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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과 염소 (신 14:3~5, 마 25: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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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한번 하였던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세족식을 성례로 하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교회는 분기마다 세족식을 합니다. 목사님이 장로님들의 발을 씻어주면 장로님들이 온 교우들의 발을 씻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그 교회의 장로님의 발을 씻을 때마다 왼쪽 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한번은 용기를 내어 장로님은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가급적이면 오른발을 먼저 씻어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는 오른발, 왼발의 말씀은 없고 발을 씻었다는 말만 나오는데 이런 것을 가지고 시비하니 목사님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묵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장로님은 자신의 말이 묵살 당했지만 그래도 다음 세족식 때는 기대했습니다. “말씀은 저렇게 하시지만 다음에는 오른발을 먼저 씻으시겠지”. 그런데 그 다음 세족식 때 목사님은 다시 왼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장로님은 너무 화가 나서 교인을 선동하여 교회를 나누었습니다.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성례의 한 부분 때문에 교회가 분열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교회를 개척하여 세웠습니다. 그 교회의 이름을 ‘오른발 교회’라고 지었답니다. 참 우스운 일이지만 우리가 버리지 못한 관념은 이런 어려움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른쪽과 왼쪽이 굉장히 민감합니다. 오른쪽을 일반적으로 선호합니다. 오른쪽, 왼쪽은 교회의 분열뿐만 아니라 사상이나 국가의 분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오른쪽과 왼쪽은 영원한 심판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의 분열이라는 점입니다. 오른쪽은 구원받은 쪽이고, 왼쪽은 구원받지 못한 쪽이라고 합니다.

  지난 8월 13일은 ‘세계 왼손잡이 날’입니다. 올해가 15주년입니다. 왼손잡이는 아직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대학교 강의실에도 왼손잡이 책상이 없습니다. 가위도 왼손잡이용 가위가 흔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왼손잡이가 4%로 약 200만 명입니다. 양손잡이가 8%이고, 나머지 88%가 오른손잡이입니다. 왼손잡이는 여전히 불편을 많이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왼손을 사용하는 아이들에게 오른손 사용을 강요하는 것은 왼손에 대한 편견 때문입니다. ‘좌익’이라고 하면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의 ‘right’라는 단어는 ‘오른편’이란 뜻도 있지만 ‘옳다’란 뜻도 있습니다. 오른편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통상 신생아의 17%는 왼손잡이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 이 가운데 5%만이 왼손잡이로 남습니다. 그래서 왼손으로는 불편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적 전승에 의하면 구약시대 때부터 오른편은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이해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오른손”이라고 표현합니다. 힘 있는 정의의 손입니다. 왼편은 저주와 사망, 미련함 그리고 힘의 상실로 이해됩니다. 손 또는 뺨을 말할 때 오른쪽은 고상한 쪽을 의미합니다. 오른 편은 또 신의 힘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심판 때에 오른편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쪽입니다. 반면에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영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표현합니다.

  마태복음은 ‘심판의 복음’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곡과 겨,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 밀과 가라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충성된 종과 불충한 종,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등 마태복음은 심판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나누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심판의 명료성을 의미합니다. 즉 제 3의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과 멸망 사이의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양이 더 가치 있고 값비싼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양은 흰색이고 염소는 검은색으로 선악을 대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백성들은 양떼라고 보는 당시인들의 유목민적 사고에 근거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염소는 풀밭을 못 쓰게 하고 나무를 상하게 하는 습성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양과 이리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짐승입니다. 그러나 양과 염소는 얼핏 구분하기 힘든 짐승입니다.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구분하기 힘들지만 분명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됩니다. 구분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은 구분하시고 따로 떼어 놓으십니다. 심판 때에 양 같지만 염소로 왼쪽으로 분류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염소 같지만 양으로 오른쪽으로 분류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양으로 오른쪽에 선택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양은 희고 온순하기 때문에 오른 편에서 복을 받습니다.

