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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의 등대 (롬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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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등대 (롬 5:1∼5)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뉴잉글랜드 동부 연안의 한 작은 어항에 그 동네 남자들이 고기잡이로 모두 떠났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갑자기 큰 폭풍우가 다가오더니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거센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때 돌아와야 될 어부들이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어촌 아낙네들은 모래사장에 모여서 통곡을 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마을 남자들이 돌아오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한 밤중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도 없고 폭풍우는 점점 거세지기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동네에 불까지 났습니다. 동네에 장정들이 없으니까 불은 삽시간에 이 집에서 저 집으로 화염이 충천하여 온 천지가 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아낙네들은 또 땅을 치고 울며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버리십니까? 폭풍우로 인해 남자들이 다 바다에서 죽고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 할 터전인 집들마저 불에 타 버렸으니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하며 밤새도록 통곡을 했습니다. 아침이 다가올 때쯤 폭풍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기 잡으러 나갔던 남자들이 배를 타고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항구에서 뛰어 내려 자신들을 눈물로 기다리던 부인들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었다”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폭풍우를 만나 천지가 어두워서 갈길을 잃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할 때 그들은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습니다. 날은 어둡고 방향을 잃었으니 이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갈길을 보여 주옵소서” 그렇게 부르짖는데 마침 해안에서 불기둥 같은 충천한 광채가 나타난 것입니다. 마침 그 시각, 동네에 불이 난 것입니다. 그 불길을 바라보고 방향을 잡고 결사적으로 항해를 계속해서 그들은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동네가 불탄 것이 엄청난 손실인줄 알고 절망과 좌절에 빠졌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동네에 불이 나게 하셔서 불기둥을 통해서 소망의 등대를 삼아 난파한 어선들이 돌아올 수 있게 비춰준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이 마음속에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소망의 등대를 가리는 비바람, 안개구름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1. 소망을 가리는 비바람과 안개구름

그러면 소망을 가리는 비바람과 안개구름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미움이 우리의 소망을 가리는 안개구름입니다. 마음에 미움이 들어오면 격랑이 일고 이성을 잃고 절망의 물보라가 마음을 때립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고 요한일서 2장 1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워하면 마음에 어두움이 들어오고 눈이 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방울뱀이 궁지에 몰려 마음속에 미움이 들어차면 자기 몸을 물어뜯습니다. 미워하면 상대방에게 고통을 가하기 전에 자기의 마음을 물어뜯게 되고 자기의 삶을 물어뜯게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상대보다도 자기에게 큰 손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 속에는 분노의 바람이 소망을 없애 버립니다. 분노는 파괴적이고 종말적인 감정입니다. 잠언서 15장 18절에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분을 내면 파괴적이고, 종말적인 감정이 일어나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전쟁에 패한 근본 이유는 그의 분노 때문입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머리가 명석하고 관찰력이 깊고 예리한 판단력과 비상한 통치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얼마나 화를 잘 내던지 자기의 비위를 조금만 상하게 해도 미움과 분노가 충천하므로 부하들은 제대로 보고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진영과 힘겨운 전쟁을 하면서도 일시적인 분노로 말미암아 주력부대를 빼돌려 소련을 침공했는데 바로 그것이 그의 일생일대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을 감행하였을 때 소련 쪽으로 향하던 기갑사단만 그쪽으로 돌리면 상륙을 저지할 수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의 부관은 낮잠자는 히틀러를 겁내 깨우지 못했습니다. 깨웠다가는 벼락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히틀러는 항상 사소한 일에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히틀러가 한참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완전히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한 뒤였고 이로 인해 독일이 패망하게 된 것입니다. 히틀러의 분노가 결국 독일제국을 패망에 이르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불안과 공포도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불안과 공포가 일어나면 삶의 활력을 빼앗기고 암담하게 됩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공포에 눌리는데 무슨 활력이 생깁니까? 그저 암담할 따름인 것입니다.

