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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꿈이 산산히 부서져 버릴 때 (합 3:1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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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산산히 부서져 버릴 때 (합 3:16 -19)

(합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사람의 운명을 알려면 세 가지를 살펴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 사람의 과거 삶이 어떠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사람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현재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살아온 경험이 앞으로 살 삶의 기준이 됩니다.

둘째, 그가 지금 현재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바꿀 수는 없지만, 현재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미래의 삶에 대해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미래를 짐작하기 위한 세 번째 정보는 그 사람의 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에 필요한 것들을 선택하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과거의 상처나 현재의 환경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며 때로는 넘어야 할 장애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이미 가야 할 방향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산을 낭비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무엇 때문에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별로 갈등하거나 방황하지 않으식 일관된 삶을 사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꿈이 분명한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꿈을 붙잡고 달려가는 인생은 행복합니다. 꿈을 확신하고 기도하는 인생은 반드시 꿈을 성취하는 성공적인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들의 꿈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꿈과 하나님의 꿈이 다를 때 꿈이 어떻게 될까요?

  하박국은 주전 610년 경에 활동한 선지자 입니다.  주전 609년에 유다에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무너져가는 나라 유다왕국을 개혁한 훌륭한 왕 요시야가 죽는 사건입니다. 요시야는 종교 개혁과 사회 개혁을 성공적으로 전개한 경건하고 현명한 왕이었습니다. 요시야왕이 죽고나자 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도덕적인 부패와 종교적인 타락이 만연하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어두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때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하나님앞에 엎드려 부르짖는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그가 바로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의 기도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주의 일을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2) 입니다. 그는 유다의 부흥을 꿈꾸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꿈입니까? 자신의 입신양명이 아닌 조국의 부흥을 위하여 큰 꿈을 꾸며 나아가는 하박국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우러러보며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보여주신 나라의 운명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은 부흥이 아니라 심판이었습니다. 회복이 아니라 철저한 징계였습니다. 유다나라가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하여 망하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전 국토가 황무지가 되고 백성들 대부분이 먼 나라로 포로로 끌려가 노예가 되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혀 의외의 응답에 하박국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하박국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으면 오늘 본문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 3:16)

  얼마나 아프면 창자가 흔들릴까요? 얼마나 두려우면 입술이 떨리고 몸이 떨릴까요? 얼마나 좌절했으면 자신의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다고 표현할까요? 하박국의 마음은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상심했으며, 그의 상황은 호전될 수 없을 만큼 비참했습니다. 하박국이 처해 있는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하박국의 비참한 감정이 느껴지십니까? 그런데 놀라운 고백이 연출됩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16절의 다음 구절인 17절과 18절을 다함께 읽어봅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7~18)

