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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과 그의 하나님 ⑦ : 소망 (창 50: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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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그의 하나님 ⑦ : 소망(창50:22~26)

  전7:2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무슨 뜻입니까?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을 의식하고 준비해야 지혜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죠. 죽음을 반가워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엄연한 미래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마라톤으로 비유해서 생각해 보죠. 어떻게 하면 우승할 수 있겠습니까? 42.195 km 풀코스를 생각하면서 뛰어야 합니다. 무턱대고 열심히 달린다고 우승하는 게 아닙니다. 마지막 결승점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따져보고 남은 코스를 어떻게 뛸 것인가 작전을 짜야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면 곤란합니다. 지혜로운 인생은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합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며 남은 생애를 살아야 할까요?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소개된 영국인 존 브래들릭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2년 전 병원에서 췌장암으로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기왕 죽을 것 모아놓은 재산을 다 써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흥청망청 다 써버렸습니다. 직장도 그만 두고, 은행 대출금 상환도 중단한 채 매일 최고급 호텔과 레스토랑을 전전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훨씬 지나도록 몸에 특별한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병원에 다시 찾아갔더니 오진이었다는 겁니다. 췌장암이 아니라 췌장염이고,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분명 좋은 소식이지만 그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전 재산을 탕진했고, 남은 집마저 빚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그는 자기 인생을 망쳐놓았다며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정말 한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게 지혜이지만, 잘못 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생각하되 잘 준비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세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지 않거나 혹은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인생을 바르게 살지 못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되 내세를 바라보며 준비하는 게 지혜로운 인생의 모습입니다.

  감사하게도 요셉은 그런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초강대국인 애굽의 총리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지만 항상 죽음을 의식하고 내세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혜롭게 인생을 살았고, 아름답게 인생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요셉과 그의 하나님’ 시리즈 설교 마지막 순서인데, 요셉의 임종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었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부디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도 한 번뿐인 인생 지혜롭게 살다가 유종의 미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1] 죽음 :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① 피할 수 없는 죽음 :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반드시 죽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② 헛되고 헛된 인생 : 뿐만 아니라, 인생은 헛되고 헛됩니다. 기껏해야 100년도 못 사는 인생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갈 때는 때때로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지내놓고 보면 한 순간에 불과한 게 인생입니다. 평생 동분서주하며 많은 일을 한 것 같지만 별 게 아닙니다. 많이 모아놓은 것 같지만 다 사라집니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것 같지만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무상을 누누이 증거합니다. 전1:2,2:11 (솔로몬의 고백)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2: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여기서 ‘헛되다’는 말은 ‘입김’(breath)을 의미합니다. 솔로몬 왕은 전무후무한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렸지만, 아니 그러기에 더욱 뼈저리게 인생무상을 느꼈던 것입니다. 약4:14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또 벧전1:24은 인생이 얼마나 신속하며 그 영화도 쉬이 사라지는지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③ 내세로 들어가는 관문 : 인생무상 그 자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내세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도 없이 “죽으면 끝이지!”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 세상 너머 영원한 내세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이 세상에서는 잠시 살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히 삽니다.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면 영원히 살든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으며 영원히 살든 영원히 삽니다. 죽음은 내세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그리고 그 관문을 지나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와 부자가 각각 죽어서 내세로 들어갑니다. 눅16:22~23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아브라함의 품= 천국, 음부 = 지옥) 죽음의 관문을 통해 나사로는 천국으로, 부자는 지옥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동일하게 살아가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히 갈라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듣고 흥분합니다. 내세가 어디 있냐고, 특히 지옥이 어디 있냐고 따집니다. 지옥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심지어 천국에 관한 언급보다 지옥에 관한 언급이 더 많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각 사람의 자유지만, 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지 않는다고 진실이 변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인 일입니다.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는 것은 하늘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눈을 가릴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천국은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죽음이 그 관문입니다! 갈림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은혜를 믿는 자만이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아버지=하나님→천국) 죽음의 순간 천국 문을 여는 패스워드(암호)는 오직 ‘예수 십자가’입니다.


