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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한계 - 천국이 보입니다 (수 24: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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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수24 : 29 - 33절               
제  목 : 인생의 한계 - 천국이 보입니다.

온누리 교회 하 용조 목사님은 간암 수술을 6번이나 받고
최근에는 일주일에 3번씩 혈액투석을 받는 등 최악의 건강 상태에서도
      목회와 선교적 열정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 조용기 목사님과 만난 자리에서 하 목사님이 하는 말이
“혈액투석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꼼짝없이 사로잡혔다는 생각이 듭니다.
  덕분에 그동안 분주하면서 하지 못했던
      진실 된 큐티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라고 말하자
조 목사는 “바로 그것이 은혜 아닙니까” 라고 답하며
“많은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을 찾게 되지요”하더랍니다.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되면 천국이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실낙원의 저자 <밀턴>은 죽음은 천국의 관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기록되 장사를 통해
    천국의 소망을 더욱 굳게 붙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서는 총 2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여호수아의 신앙의 결단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심한 후
그 증거로 세겜 땅 상수리 나무 아래 기념돌을 세워 증거로 삼고는
      28절에 백성들은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마치 책의 부록과 같이 추가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와 요셉과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장사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의 장사가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부록이 주는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습니다만
특히 여호수아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1. 여호수아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입니까?(29-30절)

29절은 여호수아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담대한 믿음과 용기 충천했던 영원한 젊은이로 통했던 지도자 여호수아도
어느덧 110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다른 10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받고
      폭도로 변한 군중들을 향해
“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고 그 땅의 거민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던 믿음의 거장 여호수아였습니다.
가나안 정복의 꿈을 키우면서 40년을 준비하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가나안에 입성,
      7년간을 정복전쟁과 땅 분배를 마치는 동안,
여호수아도 나이 많아서 인생이면 누구나 가는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다 사람들은 이 길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죽음을 통해 그 일생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큰 신앙의 생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1절에 이 일 후에 여호수아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 일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정복과 기업분배 하는 일을 다 마친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감당하고 눈을 감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장수하다가 돌아가시면 호상이라고 합니다만
성도의 호상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감당하고 눈을 감는 것이
    복된 죽음 즉 호상인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비록 바울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지마는
딤후4:7-8절에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죽는 것  - 바로 복된 죽음인 것입니다.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밝고 밝은 그 아침을 당할 때
  요단강을 건너가서 주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

2)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여호수아의 소개를 살펴보면
1:1절에 [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
그런데 2장부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불리워집지다.
그리고 오늘 여호수아의 죽음을 기록하면서는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모세의 시종으로 출발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충성함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에 여호와의 종으로 남는다는 것
      신앙의 생애의 한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오늘 성도의 최상의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기억되시기를.
여호수아의 죽음은 여호수아의 시대의 마감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의 시대의 마감을 기록하면서
    31절에서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여호수아 시대를 마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암시적 메시지는 무엇입니까?(31절)

31절 [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의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

1)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은
        여호와를 섬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목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인물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서를 통해 여러분들 마음과 삶에 남은 교훈이 무엇입니까?
많은 전쟁과 정복한 성읍들의 기록의 여호수아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되었나?
사건마다 성읍마다,
달리 표현한다면 이스라엘의 걸음마다 머문 자리마다
    하나님의 은총이 묻어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는 세대들은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믿음의 세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서의 부록 같은 말미에
    이 사실을 기록한 이유는 여기에 뭔가 암시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역사를 목도한 세대들은 하나님 잘 섬겼지마는
여호수아가 죽고 새로운 시대 사사기로 넘어가면
곧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하므로
  바알을 섬기고 다른 신들을 섬기더라 고 합니다.
왜 그들은 쉽게 여호와를 떠나고 말았을까?
여호수아를 잇는 지도자를 세우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다음 세대들을 신앙으로 바로 세우는 일에 실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땅과 안식을 얻었으나 누리는 것에 실패한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들의 실패의 원인은
    다음 세대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한 세대가 지나갔을 뿐인데
    하나님을 기억치 못하고 악행을 저지르며 신앙에서 떠납니다.
이 사건만 보더라도 `우리가 진짜 목숨을 걸어야 할 건,
            다음 세대라는 것` 을 가슴 깊이 새야 하겠습니다.