  이방인들의 침략과 더불어 유다의 수중에는 나라를 지탱할 만한 소유가 전혀 없습니다. 포도원에도 무화과 농장에도 적군이 돌을 던지고 불을 질러 다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소출을 하나도 거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양과 소도 적들이 다 잡아 먹고 끌고 가서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하박국의 절망이 느껴집니까?
  큰 부흥을 꿈구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하박국의 꿈에 관심이 없어보입니다. 전혀 다른 것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즐거워하며 기뻐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무엇때문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 때문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그는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하박국의 꿈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지금 나를 향해 너는 내 꿈이다! 라고 외치시는 우리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박국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계속해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9상)
  하박국은 더 이상 무화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포도열매에 노심초사하지 않습니다. 양이나 소때문에 삶을 이리저리 흔들지 않습니다. 하박국의 삶에 힘이 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만이 하박국으로 하여금 더 높은곳, 더 높은 꿈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여정 중에 많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꿈을 이루는 삶을 위하여 많은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꿈이 이루어기도 하지만 언제나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달려갔지만 때로 실패하고 꿈이 산산 조각 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여겼던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우리의 삶은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꿈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세상이 말하는 꿈인 작은 게임들에서 패배를 맛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온 인류의 창조주이자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넌 내 꿈이야. 넌 승리했단다' 라고 말씀해 주신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기쁨의 대상이 있습니까?  아무리 화가나고 슬퍼하다가도 그분만 보면 기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경제 문제와 가정문제로 번민한다 하여도 그 분만 보면 신이나고 힘이 솟을 만큼 기뻐할 수 있는 대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돈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은 권력이, 명예가, 외모가, 실력이, 출세한 자식이, 돈 많은 자신의 부모가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습니까?
  17절 18절을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겠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이 처한 상황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만한 환경입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할 만한 조건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소리로 인하여 창자가 흔들렸고 내 입술이 떨렸다고 했습니다.  나의 뼈가 속에서부터 썩어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나의 다리가 후들거린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난 날이 닥쳐들어오는 때입니다.  적들이 와서 사람을 사로 잡아갈 것입니다.  왕은 멸시를 당하고, 방백은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성읍들은 빼앗길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폴틸리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죽음과 자기 숙명성, 허무와 무의미성, 죄책감에 대한 불안"이라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아름다운 미모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에드는 아파트도 없습니다.  자식들을 편안히 마음놓고 공부시킬 수 있는  공부방 하나도 없습니다.  걱정하지 않고 풍요롭게 쓸 수 있는 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장래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 정도입니까?  이 정도보다 훨씬 심한 것입니다.  전쟁이 발발하여 포로로 가족들이 잡혀가고, 먹을 것을 약탈당하여 먹고 살 음식마저 없는 상태입니다.  소말리아 사람들처럼 굶어 죽어 가는 가족들을 보면서도 속수 무책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어떤 취급을 당하겠습니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개의치 않고 기뻐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비록 나에게 건강도, 물질도, 아파트도, 실력도, 다른 사람의 호감을 받을 만한 미모도, 그럴듯한 인격도, 출세할 만한 장래성도, 그리고 오늘 먹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오직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고백, 참으로 위대한 고백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과 미모를 아름답게 가꿈으로써 기쁨의 근원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기쁨을 찾는 것은 잠깐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며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대 작곡가인 하이든에게 한 사람이 "당신의 미사곡은 어떻게 그렇듯 즐거운 감을 줍니까?"라고 묻자, 하이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운 기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이든처럼 하박국처럼 하나님 한분만을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걸작이 수없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우리도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 즉 원하는 곳에 다니시게 하시는 분이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호와로 기쁨을 삼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이 땅에 살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이 땅의 낮고 비천한 삶에 파묻히지 않고 높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높고 고귀한 삶을 살아갑니다. 

  올리브 나무와 떡갈 나무, 소나무가 나란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각자 특별한 존재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정교하고 화려한 보석 상자가 되어 그 안에 온갖 보물을 담는 꿈을 꾸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꾼이 숲의 수많은 나무 중에서 그 올리브 나무를 선택하여 베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아름다운 보석상자가 될 기대에 부풀었지만, 더럽고 냄새나는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가 되었습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꿈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자신은 가치가 없고 천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떡갈나무도 위대한 왕을 싣고 바다를 건널 거대한 배의 일부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무꾼이 자신을 베었을 때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무꾼이 자신으로 조그만 낚싯배를 만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떡갈나무는 슬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높은 산의 꼭대기에 사는 소나무의 유일한 꿈은 언제까지나 높은 곳에 버티고 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섭리를 일깨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번개가 치더니 소나무를 쓰러뜨리면서 그 꿈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나무꾼이 쓰러진 소나무를 가져다가 쓰레기더미에 던져 버렸습니다.
  세 나무는 모두 자신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생각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세 나무의 꿈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마리아와 요셉이 아이를 낳을 곳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마구간을 발견했고, 아기 예수가 태어나자 구유에 누였습니다. 이 구유는 바로 그 올리브 나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귀중한 보석을 담고 싶었으나 하나님은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인 하나님의 아들을 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크고 멋진 배가 아닌, 작고 초라한 낚싯배를 선택하셨습니다. 이 낚싯배는 그 떡갈나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떡갈나무는 위대한 왕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고 싶었으나 하나님은 더 좋은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이제 떡갈나무는 만왕의 왕을 태우게 되었습니다.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몇몇 로마 병사들이 그 소나무가 버려진 쓰레기더미에서 뭔가를 부지런히 찾고 있었습니다. 이에 소나무는 땔감 신세가 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병사들은 소나무를 작은 두 조각으로 쪼개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소나무에 예수님이 매달리시게 되었습니다. 이 소나무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꿈이 산산히 부서져 버릴 때에라도 하나님의 더 크고 아름다운 꿈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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