[2] 요셉의 임종 : 소망을 안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

  ① 요셉의 임종 : 본문은 요셉의 임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6절.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그때 요셉의 나이는 110세였습니다. 그리고 자손 4대를 보았습니다. 23절.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 ” 에브라임이 요셉의 아들이니까, 에브라임 자손 삼대는 곧 요셉의 자손 4대를 의미합니다.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까지 보았으니 얼마나 다복합니까? 그러나 이렇게 다복한 가문을 이루고 애굽의 총리로 장장 80년 동안 천하를 호령하고,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렸던 요셉도 역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임종의 순간 어떤 사람이 가장 죽기 힘들까 ... ?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사람, 그것을 남겨두고 가야 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요셉이 인간적으로 그런 유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음 앞에서 의연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에게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사람이라면 죽음은 절망 그 자체입니다. 자기가 누리던 모든 것을 빼앗기는 순간이며, 지옥으로 끌려가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죽음의 순간 작별의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평안한 모습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갈 곳이 어디인지, 그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② 요셉의 소망 : 임종의 순간을 맞이한 요셉은 확신에 찬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형제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유언합니다. 24절~25절. (요셉의 유언) “24 ...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 ” 나중에 출애굽 할 때에 자신의 유골을 운구해서 가나안 땅에 안장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이 말이 요셉이 묘 자리 타령을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죠. 그는 무덤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천국과 부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묘 자리에 너무 신경을 씁니다. 소위 명당자리에 묻히기를 소원합니다. 후손들도 그렇게 해야 복을 받을 줄 압니다. 믿는 성도들은 이런 데 너무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고인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매장이든 화장이든 지혜롭게 하면 됩니다.

  요셉이 묘 자리 자체에 신경 쓴 것이라면 차라리 애굽에 묻히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미라(Mirra)로 처리해서 피라미드(Pyramid)에 안장되면 가장 좋죠. 세계 역사 상 그보다 더 좋은 묘가 어디 있습니까? 요셉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소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대 이집트(애굽)의 미라나 피라미드는 왜곡된 내세관(來世觀)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애굽인들은 죽음 이후에 미라로 처리하면 영생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어놓고 거기에 안치한 겁니다. 피라미드는 사후 세계의 궁전입니다. 엄청나게 호화로운 부장품이 들어 있습니다. 사후 세계에 그런 것들을 계속 누리라는 뜻이죠. 심지어는 고인을 섬기라는 뜻으로 생사람을 함께 매장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살던 육체가 그대로 영생한다면 그럴 수 있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인간의 영혼이 내세로 들어가고, 남은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나중에 예수님의 재림 시 영원히 살 수 있는 부활체로 변화됩니다. 이 세상에서 살던 육체와 전혀 다른 몸입니다. 요셉은 영혼의 영생과 육체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소원한 겁니다. 단순히 육신의 고향을 그리워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천국에 대한 소망, 부활 신앙의 표현입니다. 

  어쨌든 요셉은 이러게 유언하고 운명합니다. 그로부터 2백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의 유언을 지킵니다.
출애굽 시에 그의 유해를 운구합니다.(출13:18~19)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장해 줍니다.(수24:32) 물건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급히 애굽을 빠져나가면서도 그렇게 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동일한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습니다. 여러분, 요셉의 신앙 가운데 어떤 면이 가장 중요할까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임마누엘 신앙, 그의 충성과 헌신, 신앙 인격 등 여러 가지 중요한 게 있지만, 소망의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잘 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위대한 신앙의 조상들의 이름과 각각의 신앙 생애를 간단히 요약해서 기록합니다. 그런데 거기 보면, 요셉의 신앙 생애를 어떻게 요약합니까? 히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요셉 생애의 ‘피날레’이자 ‘하이라이트’입니다. 37장부터 50장까지 긴 기록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신앙 중에 가장 중요한 신앙은 ‘소망의 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소망의 신앙을 가진 자의 삶 : 거룩한 나그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이 어떤 것인가 하면 바로 ‘소망의 신앙’입니다.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닥쳐올 것을 의식하면서, 영원한 천국과 영광스런 부활을 소망하는 신앙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그럴 때 모든 면에서 아름다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소망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나그네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것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나그네! 장차 들어갈 영원한 본향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모든 인간이 육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있는 것처럼 영혼도 마찬가지 영원한 본향 천국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히11:13~16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 ” 여기서 ‘이 사람들’은 믿음의 조상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세상의 고해인 가나안 땅을 사모한 게 아니라, 더 좋은 본향 천국을 사모한 것입니다. 사모한다는 단어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헬라어로 ‘오레고마이’(ορεγομαι)인데, ‘손을 뻗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간절한 심정으로 ‘갈망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소망의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① 확신 : 죽음 앞에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신앙이 좋아도 죽음 앞에 확신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요? 성도들에게 죽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천국을 믿고, 영생복락을 믿는다면 조금 아쉽지만 평안하게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성도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 여러 번 언급합니다. 그 중에 계14:13은 그가 받은 계시로 이렇게 증거합니다. “ ... 지금 이후로 주(=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 ” 불신자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지만, 예수 믿고 속죄 받은 성도들에게는 축복이라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확신하면 평안하게 임종을 맞이할 수 있는 게 당연하죠.