성경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암을 두려워하면 암이 형벌로 오고, 가난을 두려워하면 가난이 형벌로 오고, 전쟁을 두려워하면 전쟁이 형벌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슬픔도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슬픔은 여름 장맛비처럼 가슴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슬픔이 마음에 가득하면 삶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희망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전도서 2장 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슬픔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겉으로는 웃지만 가슴 속에는 슬픔이 빗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슬픔은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또한 우리가 고난 당하면 마음을 꺾이고 좌절하지 않습니까? 이 좌절은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고난을 당해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갖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생애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요,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바하는 열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결혼한 지 13년만에 죽었고 다시 재혼했습니다. 자녀 한명은 정신박약자였습니다. 그는 노년에 앞을 보지 못해 눈이 어두워졌고 또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작곡을 했습니다. 그의 수많은 작품은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로서 불후의 명작이 되었습니다. 그가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는 항상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글자를 적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간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희망과 놀라운 영감으로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좌절은 희망을 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좌절 속에 하나님을 바라고 희망의 불길을 태우면 그 좌절이 오히려 위대하고 상상할 수 없이 깊이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죄악의 파도가 오고 세속의 홍수가 넘쳐나며 질병과 생활고가 다가오면 소망은 어두워지게 됩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로 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속에서 죄악과 세속의 홍수와 질병과 생활고로 인해 발버둥칩니다. 또한 세상에서 무엇을 얻었다 하더라도 모두 물거품에 불과합니다. 안개와 구름같이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불안한 정치, 국제 정세, 사회적인 갈등 등이 삶의 소망을 어둡게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테러가 일어나고, 종교적인 갈등이 있고,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환경의 파괴 등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소망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주한 외국인의 63.3%가 한국 정부가 부패했다고 답한 통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신문을 펼쳐보면 유괴, 납치, 살인, 폭행 등 사회 전반에 불안심리가 꽉 들어차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소망을 어둡게 만듭니다. 우리의 마음을 절망의 안개구름으로 덮어 놓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였던 헤밍웨이는 20세기 대표적인 작가중의 하나로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 평생동안 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어 그를 믿음으로 키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성장한 후 신앙에서 벗어나 급기야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살다가 자신의 삶을 자살로 마감했습니다. 그는 ‘무기여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같은 불후의 명작을 썼으며 ‘노인과 바다’로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명예와 인기를 얻었지만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았습니다. 세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아프리카 여행 중 두 번이나 비행기 추락사고로 부상당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재치 있고 쾌활한 반면 성미가 급하고 호탕하고 이기적이고 개방적이고 쾌락적이며 술을 많이 마시고 사생활이 복잡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항상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원에서 전기 쇼크 치료를 두 번이나 받았지만 결국 1961년 엽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생의 마지막 무렵에 남긴 글을 보면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으려 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움의 공허함 속에 살고 있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빈 전구처럼 공허하다’고 남겨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귀 영화 공명 쾌락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마음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부귀 영화 공명 쾌락은 바닷물과 같습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출렁이는 바닷물을 마시면 시원할 것 같지만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소금기가 목에 붙어 더 목이 타서 나중에는 죽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의 갈증을 채워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한 사람들은 마음의 허무와 무의미를 채울 수 없어 결국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자살로 마감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과연 내게 관심이 있으신가?

우리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 과연 나에게 관심이 계신가요? 나는 이렇게 삶이 절망적인데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내게 관심이 있으습니까?’라고 외칩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9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은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잡힌 그는 원형 운동장에 끌려가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생사를 건 짐승과의 격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또 에베소에서 일어난 폭동에 휘말려 목숨이 위태로운 중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습니다. 여러 번 파선을 경험하고 중병에 걸리고 육체의 가시 등으로 극도의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지내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건하고 신령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하고 신령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고난은 다가옵니다. 