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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에서 두려움이 사라진 이유 (요 9: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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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두려움이 사라진 이유
요한복음 9장 13-25절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    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

  지난 목요일 부산에서 열린 영남 선교대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전국 5800여개 교회, 7만여 감리교인들이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을 가득 채웠지만, 왜 그런지 우리가 한없이 작게 여겨졌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한 담대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신경하 감독회장님은 설교 중에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상실했습니다. 교회 안에 세속 주의, 업적 주의, 금권 선거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하시면서  "감독회장인 저부터 왜곡된 선거 풍토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하고 공적으로 회개하였습니다. 최승일 감독은 "교회가 일제 시대에는 비굴했고, 독재 정권시절에는 불의를 옹호했다가 부패와 거짓에 편승하며 살았음을 용서해주옵소서." 하며 기도했습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성도들은 "교회는 성장과 물질 주의에 사로잡혀 복음 앞에 진실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길과 진리를 참되게 증언하기 위해 회개하고 경건히 무릎 꿇는다." 는 비전 선언문을 낭독하고 각성했습니다.
  언제부턴가 교회는 세상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눈과 귀에 대하여 담대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기도 제목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너무나 귀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담대함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예수님께서 눈 뜨게 하신 시각 장애인입니다. 그가 공부를 했겠습니까? 율법을 제대로 알았겠습니까? 그런 그가 오늘 본문에 보면 당대 실력자 바리새인들과 당당히 맞장을 뜨고 있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얼마나 뜨겁게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면서부터 앞을 못보는 사람을 눈을 뜨게 해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소문이 나니까 그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물었을 때, 그는 “선지자니이다.” 대답합니다. 당시에 예수를 좋게 말하는 자는 출교를 당하게 되는 상황임을 알면 대단한 선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그것은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침으로 진흙을 이기는 엄청난(?) 중노동을 했고 그리고 실로암까지 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식을 어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눈먼 자가 눈을 떴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전혀 모른 척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그런 사소한 일들에 대하여는 왜 그렇게 세세히 따지는 기가 막힌 일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 때 이 사람이 말합니다. 이 사람이 대단히 당당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렇게 당당한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다시 묻습니다
.“예수가 정말 어떻게 눈을 뜨게 하였느냐?”
그러자 이 사람이 이제는 좀 짜증을 냅니다. 너무나 답답해 하면서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하고 약간 빈정거리듯 대답합니다. 말은 맞는 말이지요. 이 사람이 바리새인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들을 쥐었다 놓았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까 30-33절까지 이 사람이 명 대답을 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더 이상 말을 해보아야 하는 말마다 자기들의 부끄러운 것이 드러나니까 호통을 쳐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면서 이 사람을 내어 쫓았습니다.
이 정도면 맞장 뜨는 정도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면서 앞을 보지 못하며 걸인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당당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당당하고 담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굴하지도 않고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키기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를 믿는다면 그렇게 되어야 정상입니다.
이 사람이 본래 이처럼 당당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걸인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체험으로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 9:25)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이 사람이 체험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구주라는 사실을 자기가 눈을 뜨는 것을 통해서 본 것입니다.
아들이 눈을 뜬 것을 본 아버지도 그렇게 당당하지는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몰아치자, 그 서슬에 눌려 감히 예수님이 자기 아들을 눈뜨게 했다고 말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아들의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잘 모른다고 한 발을 뺍니다. 두려움때문입니다.
(요 9:23)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          였더라”
실제 체험으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과 예수님에 대하여 듣고 아는 사람은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면 실제적인 구원의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그 믿음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순교는 고사하고 누가 말 한마디 해도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성경이 다 거짓말로 여겨지고 현실 생활과 거리가 먼 황당한 책으로 생각됩니다. 10년을 믿어도 그대로이고, 20년을 믿어도 그대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들이 불편하고 원망한 것 중 하나가 먹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한마디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궁에서 왕자로 살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최하층 노예 생활을 하고 마지막에는 더욱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이 고작 노예가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투덜거렸습니다.
반면 모세는 최상류 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사실 불평을 하자면 누가 불평을 해야 합니까? 왕궁에서 왕자로 살던 모세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모세는 후회했다, 불평했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왜 모세는 불평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달랐던 것입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을 따라 나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모세는 화나면 사람을 쳐죽이는 혈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체험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예수를 믿었지만 내 인생에 기적이란 없었다!’ ‘내게 눈이라도 뜨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순교도 마다하지 않을 것인데!’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예수를 믿은 것이 사실이라면 누구에게나 눈먼 자가 눈을 뜬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적 중의 기적은 나 같은 죄인이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아멘!