  34절에는 말합니다. “그 때에 임금에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아”. 양이 오른쪽에 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양의 특징과 습성을 알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목자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요 10:11). 둘째는 작은 강아지에게도 무서움 느낄 만큼 겁이 많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온순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도망뿐이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전혀 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무기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양은 방어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날카로운 송곳니나 발톱이 없습니다. 빨리 달리는 재주도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약한 자가 강합니다. 강한 것은 지구상에서 자꾸 멸종당하지만 약한 것은 끈질기게 살아남습니다. 하늘나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살아남는 자는 강자가 아니라 약한 자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강한 자들이 살아남아 하늘나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양은 선한 동물입니다. 항상 이리와 대비되는 동물입니다. 양은 거룩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양은 가장 깨끗한 제물의 대표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양으로 묘사합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고난의 양으로 묘사합니다. 요한복음 2:29에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양이시니 당연히 양이 오른편 돼야 할 것입니다.

  양은 흰 것으로 상징됩니다. 이사야 1:18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합니다. 사실은 양은 희지 않습니다. 약간 누런빛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흰 것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흰색은 선인의 상징입니다. 양이 오른쪽으로 분류된다는 것은 선인들이 오른쪽으로 분류된다는 뜻입니다. 선인들이 복을 받을 자리로 구분될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늘나라를 흰 색으로 묘사합니다. 흰 세마포, 흰 돌, 흰 옷, 흰 구름, 흰 말, 흰 보좌 등 하늘나라에는 흰 색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하늘나라는 새 것으로 묘사됩니다. 새 하늘, 새 땅, 새 이름, 새 예루살렘, 새 노래 등이 하늘나라의 특징으로 묘사됩니다. 신학자 트렌치는 “흰 것과 새 것은 천국의 기본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의 기본어인 흰 것, 그 가운데 흰 양은 오른 쪽으로 분류되고, 천국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희고 온순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구별될 것입니다.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 좋은 편에 설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시편 24:3-4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거룩한 곳에 설 자입니다. 희고 깨끗한 자가 하늘나라의 사람인 것은 확실합니다.

  지난 5월 호주에 집회인도 차 갔을 때에 그곳의 목사님들과 공원에 갔습니다. 쇠고기, 닭고기, 양고기 등을 가지고 가서 부인들이 바비큐를 하다가 어느 사모님이 그랬답니다. “목사님들이 양들 다 잡아 먹는다”고요. 그런데 성경대로 하면 잡아먹히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이 이기는 자입니다. 깎는 자보다 깎이는 자가 이깁니다. 먹는 자보다 먹히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런 자가 최후의 승자입니다.

  이런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 “복 받을 자들이여”라고 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호이 율로게메노이’라는 말인데 완료분사입니다. 한번 받은 축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영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 그리고 앞으로도 복 받을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축복된 말씀입니까?

  로또 복권 1등 당첨자 수칙이 있습디다. 첫째는 무조건 잠적하라. 둘째는 당첨금은 한두 달 후에 받으러 가라. 셋째는 기자회견 같은 것을 하지 말 것. 넷째는 집 전화, 휴대전화를 당장 바꿀 것. 다섯째는 즉시 이사할 것. 여섯째는 최소 한 달 이상 외국 여행할 것. 일곱째는 당첨 사실을 가족에게도 말하지 말 것. 여덟째는 통장 비밀번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 아홉째는 히죽히죽 대지 말고 표정 관리를 잘 할 것입니다. 이게 복권입니까? 아니면 저주권입니까? 하나도 복 같지 않아요. 세상에는 복 같은 저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양의 축복은 저주 같은 복입니다.

둘째, 염소는 검고 파괴적이기 때문에 왼 편에서 저주를 받습니다.

  41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을 자들아”. 염소는 저주의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염소의 특성이란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파괴적입니다. 거기다가 검기까지 합니다. 외모가 아니라 내면의 악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3의 지대가 없습니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선과 악의 완충지대는 없습니다. 비무장지대와 같은 곳은 없습니다.