다만 고난 중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고난을 밥으로 삼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고난에 짓밟혀서 파멸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큰 복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의 인생노정을 보면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75세에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고향 산천을 떠나 아내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 가나안에 왔으나 처참한 기근을 만났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아내와 조카 롯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애굽의 바로왕에게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기는 수치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고난의 연속 아닙니까? 기근을 만나고 아내마저 빼앗겼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이며 복 주고 복 주며 번창케 하리라고 약속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애굽을 빠져 나왔습니다. 바로를 통해서 많은 보물과 짐승과 노비를 받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터전을 잡고 살기 시작하는데 골육상쟁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짐승 떼가 많아지고 조카의 짐승 떼가 많아지니까 목초지와 우물을 놓고 다툼이 잦아진 것입니다. 골육상쟁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주위의 수많은 사람 앞에서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싸운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조카를 불렀습니다. “조카야! 우리는 골육인데 서로 이렇게 싸우면 되겠니?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나쁜 인상을 주겠니? 이제 우리가 헤어질 때가 됐구나. 네가 동이라 하면 내가 서로 하고 네가 앞으로 나가면 내가 뒤로 나갈 테니까 먼저 정해라” 아브라함은 아마 ‘내가 그래도 삼촌인데, 아이고 삼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삼촌이 먼저 택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택하지요’라는 대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게 인생의 도리 아닙니까? 그런데 조카는 고개를 들더니 “예, 제가 먼저 택하지요. 저 요단 뜰이 물도 많고 목초지도 좋으니 저리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조카는 무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약속한대로 아브라함은 조카가 먼저 택하고 남은 곳으로 갔습니다. 풀도 많지 않고 물도 없는 그러한 황막한 사막과 같은 곳에 남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이 있으므로 그 가운데서도 번창하고 잘 되었습니다. 그러면 조카 롯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시적으로는 번창하고 부자가 된 듯 보였으나 외국의 침략을 받아서 재산을 다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갔다가 아브라함에 의해서 겨우 구출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사위들이 다 죽고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딸과 함께 도망을 쳐서 집도 없이 산에 토굴을 파고 들어가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무례하게 행하는 사람은 끝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해를 보더라도 공의롭게 사는 사람은 끝이 좋습니다. 조카 롯은 토굴로 들어갔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승승장구하고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85세때 그는 아들이 없어서 그 아내 사라의 권고를 통해서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 가정에 큰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사라와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 사이의 싸움으로 아브라함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어쫓는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단코 그는 개인 생활이 평탄치 않았습니다. 나중에 1백세가 되어 사라를 통해 아들 이삭을 낳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모리아산에 재물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각을 떠서 장작불로 태워서 재물로 드리라고 하니 여러분 같으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갈갈이 찢어지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아들을 데리고 사흘길을 가서 모리아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장작불을 피워 놓고 아들을 잡으려고 칼을 들었을 때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칼을 대지 말아라. 네가 이렇게 내게 순종하였으므로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번창케하고 번창케 하리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바로 그 촌부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온 한 민족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라갈 때 모든 일이 평탄하고 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춘하추동과 같고 변화무쌍한 날씨와과 같습니다. 봄이 왔는가 하면 여름이 되고, 여름을 붙잡아 놓고자 해도 가을이 오고, 가을에 매달리고 있어도 또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립니다. 어떻게 똑같은 것을 사람이 취할 수 있습니까? 하루에도 날씨는 몇번씩 변합니다. 아침에 날이 맑더니 낮에는 구름이 끼고 오후에는 소나기가 쏟아지고 우울합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기상을 어떻게 합니까? 우리들은 살아갈 동안에 운명을 좌우할 수 없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희노애락과 시련과 고통과 괴로움과 즐거움을 내가 어떻게 좌우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마치 춘하추동과 같고 기상의 변화 같아 우리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했으며 잠언 27장 1절에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로 25절에도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우리가 의지할 수 없습니다. 변화무쌍한 환경을 바라보고 웃고, 울고, 발버둥치면 나중에 파탄에 이르고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운명과 환경은 내가 변화시킬 수 없지만 그 가운데 내 마음의 자세와 태도는 내가 붙잡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붙잡을까요? 내 마음은 나도 못 붙잡습니다. 내 마음을 붙잡을 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의지하는 길밖에는 소망의 처소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 북방 국경 근처에 한 노인이 살았습니다. 하루는 노인이 기르는 말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와서 위로하고 동정하자 노인은 “이것이 또 무슨 복이 될지 누가 아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몇 달 후 뜻밖에도 도망간 암말이 오랑캐족의 좋은 숫말 한필을 데리고 돌아오자 사람들이 와서 축하를 했습니다. 노인은 그 축하를 듣고 “그것이 또 무슨 화가 될지 누가 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아들이 좋은 말이 생기자 타고 달리다가 그만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장애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위로하자 노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또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혹시 복이 될지 누가 아오?” 1년 후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이 마을 장정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서 전쟁에는 이겼지만 거의 전사했습니다. 노인의 아들만 다리를 다쳐서 무사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 아들이 다쳐 전쟁터에 나가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까 “또 장차 어떻게 될지 누가 아오?” 라고 대답했답니다. 이 이야기를 새옹지마라고 합니다.

