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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의 자리 (룻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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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자리

소망이 있습니까? 소망은 있습니다!
한 신문 기자가 영화감독 출신의 이창동 장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장관님이 만드시는 영화는 모두 너무나 어둡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마음 아픈 이야기들만을 영화로 만드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 때 이창동 장관이 인상 깊은 대답을 했습니다. “기자님은 세상에 소망이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본 세상을 그대로 필름에 담았을 뿐 입니다.” 이창동 장관의 눈에는 세상 어디에도 희망이나 소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유감스럽지만, 정말이지 어느 순간, 이 세상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우리 가정이 그러합니다. 또 어떨 때에는 우리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학교, 직장, 친구들, 동료들... 그리고 나 자신이 정말로 그러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창동 감독과 같이 더 이상 소망을 찾는 일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소망을 찾는 일에 실패할찌라도 여전히 소망은 존재합니다. 소망의 실재는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소망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소망의 자리와 가치와 능력을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룻기는 로맨틱(Romantic) 소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룻기는 보아스와 룻의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어머니께서 종종 읽어 주시던 그림 성경에서의 보아스는 백마 탄 왕자와 같이 멋있는 청년이었고, 룻은 마치 에스더처럼 아름답고 화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지한 마음으로 룻기를 연구하던 중, ‘미드라쉬’라는 권위있는 고대 유대인 성경 주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제 2의 성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미드라쉬에서는 보아스를 나오미와 같은 항렬로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보아스는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 오늘날로 말하면, 최소한 룻의 큰 아버지나, 혹은 할아버지 뻘이 되는 남자였던 것 같습니다. 흰 머리와 흰 수염이 얼굴에 눈밭처럼 수북히 쌓여 있는 노인과 딸 같은 혹은 손녀 같은 이방 처녀 사이의 결혼 풍경은 사실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 합니다.

그러나, 저는 비록 룻기가 동화같은 연애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성경 이야기 중 하나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룻기는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헤세드(דסח)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란 은혜로운 사랑을 말합니다. 그것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 대한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자신의 삶을 나누어 줄 아무런 이유도 의무도 없지만, 그저 사랑함으로 자신의 삶을 나누는 דסח는 진정 감미로운 연애이야기만큼이나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룻기는 דסח가 있는 곳에 행복과 소망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나오미의 실패담

그런데 이상하지요? 이렇게 가슴 뛰는 헤세드의 이야기는 퍽이나 어두운 배경에서 시작이 됩니다. 룻기를 처음 펼치면, 기구한 운명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그녀는 ‘나의 기쁨’이라는 이름의 뜻하고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룻기 1장은 그야말로 나오미의 철저한 실패담일 뿐입니다.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나오미의 실패를 별로 안타까워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오미가 얼마나 철저하고 완벽하게 망해가는지를 선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풍성한 가운데에서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모든 것을 잃은 체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애당초 처음에는 조금 더 여유롭고 부유하게 살기 위하여 모압으로 내려갔지만, 모압에서의 삶은 오히려 남편과 자식들까지 잃어버린 과부로서의 삶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을 때, 여인들은 “이 여자가 나오미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본문에서 나오미의 찢어지는 마음을 읽었습니다. 정말로 나오미는 베들레헴을 떠날 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본래 기쁨으로 살았던 ‘나오미’는 이제 베들레헴에서 ‘쓰디 쓴’ 인생, 마라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기자는 실패의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오미가 모든 것을 잃었다. 철저하게 잃었다’는 사실만을 전후로 짝을 지어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성경 기자는 나오미의 힘겹고 서러운 실패의 삶을 우리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줍니다. 정말로 나오미에게 세상은 아무런 소망도 희망도 행복도 없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입니다. 

소망의 빛

그러나, 저자는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 한 순간 찰나의 빛을 비춰줍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시어미니에게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 (16-17절)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모압 족속은 더욱 그렇게 취급받았습니다. 모압 족속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더러운 근친상간을 통해 이룩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남편도, 재산도 없이 거룩한 땅에 굴러들어온 ‘모압 여인’... 룻의 삶이란 비록 보지 못했지만, 눈에 선합니다. 그녀는 ‘모압 여인’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남은 삶의 즐거움을 오직 시어머니를 위해서 다 포기합니다. 룻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의무나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르바와 같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룻을 탓하거나 나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의무나 이유없이 오직 사랑함으로 자신의 삶과 생명을 나누어 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헤세드입니다.