  열왕기서와 역대서를 보세요. 두 종류의 왕이 등장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라는 왕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는 왕입니다. 그 외의 왕은 없습니다. 모든 왕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보통으로 행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제법 괜찮게 행하여”란 말이 없습니다.

  성경은 악인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잠언 12:7에는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고 합니다. 시편 37:20에는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라고 합니다. 악인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말로가 뻔합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검은색이란 악, 부정, 범죄, 멸망 등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6:5에는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고 합니다. 검은 말은 비애와 기근의 색을 의미합니다. 식량을 저울에 단다고 하는 것은 절박한 기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검은 색은 전통적으로 좋은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Black list, Black money, Black Monday, Black comedy 등 거의 모든 말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흑인들은 이런 말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왜 검은 색이 부정적이냐고 반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검은 것이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색에 대한 관념은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흑염소가 몸에 좋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아예 고아서 소주로 만들어 병에 넣어서 팝디다. 그런데 오래 전에는 염소를 팔려고 끌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안 끌려가려고 다리를 뻗치고 버티는 염소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양은 목자가 앞장서기만 하면 따라옵니다. 염소는 그 성질을 봐도 왼편 성향이 다분합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검은 부분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도록 하였습니까? 인생은 어두운 곳을 통해서 밝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흰 곳을 통하여 검은 곳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악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소녀가 애완동물 가게에 들어왔습니다. “토끼 한 마리 주세요”. “어떤 토끼를 원하니 하얀 토끼를 줄까, 아니면 검은 토끼를 줄까?” “글쎄요. 우리 집 비단 뱀이 하얀 토끼, 검은 토끼를 따질 것 같진 않은데요”. 흰 것만 삼키면 착한 사람입니다. 가리지 않고 삼키는 사람은 검은 사람입니다. 검은 사람이라고 흰 것을 먹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검은 사람은 흰 것과 검은 것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웁니다.

  염소는 아무리 양과 함께 살고, 양인 척해도 결정적 순간에는 염소의 습성이 드러납니다. 악한 성질이 나타나고 파괴적 성품이 드러납니다. 이런 자들이 왼편으로 분류되고 저주를 받을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악한 자는 그 마음이 이미 지옥이며 파멸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이 말은 “복 받은 자들이여 나아와”와 대칭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7:23에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합니다. 떠나라는 말씀은 관계 단절을 의미합니다. 저주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분과 영영히 관계가 단절될 것입니다.

결론

  히말라야의 고산족들이 양을 매매하는 방법은 양의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정한다고 합니다. 성질을 테스트하는 방법은 팔 사람과 살 사람이 함께 양을 산비탈로 데리고 가서 위로 올라가면 아무리 말라도 비싸게 팔리고, 아래로 내려가면 아무리 살져도 싸게 팔린다고 합니다. 성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양이지만 가치 있는 성품이 있고, 그렇지 못한 성품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치 있는 성품을 지닌 양이기를 바랍니다.

  양과 염소는 구별하기 힘듭니다. 양과 염소라는 말은 항상 비슷하게 사용됩니다. 양과 염소는 함께 우리에 삽니다. 신명기 14장 법전에 의하면 양과 염소는 똑같이 먹을 수 있는 짐승입니다. 거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는 구분이 됩니다. 풀을 뜯을 때는 무리 속에 구분 없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일교차가 심한 기후인 팔레스타인에서는 잠 잘 때는 양과 염소를 구별합니다. 양은 추위에 강하고, 염소는 추위에 약합니다. 그래서 밤이 되면 양과 염소를 목자들은 나누어 놓는다고 합니다. 양과 염소는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짐승입니다. 저희들끼리 무리 이룹니다. 희고 검기 때문에 함께 있지만 이미 구별이 됩니다.

  여러분은 양입니까, 염소입니까? 양과 함께 있다고 양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습니까? 양인데도 염소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속의 검은 부분을 흰 것으로 바꿉시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양처럼 희게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나 지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양으로 고상하고 깨끗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오른 편으로 구별되어 복 받는 자가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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