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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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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행 11:19-26)

초대 교회에 불어 닥친 핍박

오순절 날 성령 강림으로 탄생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날이 부흥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을 통하여 기이한 능력이 나타나니 병든 자들이 낫고, 귀신들이 쫓겨나갔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더니 하루에 5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놀라운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불과 몇 개월 만에 신자의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가만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수단방법을 다 동원해서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대적들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님을 체포해서 공회에 세우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명을 뒤집어 씌워서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공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았더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행 6:15).

그 날, 스데반 집사님은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했는데, 그가 보여준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숭고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9절 이하에 보니 “59)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증언합니다.

민들레 씨앗처럼 퍼져나간 복음

그리고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시작으로 해서 엄청난 핍박이 일어나서 사도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도가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성도들은 안전한 곳으로 가서 숨은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핍박으로 인해 복음이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핍박이 복음을 더 넓은 지역으로 퍼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날려 산지사방으로 퍼지듯이 핍박의 바람을 타고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가지고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전도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전부가 유대인이었는데,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만 위해서 오셨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은 수지만 그러한 고정관념을 탈피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빌립 집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수많은 사마리아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8장 5절 이하에 보면, 당시의 일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5)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7)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8)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내어 사실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안디옥 전도

이뿐 아니라, 각처로 흩어진 그리스도인 가운데 몇 사람이 이방 지역인 안디옥에 가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허다한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이리하여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안디옥에 세워졌습니다.

그때까지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헬라인들이 복음을 듣고 단번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전도란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전도란, 말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주님께서 전도 대상자의 마음을 열어주셔야만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을 위해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를 목회자로 파송했습니다. 이에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를 목회하니 많은 사람이 전도를 받아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바나바는 다소로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목회를 했습니다. 그 당시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이후로 고향 다소에 가서 침거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도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일 년 동안 목회를 했는데, 많은 사람이 전도를 받아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 받은 성도들