  미국의 위대한 전도자 D. L.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신문에 내가 죽었다고 말하면 믿지 말라 ... 단지 늙고 병든 육체를 벗고 영원한 집으로 이사 가는 것뿐이다.”  그러다 정말 임종을 맞이했을 때 그는 환한 얼굴로 이렇게 고백하며 천국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땅이 물러가고 내 앞에는 하늘 문에 열리는구나. 만일 이것이 죽음이라면 내 어찌 싫어할까? ...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 어서 가보아야 하겠다. 오늘은 내가 면류관을 쓰는 날이다.” 무디가 일평생 미국과 영국의 도시를 순회하면서 무려 2억 명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집니다.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원했을까요? 그러나 그가 임종의 순간 죽음을 두려워하고 벌벌 떨었다면 그의 복음전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겁니다. 그의 임종 시의 확신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전도자였는지 증거해 줍니다.

  우리교회 성도들 중에 먼저 천국 가신 분들 생각이 납니다. 임종의 순간 천국의 소망을 증거하며 가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오래 전에 천국 가신 권사님 한 분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고령에다 집이 먼데도 건강한 모습으로 주일이고 수요일이고 늘 교회에 오셨습니다. 그러던 몇 번 예배 시간에 보이지 않아서 연락을 해 보니까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위암 진단이 나왔다는 겁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떻게 위로해 드리나 궁리하며 심방을 갔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평안한 모습으로 누워계셨습니다.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대뜸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이제 됐어요. 평안하게 천국 가게 기도해 주세요!” 물론 치유를 위해 기도해야죠. 육신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이 거두실 때가지 최선을 다해 치료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의 신앙은 그랬습니다. 그 모습을 뵈면서 대단한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어쩌면 그렇게 담대한지 놀라웠습니다. “아! 이게 진짜 소망의 신앙이로구나!” 생각하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천국의 확신을 갖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주님 부르시면 “아멘! 할렐루야!”하면서 천국에 들어가기를 축원합니다. 

  ② 인내 : 이 세상은 아무리 좋다 해도 고난과 슬픔이 가득합니다. 요셉도 부귀영화 누렸다지만 얼마나 많은 고난과 슬픔을 겪었습니까? 그러나 천국 소망이 있기에 온갖 시련이 닥쳐와도 성도는 인내하며 살아갑니다. 그게 소망의 신앙입니다.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가 장차 천국에 당도했을 때 주님께서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기에 오늘 고난과 슬픔 중에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터키에 성지순례하면서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곳이 있었습니다.「데린구유」(Deringuyu)인데, 로마 박해 시대에 지하 도시를 형성하고 살았던 성도들의 유적지입니다. 카타콤은 지하묘지인데, 이것은 처음부터 거주지로 조성한 겁니다. 지하 12층으로 되어있다고 하는데, 그 안에 2만 명 정도가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공개된 지하 7층까지 좁은 통로를 통해 내려가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그 속에서 오랜 세월 거주하며 살았을까 불가사의입니다. 아마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인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에게 정말 천국 소망이 있다면 이 세상살이가 아무리 고달프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살아야 마땅합니다. 

  ③ 헌신 :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지만, 믿음으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하늘의 상급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영광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급의 소망과 부활 소망을 품고 이 세상 살 동안 부지런히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감사하며 자족할 뿐 아니라, 헌신해야 합니다. 딤전6:7~8,17~19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

  ④ 성화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입니다. 신부가 신랑을 만나기 위해 단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거룩한 신앙 인격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계19:7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예수 그리스도)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우리가 가꾸어야 하는 신앙 인격은 ‘천국의 웨딩드레스’입니다!
 
  이제 요셉의 생애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요셉은 일평생 임마누엘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특히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온갖 시련을 이기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상의 성공으로 자기 혼자 누리지 않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이웃과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신부로 아름다운 신앙 인격을 갈고 닦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소망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고, 장차 주님 부르실 때 소망의 신앙으로 당당히 천국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복음송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1)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2) 저 천국에서 모두 날 기다리네  내 주 예수 피로 죄 씻음 받았네
  나 비록 약하나 주님 날 지키리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3) 저 영광의 땅에 나 길이 살겠네  손잡고 승리를 외치는 성도들
  그 기쁜 찬송 하늘 울려 퍼지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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