그러나 여전히 마음이 허전한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 생활에 담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고도 왜 눈을 뜬 것만 감격이 없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감정이 오직 세상과 육신에 대하여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얼마나 벌었는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성공했는가, 병이 고쳐졌는가?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가 등에만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때문에 좋았다가 슬펐다가 기뻤다가 낙심했다가 합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은 온통 우리 육신의 경험과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정말 반응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그 점을 주목해 보아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고 큰 복은 못 받았다고 하시는 분들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세상 성공하는 복이 다 복이지만 죄사함의 복보다 더 귀한 복은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은 복은 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조차도 죄사함 받은 복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결국은 다 드러나게 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죄가 있는 법입니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되는 자기만의 은밀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젠가는 다 드러날 때가 온다면 아마 밥맛도 없고 잠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천국에 가 서보면 죄가 가리워지고, 씻김받은 복이 가장 큰 복임을 알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다른 어떤 복도 다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씻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다시는 기억지도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지은 죄가 없어질 수가 있습니까? 정말 우리 안에 일어난 놀라운 기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생명, 내 주님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하셨을 때의 원형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때문 입니다. 이것에 반응해야 합니다.
눈 뜬 것은 큰 기적이고 영생얻은 것은 작은 것입니까? 육신의 눈만 뜬 것도 이렇게 큰 힘이 된다면 영생을 얻은 것은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영적인 눈이 뜨여 우리에게 임한 놀라운 구원의 사건들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려고 분주히 역사하고 있습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마귀는 우리 마음과 생각을 혼란스럽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생명, 능력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우리 마음 속에 온갖 거짓말과 미혹으로 가득 채우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으신 놀라운 은혜, 우리에게 더 이상의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족하게 느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풍성함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우리는 항상 허전하고 세상 사는 것이 답답합니다. 따분합니다. 마귀가 우리 마음을 혼미하게 해서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육신에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에만 반응하면 은혜의 바다 한 가운데 살아도 영적으로 메마를 수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2007.08.24 신문에 ’빈자의 성녀’ 테레사 수녀가 실제로는 ’하나님의 존재 조차 믿지 못하고 심각한 신앙의 회의에 빠졌던 사람“이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성인 추대를 위한 자료를 조사했던 신부가 쓴 책에 실린 테레사 수녀의 서한의 내용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지난 1979년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 평화상 시상식장에서 “예수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빈자들 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 받는 미소 안에도 있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가 자신의 정신적 동지인 마이클반데어피트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는 이 연설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내용이 적혀 있다.
“주께서 제 안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둠, 냉담, 공허의 현실이 너무도 커서 제 영혼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기도를 할 때) 혀는 움직이지만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주께서 계신다면 부디 용서해 주소서.’
“저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까? 만약 주께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영혼이 없다면, 예수님이시여, 당신도 진실이 아닐 것입니다.”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러한 번뇌로 한동안 기도를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가 죽기 전까지 50년 가까운 세월 내내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때는 천국은 물론 신의 존재까지도 의심하게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에서는 이러한 끊임없는 신앙적 고민과 의문이 오히려 큰 업적을 이루게 만든 발판이 됐다고 평가하고 올해 안에 테레사 수녀를 성인으로 추대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과연 어떨까요? 한평생 위대한 신앙의 삶을 산 것 같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밝혀지기는 실제로 ‘하나님의 존재’도 의심했고, “내게는… 그리스도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내 영혼은 지옥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천국도 확신못한다” 고 타임誌 ‘커버스토리’에 실린 다면 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테레사수녀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실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자애롭고 따뜻한 미소는 많은 이에게 감동을 전했지만 정작 자신은 “웃음은 모든 것을 감추려는 가면”이라고 표현했고 또 선교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리켜 “위선”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놀라운 사랑의 사역, 전세계가 놀라고 노벨상까지 받고 인도의 국장으로 치러질 일,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 한 가운데서도 그는 영적으로 답답해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테레사 수녀는 은혜의 바다 한복판에서 오히려 영적으로 메마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처음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때는 그 놀라움을 느끼지만 그것이 계속 될 때는 우리는 곧 육신과 세상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하여 영적으로 눈 뜨게 하시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인 이어령씨가 최근 세례를 받았습니다. 취재하던 기자가 한국 교회가 뭇매를 맞고 있는 것 같은 때에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기에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이어령교수가 이야기를 하나 하였습니다. “아기 물고기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바다가 어떻게 생겼어요? 엄마가 대답하길 ‘글쎄, 그런 게 있다고 듣긴 했다만, 나도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바다 속에 살면서 바다를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 인간의 삶입니다. 인간을 넙치, 참치, 날치형으로 나눠보자. 넙치형 인간은 바닥에 납작 깔려 살면서 물 흐름을 타고 움직인다. 참치는 가만 있으면 가라앉는다. 그러므로 하루 종일 퍼득퍼득 헤엄쳐야 산다. 그런데 날치라는 생선은 바다 바깥으로 튀어오른다. 힘껏 날아오르면서 바다 속 물고기가 바다 풍경을 본다. 우리 인간에게도 수면을 박차고 오르면서 다른 세계로 나가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성도 여러분, 오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려고 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속에 삽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기적은 체험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삽니다. 오늘 성령님께서 다시한번 우리를 튀어오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바리새인들은 눈을 못보는 자가 눈을 뜨는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했고,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적이 일어났는데도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육신에만 반응하는 자이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 매우 답답할 때, 오히려 엄청난 영적 회심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남자 분이 결혼했지만 철저히 자기 중심인 사람이라 남편(男便)으로서 아버지로서 빵점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와 보니 아내가 엎드려 자고 있었습니다. 엎드린 채 자고 있는 아내 앞에 노트 한 권이 있었습니다. 일기장이었습니다. 아내의 속 마음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그는 조심스럽게 그 노트를 들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수유리 너머로 갔다. 시골 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약을 먹고 죽을까... 아니면 손목을 그어 죽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취할 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되돌아왔다.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위해 내게 주신 남편이므로 나는 남편을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하라 명하시므로 나는 남편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주님! 도와 주세요. 나의 약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쟎아요."
