그때가 있다면 그 순간 자기 영혼을 악마가 가져가도 좋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파우스트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악마는 이런 저런 상황으로 파우스트를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사랑을 경험하지만 고통으로 끝나고 맙니다. 여러 쾌락을 좇아 살며, 지식의 깊이를 맛보며, 권력을 누리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리스 신화의 세계까지 여행을 가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파우스트는 마치 덴마크처럼 버려진 땅과 습지대를 개간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제방과 둑을 쌓고 버려진 땅을 일구어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복지 낙원을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개간사업을 합니다. 한참 개간 사업을 진행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파우스트의 마음에는 만족감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칩니다. “오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사랑의 삶이 아름답다, 또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창조적인 일을 하는 개척자의 삶이 아름답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짧은 한 평생을 살아갑니다. 남이 터를 닦은 데서 출발하면 안정은 되지만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 기쁨도 짧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자세 곧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15:20)는 개척자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그림을 그려라

두 번째 하나님의 기업을 차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용기와 비전입니다. 용기와 비전은 함께 갑니다. 용기가 없기 때문에 비전이 흐려집니다. 비전이 없기 때문에 또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나머지 일곱 지파가 그랬습니다. 다른 다섯 지파는 이미 자기 기업을 찾아서 갔는데 이 일곱 지파는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18장 3절입니다.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이미 땅을 주셨는데 이들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분배된 땅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가나안 족속들이 두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기업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야 어떻든 그들은 차일피일 시간만 미루고 있습니다. 비전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중요한 것은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비전을 미루다 보면 비전이 약해집니다. 일단 행동으로 옮기고 나면 비전이 구체화되고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으면 그 비전이 불가능한 이유만이 우리 생각을 지배하게 되어 결국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에게 비전이 주어질 때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여호수아의 부지런함은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바입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비전이 주어지자 곧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에서는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라 말씀합니다.

일곱 지파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비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33장에는 모세가 각 지파를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모세는 갓 지파에 대하여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케 하시는 자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신33:21). 단 지파에 대하여는 “단은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신33:22). 납달리 지파에 대하여는 “은혜가 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방과 남방을 얻을지로다”(신33:23). 아셀 지파에 대하여는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 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33:24-25)라고 축복하였습니다. 하나같이 사자와 같은 용맹함의 능력과 풍요의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능력과 복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비전을 상실한 일곱 지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18장 4절입니다. “너희는 매지파에 삼 인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 기업에 상당하게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그들은 이미 유다와 요셉 두 지파가 차지한 곳 외의 땅을 정탐하고 그림을 그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늦게 출발하면 이미 좋은 곳은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나 늦었더라도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전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비전은 말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비전은 그와 동족어인 비디오라는 단어가 그렇듯이 보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면 명확히 보이기 시작하고 명확히 보이면 용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약속에 대한 꿈이 흐려질 때마다 하늘의 별을 보여주며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너희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며 아브라함의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요셉은 날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하는 꿈을 꾸며 살았습니다.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환상을 보며 광야 40년을 견디었습니다. 비전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는 직접 약속의 땅을 밟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열정이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에게도 그림이 필요합니다. 계속 그림을 그리며 이 그림을 향하여 한걸음씩 나아갈 때 우리는 마침내 그 비전을 성취하는 인생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여호수아는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자상한 코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즘은 리더십보다 코칭이란 말을 잘 사용합니다. 리더는 일을 시키고 사람을 관리하는 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리더는 운동선수들의 코치처럼 그들의 부족한 곳을 교정하고, 자신을 100% 계발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꿈은 넘치지만 방향을 못 잡고 있는 요셉 두 지파에게 개척 비전을 줍니다. 또 비전을 상실한 일곱 지파로 하여금 다시 약속의 땅을 밟고 오게 함으로써 그들 안에 있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이 참다운 지도자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18장 이하부터 19장 까지는 일곱 지파가 여호수아의 격려에 힘입어 자기 기업을 찾아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위대한 점은 자기 것을 먼저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지파들이 기업을 차지하기까지 지켜보다 그들이 그 일을 다 이루고나서야 자기 몫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19장 49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의 딤낫세라라는 성을 기업으로 받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결심하고 거하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업을 제대로 소유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필요했던 것은 자기 기업 안에 있는 가나안 족속을 철저히 몰아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파가 이 일에 실패합니다. 가장 강성했던 유다 지파나 요셉 지파들이 그러했으니 다른 지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15장 36절입니다.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16장 10절입니다. “그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 17장 12, 13절입니다.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적들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결심하고 거하겠다고 하면 그들보다 더한 각오를 갖지 않으면 쫓아낼 수 없습니다. 결국 이들을 쫓아내지 못하니까 이 가나안 부족들이 나중에는 올무가 되어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그 내용이 사사기에 나옵니다. 사사기 2장 3절입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옆구리에 가시가 박혀 심심하면 한 번씩 찌르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부족들이 섬기던 바알 우상에 미혹되어 여호와 하나님 신앙으로부터 많이 벗어나게 되고, 이 때문에 끝내는 바벨론에게 자기 기업이 되었던 가나안 땅을 빼앗기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가난안 족속을 다 섬멸하라는 명령을 비인도적이라는 시각에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에는 이 말씀을 영적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죄악과 피흘리기까지 싸우며, 그 죄와 타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축복이 죄와 함께 하는 축복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기업’이 되기를 원하지 그냥 기업이 목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주변의 애굽이나 바벨론이 더 하나님이 원하시던 나라였을 것입니다. 70, 80년대 한국교회의 성장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성장과 축복 자체가 목표가 되었지 거룩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성장은 이루었지만 거룩은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는 거룩이 문제가 되어 교회가 오히려 쇠퇴하고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는 현실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거룩을 외치려 하지만 이미 죄악과 세상 정신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어서 돌이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장이 더딜지라도 교회가 거룩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맹자』 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양혜왕이라는 사람이 맹자를 찾아서 물었습니다. “나라의 이익이 될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맹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이 나라의 이익만 생각하면 관료들은 자기 집안의 이익만 생각하고, 백성들 또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게 되어 나라 전체가 자기만을 생각하게 되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요즘 대통령 선거에 나온 분들의 하나같은 주장이 바로 ‘경제’입니다. 저는 세상이 경제와 이익을 좇아가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 게 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마저 ‘경제 경제’하면 그 나라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는 그 민족의 정신적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이익을 좇아 살면 그 공동체는 파괴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다름 아닌 이웃을 위한 희생과 사랑이요, 인류를 위한 봉사요, 더불어 사는 공동체 정신이요, 함께 누리는 평화요, 민족에 대한 사랑이며,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개척정신입니다. 교회에는 오직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프가니스탄 그 위험한 곳을 찾아갔던 23명의 샘물교회 청년들의 봉사와 희생 정신은 높이 기려야 합니다. 비록 방법이나 봉사 과정에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 큰 봉사정신과 인류애를 덮을 만큼은 아닙니다.

교회는 이익과 축복만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부르셨습니다. 거룩을 잃어버리고 성장과 부흥을 한다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거대한 쓰레기더미에 불과할 것입니다. 차라리 가난할지언정 거룩한 것이 더 낫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런 부르심을 망각하고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지 아니하다 결국 죄에 먹히고 맙니다. 죄 또한 누룩처럼 겨자씨처럼 보이지 않고 작은 것이지만 그것을 방치하면 온 곡식 가루를 변질시키고, 온 양분을 다 빨아들여 식물들을 자라지 못하게 만드는 쓴 뿌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철저히 죄악과 싸우라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여 죄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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