헤세드(דסח)는 작아 보일 수 있다!

물론, 나오미는 룻의 흑진주와 같이 귀한 고백에 별로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나오미가 룻의 고백을 듣자마자, 월드컵에서 기다리던 골이 터졌을 때 우리들이 느꼈던 흥분과 짜릿함과 감격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심각한 착각입니다. 며느리의 진심어린 사랑이 갸륵하기야 했겠지만, 룻의 고백은 나오미의 마음을 한 층 더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수많은 걱정거리 중 또 하나의 걱정일 뿐이었습니다. 룻은 유대인들이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개와 같은 모압여인과의 동행은 나오미에게 그다지 힘이 될 턱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룻 대신에 엄청난 황금이 있었더라면 나오미의 마음은 좀 더 즐거웠을 것입니다. 차라리 룻 대신에 든든한 아들이 있었더라면, 나오미의 마음은 좀 더 희망찼을 것입니다. 차라리 룻 대신에... 차라리 룻 대신에... 나오미에게 힘과 소망이 될 만한 것들은 참으로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작고 보잘것 없는 룻의 헤세드를 통해서 나오미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헤세드(דסח)도 작아 보였다!

제가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에도 그와 같았습니다. 저는 무척 가난했었고, 공부도 못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나오미와 다를 바가 없었죠. 처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복음을 들었을 때, 복음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복음’이 아니라, ‘돈’이 필요했었고, ‘복음’이 아니라, ‘과외 선생’이 필요했고, ‘복음’ 대신에 차라리 ‘욕실과 공부방이 딸린 좋은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주 예수의 복음의 사랑이 저의 삶을 행복으로 가득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복음을 주셨던 하나님은 제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주셨습니다.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불신으로 닫혀 있었던 마음을 열게 했었고, 굳어버리도록 방치한 생각들도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복음이 오늘 저를 여러분 앞에 서있도록 하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저를 붙드실 것 입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제게 이렇게 많은 것을 주실만한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고 저는 먼지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를 위해 당신의 고귀한 삶을 저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게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예수같은 거 필요없다고 그랬었는데도, 도무지 복음 따위가 내게 무슨 의미냐고 그랬는데도, 그리고 그렇게 불순종하고, 죄악의 고집을 버리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은 끝가지 제게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דסח입니다.

헤세드(דסח)는 결코 작지 않다!

성도 여러분 도대체 어디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까? 소망은 오직 דסח에 있습니다. 룻은 이방여인이었고, 과부였고, 아무런 힘없는 젊은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דסח만큼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룻의 דסח는 비록 아주 작은 삶이었지만, 그녀의 생명을 드린, 고귀한 דסח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룻의 דסח는 비록 초라하고 볼품없다 말할지 모르지만, 존귀하신 예수님의 דסח를 닮은 것입니다. 바로 그 헤세드에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דסח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소망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원래 세상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세상이 캄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원래 세상은 어두운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소망을 찾아 헤메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망이 되는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빛을 찾아 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소금을 찾아 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 ‘바로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예수님을 닮은 דסח가 있다면, 여러분이 세상의 소망입니다.

헤세드(דסח)가 있는 곳에 소망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가족에는 소망이 없어.” 이런 말씀하지 마셔요. 여러분 안에 דסח만 있다면, 여러분이 가정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교회에는 희망이 없어.” 이런 말씀하지 마셔요. 여러분 안에 예수 공동체를 향한 דסח가 있다면, 여러분이 교회의 소망입니다. 우리 학교에도, 우리 회사에도, 우리 나라에도, 비록 그것이 텅 빈 나오미의 삶과 같은 황량한 벌판 같을지라도 여러분의 삶을 나누는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진정한 דסח를 가진 여러분이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장애를 뛰어넘는 사랑, 헤세드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의 삶을 나누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르바는 자신의 젊음과 부와 평안함과 남아 있는 삶이 헤세드를 방해했습니다. 분명히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의 דסח를 방해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뛰어 넘어야합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나도 곧 나의 삶을 나누어야지. 그래 저 사람이 저 문제만 고쳐준다면, 나도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 만약 지금 마음속으로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오늘 저는 설교에 실패한 것 입니다. 헤세드는 본래부터 장애물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과 제가 마음에 들기 전에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이 내 안에서 역사함으로 우리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닮은 사랑, 곧 헤세드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의 헤세드와 그 사랑을 꼭 닮은 우리의 안의 헤세드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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