그리고 안디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안디옥 교회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로서 뿐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은 일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이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저는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는 사실을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별명이란, 그 사람의 생김새나 버릇이나 성격상 특징을 빗대어서 짓습니다. 언젠가 길을 가다가 초등학교 아이들이 한 친구를 보고 ‘빼빼로’라고 불렀습니다. 누굴 그렇게 부르나 하고 보니까 길 건너편에 키가 크고 마른 아이가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이 경우는, 생김새에 빗대어서 별명을 붙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학생들은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선생님을 일컬어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이는 성격을 빗대어 붙인 별명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란 별명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요?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이 세인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반면에, 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은 예수 믿는 사람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언가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 안디옥 사람들은 수많은 우상을 섬겼으나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윤리적으로 볼 때도 당시에 안디옥 사람들은 세속적이고 타락한 생활을 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했으므로 경건하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노예제도가 성행하던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상전과 종이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였고,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데 힘썼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한 것을 보면,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이 교회에 모이기에 힘쓰고, 서로 사랑의 친교를 하며, 열심히 복음을 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안디옥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도시의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누구 앞에서든지 떳떳하게 표명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삽니다.” 그렇게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흔히, 기독교인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둘은 다릅니다. 기독교인은 교회에 등록한 교인을 말합니다. 물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고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인이 다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기독교인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 가운데는 예수님을 존경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지는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교수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기독교는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인이 된 것은 다른 종교들 보다 기독교가 취향에 맞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가 타 종교인이 아닌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기독교인 가운데는 구경꾼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인지, 교회가 어떤 곳인지 구경하러 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경꾼은 호기심을 위해 왔으므로 호기심을 채우면 떠납니다. 마치 기독교에 대하여 다 파악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떠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와 관련 없이 교회 생활을 해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닌 것이 구원 받을 공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것도 구원 받을 자격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여러 부서에서 열심히 봉사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간혹 보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지만 실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도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이 자기만족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는 보람을 느끼기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봉사는 그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4장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사는 것 뿐 아니라, 죽는 것조차도 자기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죽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려면 기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칭찬 받는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거친 비난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축복을 받기는 고사하고 역경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을 받고 만사형통한다는 식으로 알고 있어서는 끝까지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없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진정한 전도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전도할 때 성경적으로 바른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불신 이웃에게 전도할 때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복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니까 그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복”을 그런 의미로 알고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복이란 말은 그 의미가 너무 포괄적이고 막연해서, 듣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소지가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할 때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식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으세요.” “예수 믿고 영생 누리세요.”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세요.”라고 복음의 본질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로마까지 광활한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율법과 철학에 탁월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얼마든지 지혜의 말로 자기의 전하려는 내용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해 주는 것이 곧 전도입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에 보면,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습니다. 전도는 이 같은 내용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이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라고 언제 어디서나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란 좋은 것을 갖고 있으면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그 어떤 보화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구세주시며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 9:26)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닥친 정체성의 위기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죽는 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노라고 장담했습니다. 그것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군병들이 들이닥치자 칼을 빼어 그 중 한 사람의 귀를 잘랐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람의 귀를 겨냥하고 칼을 휘두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코 겁쟁이가 아니었으므로 자기가 말한 대로 행동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한의 도움을 받아서 대제사장 관저의 뜰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문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나는 아니라”고 하고 종들과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는데 섞여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조금 후에, 사람들이 불빛에 비친 베드로의 얼굴을 보고 묻기를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서 말하기를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으로서 베드로의 인상착의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황한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새벽닭이 곧 울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고의적이 아니라 순전히 그의 연약함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인하는 그 순간에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딱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한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 일로 인해 심한 자책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할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전히 주님을 떳떳하게 대할 면목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이 분명하건만 베드로는 풀이 죽어 지냈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본의 아니게 정체성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정체성을 회복한 베드로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은 어느 날 저녁, 베드로를 따라서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밤새 수고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해변으로 노를 저어 나오는데, 해변에 웬 사람이 서서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했습니다. “없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때 요한이 베드로에게 “주시라”고 하니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려 헤엄쳐 나갔습니다. 그것은 헤엄쳐 나가는 것이 배를 저어 나가는 것보다 빨랐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베드로가 주님을 얼마나 간절히 사모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습니다. 그 날 아침,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조반을 먹었습니다.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조금 후에,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번에도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조금 후에,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근심하며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한 일로 괴로워하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애정 어린 배려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세 번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게 하심으로 그의 마음을 치료하시고 예수님의 수제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신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있느냐 갖고 있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성패가 좌우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는 어떠한 시험과 환난이 다가와도 신앙으로 이겨냅니다. 혹 베드로처럼 실패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오뚝이처럼 다시금 실패를 딛고 일어섭니다.

반면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의 신앙생활은 이해타산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작은 시험 앞에서도 맥없이 넘어지고 맙니다. 불신 가족의 사소한 핍박에도 그만 겁을 먹고 물러섭니다. 재리의 유혹 앞에서 신앙은 헌신짝만도 못하게 내동댕이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이 확고한 성도는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핍박이 다가와도 흔들림 없이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신앙을 지켜나갑니다. 자기의 신앙을 지켜나갈 뿐 아니라, 핍박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고 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을 믿을 때 우리는 언제나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삶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보다 더 영광스러운 이름은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도 한번 믿어보라”고 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진 성도는 실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증언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에게서 그들과 다른 면을 보았으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던 것입니다.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구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어떤 냄새가 났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2장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14)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누구에게나 후각으로 알 수 없는 인격의 냄새가 납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 사람의 표정과 분위기를 통해서 그 냄새가 드러납니다. 감추려고 해도 냄새는 감출 수 없습니다. 꽃은 종류에 따라서 향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꽃을 보지 않더라도 향기만 맡고서도 무슨 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향기는 꽃의 정체성을 말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 사람에게서 발산되는 그리스도의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를 통해서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고히 가짐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일컬음을 받게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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