사사기 서에 보면 다음 세대를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고 합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란 ? 고난을 모르는 세대,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 보지 못한 세대를 말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치 않는 세대를 말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섬기지 아니하며         
          나아가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예를들면 전후세대를
BabyBoom generation 또는 Baby generation 또는 Boomer세대라고 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었습니다.
  1. 중산층이 되는 것-잘사는 것,  2. 사회적 안정된 지위-출세하는 것
  3. 이상적 가정-육신적 행복입니다.
이 아메리칸 드림이 이루어지자 이들은 서서히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퓨리탄의 후예들로서 그야말로 개척신앙 정신으로 일구어 놓은 미국을
젊은 케네디 대통령의 개혁구호 아래 잘사는 미국은 되었지마는
    하나님을 떠나가는 미국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역사를 모르니 그 고난 속에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모르며
      하나님의 손길을 모르니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현실을 주시해 보면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만연하고 있습니다.
88올림픽 이후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이지만
90년대 들어와 한국교회 주일학교가 반 줄었다고 하더니
2000년 들어와서는 1/3 남았다고 합니다.
그럼 주일학교, 나아가 청소년들이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분석해보면
가장 큰 이유가
  부모세대가 이루어놓은 물질적 풍요로 말미암은
          신앙생활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역사를 모르고 잘 살게 되니 하나님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한국교회도 앞날이 밝지마는 않은 것같습니다.
우리는 한국교회사를 100년 만에 하향곡선을 그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민족의 수난의 역사 속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손길을 반드시
  전후 세대에도 가르쳐 줄 수 있는 믿음의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 가운데 지켜온 순교정신의 신앙을 물려줄 수 있는
      믿음의 세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좋은 예를 배워야 합니다.
지금 미국에서 가장 성장의 모델로 여기는 두 교회가 있는데
시카코의 윌로우 크리닉 교회와 켈리포니아의 세들벡 교회입니다.
빌 하우벨스 목사가 개척한 윌로우 크리닉 교회와
럭 워렌 목사가 세운 세들벡 교회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비슷한 시기, 약 30여년 전에 당시 젊은층이였던
              부머세대를 겨냥했다는 것입니다.
조금전에 말씀드렸듯이 아메리칸 드림을 가진 부머세대들이
  이제 그 꿈을 이룩하여 교회를 떠나갈 때
빌 하우벨스나 릭 워렌은 저들에게 희망을 걸고 교회를 세우고
  저희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드렸던 것입니다.

분명히 전쟁 전 세대와 전후 세대가 다릅니다만
우리의 보는 시각에 따라서 전후 세대를 교회 안으로 불러 들어올 때
    이 시대에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요사이 젊은 것들 하고 혀만 찰 것이 아니라
    요사이 젊은 것들에게 희망을 걸고
    저들이 교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교회는
    항상 젊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교회에 예배를 인도하러 가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대부분 50대 이상의 교인들만 앉아있고 30대 40대가 잘 안보여요.
그러니 내일교회를 생각하면 흐믓하기도 한데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서글퍼집니다.
젊은이들을 포용하고 희망을 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사기 전체 시대의 특징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잘 나타낸 것이
17:6절과 18,19,21장에서 반복하여 나타나는 말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
하나님을 외면하고 나니 자기 생각이 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였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마는 고난 가운데 큰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모르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전후세대같은 교인들
자기의 생각이 옳은 줄 알고
세상의 문화적 수준을 신앙의 수준인 줄 착각하고
세상 기준에 따라 살며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바 없이 살아갑니다.
특히 젊은층이 많은 우리교회 전후세대 교인이 많습니다.
80년대만 하더라도
교인들이 교회가 무엇을 한다하면 모일 줄도 알고 협력할 줄 도 알고
그래도 목사 말이라면 순종해야 한다는 순종의 신앙이었지마는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다고 여겨져야 모이고 협력하지
    교회라고 해서 목사라고 해서 협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신새대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세상이 좋아 보여 세속 문화에 동화되어 가다가
결국은 그 세상의 노예가 되어 발가벗기 워지는 날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노병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갔습니다. 여호수아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로 여호수아서 끝을
    요셉의 뼈가 세겜에 장사된 일이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요셉의 장사를 이곳에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3. 요셉의 장사를 이곳에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32절)