  아내의 글을 읽은 손은 떨렸고 심장은 멎는 것 같았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고 귀에서는 큰 북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도저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어 서재로 들어가 소리를 죽여가며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아내는 천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 아내가 나 하나만 믿고 살다가 나로 인해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내가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자신의 슬픔을 감추고 나를 웃음으로 대해줄 때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진실함으로 아내를 대한 적이 있었던가?
  아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환락의 현장에서 나의 쾌락만을 좇아 살아왔던 한심한 남편이 아닌가? 그럼에도 나는 이상적인 배우자, 멋진 남편, 괜챦은 남자, 능력있는 청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라고 착각하며 스스로 자기 도취에 빠져 그동안 살아왔으니..."
  조금 전에는 이런 자신이 밉고 부끄러워 한동안 울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못난 남편을 위해 살아준 아내가 불쌍해서 울기 시작했다. 남편 같지 않는 못난 남편 탓에... 아내는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며 울었을까? 내려 누르는 절망 속에 얼마나 몸서리를 쳤을까?... 한동안 울다가.. 마음을 추스리고 이제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교회 다녔고 기도도 할 줄 알았지만 그동안의 기도는 다 이기적인 기도! 나 자신의 욕망만 채우려는 기도였었는데.. 이 순간!! 기도다운 기도가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눈물 콧물 쏟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나는 너를 단 한번도 버린 적이 없단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그때 주님을 새롭게 만났다. 살아계신 주님을 보는 눈이 떠지고 주의 음성듣는 귀도 열렸다. 그 분이 이재철목사입니다.
  우리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변화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지난 금요기도회 때, 여름 성경 캠프를 마치고 한 어린이가 간증을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배성준입니다.
저는 그동안 항상 죄를 지었지만 깨닫지 못하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캠프를 하기 전에도 교회를 빠지지 않고 다녔고 어린이국 리더를 하고 있었지만 죄를 지어도 깨달음이 없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를 때리기도 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도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름 성경캠프를 통해 예수님은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제 죄를 분명히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평소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성경 이야기가 계속 생각났고, 주님의 사랑이 느껴져 눈물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죄 짓는 배성준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바꿔 주셨습니다.
  사단은 저의 마음을 계속 흐트러지게 하려고 했지만 저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고 이제 더 이상 저는 예전의 제가 아니었습니다.
  찬양을 할 때도 예전에는 창피해서 율동도 하지 않고 노래도 부르지 않았는데 이제는 제가 찬양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럽습니다. 전도도 열심히 하고 걸을 때나 공부할 때나 놀 때도 기도를 합니다. 앞으로도 주님의 종으로 진실하게 살겠습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이 어린이의 변화가 기적이 아닙니까? 어린 아이지만 무엇으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 더 큰 기적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안에 일어난 엄청나고 놀라운 변화를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을 버리고 모세를 통하여 새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제안하였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구하였습니다.
(출 33: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모세에게 사실 필요했던 것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광야에서 수백 만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려면 얼마나 필요한 것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오직 하나만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함을 안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4잘 6-7절에서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다 볼 수는 없고 하나님이 영광 중에 지나가실 때 하나님의 등을 보았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세처럼 하나님의 등을 본 정도입니까?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엄청난 기적입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것을 너희가 알리라”

여러분, 우리의 체험이 모세의 체험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등만 보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삽니다!
아직도 예수를 믿었지만 기적은 체험하지 못하였다고 낙심하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고 엄청난 기적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들이 내 안에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영적 실상을 알고 나면 감정과 생각이 달라집니다.

죄는 더 이상 유혹이 되지도 않습니다. 누가 바보같이 죄를 짓고 살겠습니까? 가장 어리석은 행위처럼 보입니다.
의로운 삶은 더 이상 손해나 바보같은 일이 아닙니다. 가장 자랑스런 일입니다.
복음과 의를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다면 얼마든지 감수하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더 이상 조금도 망설임없이 “예”하고 크게 대답할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영생을 가진 성도 여러분, 살기가 답답하고 세상이 두렵습니까?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인생에 일어난 기적을 내가 바라본다면 우리는 세상 앞에서 당당한 자가 됩니다. 필요한 것은 성령과 말씀으로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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