32절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
요셉은 당시 애굽에 국무총리로써
    바로왕 다음으로 애굽의 제 2인자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열 한 형제들이
    식솔을 이끌고 모두 다 애굽으로 이민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언약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젠가는 돌아갈 것을 내다 봤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요셉은
창50:25절에 임종시 유언을 하는데
    자기가 죽고 나면 그 해골을 간직하고 있다가
    그 땅을 떠나는 날에 자기의 해골을 메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올라가서
            그곳에 자기를 매장시켜 줄 것을 맹세케 했습니다.
요셉이 자기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 가나안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 이후
무려 500 년이 지나서 그 뼈를
이곳 세겜 땅 중에서도 그의 아비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 백 개를 주고 산 땅에 묻혀지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요셉의 유골이 가나안 땅에 장사되었음을 굳이 언급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히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31절 말씀과 요셉의 장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냥 스쳐 지나다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 같지마는
다음 세대에게 여호와 신앙을 계승치 못한 여호수아 시대 사람들과
    대조해서 기록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집트 땅에 묻혀있는 자신의 뼈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어달라고 한 건,
첫째,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을 확실히 보았을 뿐 아니라
둘째, 자손들이 그 뼈를 보며
          `약속`을 믿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요셉처럼
    너희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자녀들과 그 후손들을 믿음 위에 세우는데
      자신을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민족의 미래와 내일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 번째 장사된 인물은 엘르아살입니다.


4. 엘르아살의 장사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인생의 교훈이 무엇일까요?(33절)

33절 [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무리가 그를 그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
이 세 사람의 무덤은 “결국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되었던 삶과 광야에서 방황하던 삶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에서 이렇게 안식하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것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신실하게 지키셨다는 것을 전합니다.

그런데 33절을 자세히 보면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다 죽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전3:1절 이하에 말씀에
“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라고 한 것처럼,
  모든 범사에는 때가 있으며 기한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시편90:10절에서
“ 우리의 연수가 70 이요 강건하면 80 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날아가는 인생`으로 우리의 삶을 표현하였습니다.
약4:14절에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습니다.
안개 같은 인생이란 허무하게 사라져 가는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시144:4절에서는 `그림자 같은 인생`을 말합니다. 인생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육신의 건강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도 권세도 생명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한계를 바로 알면 천국이 보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바입니다(히 9:27).`
살아 있는 동안 아무리 부귀와 영화를 누리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더 잘난 사람도 더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건강했던 사람도 병약했던 사람도 다 한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영원히 살 것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충청도 사람에게 충청도 사람은 죽는 것도 천천히 죽어서 좋겠다고 그랬더니
그분이 절대로 그렇지 않대요. 죽음에 관한한 충청도 말이 제일 급하답니다.
    사실 표준어로 “돌아가셨습니다.”이렇게 말을 하는데
    아마 경상도 사람은 “숨 거두셨다 아입니꺼?” 뭐 이렇게 말하겠죠? 
전라도 사람이면 `이 세상 버렸당께` 뭐 이렇게 할지 모르지요.
그런데 충청도가 제일 급하대요  “갔시유”
      가실 때는 다 급하게 간다는 것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독설가 <버나드 쇼>는 자찬 묘비명에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독설 같지만 마음에 새겨야 할 말입니다.
모세의 기도처럼 시90:12절에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둔 지혜로운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1975년 레이몬드 무디(R.A.Moody)는󰡐삶 이후의 삶󰡑이라는 책에서
    임사체험을 한 50여명을 면담하고 그 공통된 경험을 소개하였습니다. 
죽다가 되살아난 이들은
평화로운 감정, 유체이탈의 체험, 터널통과, 초월적인 음악과 신비로운 빛     
등의 체험을 공통적으로 꼽았습니다.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 이러한 임사체험의 경험자들이
  이후 삶에 대해 더욱 충실한 모습으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성 죽음을 바로 알면 천국이 보입니다.
천국 소망을 가진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신유은사 권사님 간증 - 개집 - 전 재산을 교회설립에 내어 놓았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 다 떠나갑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우리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5.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참조/삿1:1절)

여호수아가 죽고 엘르아살도 죽었습니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의 구속사는 막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다음 사사기1:1절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사람과 싸우리이까? ]
가나안 싸움이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완성한 것도 아닙니다.
철병거를 가지고 있는 골짜기 거민들을 좇아내야 합니다.
즉 평안하다고 여기에 그냥 눌려 앉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할 일이 있음을 말합니다.
여호수아서의 말미 부록을 통해 뭔가 아쉬운 점이 남아 있습니다.
완전히 정복하지 못함으로 다음 세대에 신앙을 물려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영적싸움을 계속할 수 있는 우리가 되시기를...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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