전도서 7장 14절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형통한 날도 다가옵니다. 곤고한 날도 다가온다, 항상 형통하지 않고 항상 곤고하지 않고, 날이 맑았는가 하면 먹장 구름이 끼고, 비 오는 날이요 캄캄한 밤인가 하면 아침도 다가오고, 험한 길인가 하면 평탄한 길도 다가오고, 인생이란 형통과 곤고가 서로 섞여서 다가오니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전도서 3장 1절로 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이렇게 인생은 긍정과 부정, 축복과 고난,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서 다가옵니다. 우리는 마음에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끝까지 꿈과 소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환경에 따라서 울고 웃으면 끝이 없는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3. 소망의 등대를 늘 바라보라

환경과 운명의 변화에 따라 울고 웃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되면 우리는 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탄 호화로운 요트가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한 해안을 향해서 캄캄한 밤에 돌아오는데 저 앞에 환한 불빛이 비췄습니다. 그래서 여왕이 탄 요트의 선장이 말했습니다. “그 앞에 누구냐? 불을 켜고 오는 배는 항로를 비켜라” 그러니까 그 쪽에서 대답이 왔습니다. “우리는 항로를 비킬 수 없으니 너희가 비켜라” 여왕을 태운 요트의 선장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놈아! 무슨 말을 하는거냐? 우리 배는 영국 여왕이 탄 요트다. 대영제국 여왕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항로를 비켜라” 그런데 그 불빛에서 답이 왔습니다. “우리는 수 백년 전부터 이 자리에 서 있는 영국의 해안등대다. 여왕이 탄 요트라도 우리를 향해서 들어와서 부딪히면 산산조각이 난다” 그러자 선장이 얼른 요트를 돌려 항로를 바꿨습니다. 등대의 잃어 버리면 어떤 배도 침몰합니다. 등대의 빛을 보고 나가야지 등대를 보고 비키라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크 박사는 그가 쓴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라는 책에서 6백만 유대인이 포로 수용소에서 죽어갈 때 독일의 죄악상과 유대인 생존자를 연구한 결과 ‘마음에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심신이 최악이다.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살아 남았다. 나아가 절망하는 동료들에게 소망을 갖도록 격려하던 사람은 모진 고문에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여 생존해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소망을 잃으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도 그 마음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아무리 환경이 고통스럽고 괴롭고 슬퍼도 살아 남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절은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등대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등대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몸 찢고 피 흘려 매달리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 셔서 나와 같은 인생, 고난, 역경을 다 겪었습니다. 배고프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집 없이 떠다니기도 하고, 풍찬노숙을 하고, 칭찬도 받았는가 하면 욕도 듣고, 사랑도 받고 미움도 받으셨습니다. 그런 모든 인생고를 겪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기고 피 흘려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의 등대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찢기고 좌절되고 피곤하고 절망에 처하고 누더기 같은 인생이 되어도 우리 소망의 등대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예수님 안에서 용서와 의와 영광의 빛이 비춰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놀라운 은총의 등대불이 비춰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치료와 건강의 등대불이 비춰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형통과 축복의 등대불이 비춰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소망의 등불이 비춰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캄캄한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는 찬란한 소망의 등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당한다 해도 환경에 배반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분다 할지라도, 소망의 등대를 우리가 힘차게 바라볼 때 그곳에 매달려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 예수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소망의 빛을 비춰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얻어진 새로운 신분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그 주권으로 나를 택하여 주신 택하신 족속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소망과 영광의 가슴을 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9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망의 등대를 가슴에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에 회의를 느끼고 버림받은 심정, 고독감, 좌절감, 절망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눈물이 그 가슴을 적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오늘까지 인생을 살아온 모든 사람들은 이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 영화, 공명이 크면 클수록 마음에 갈증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가 항상 바라보아야 될 것은 우리의 소망의 등대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소망의 등불로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셔서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위로를 주십니다. 이로인해 우리는 울면서 웃을 수 있고 넘어지면서 일어날 수 있고 상처 입으면서 치료 받을 수 있고 패배를 극복하여 천국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 기 도 -

사랑이 많고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이 세상엔 소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마음 속에 상처를 입고 가슴에 슬픔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고통당하고, 탄식하고, 외로움 당하고, 배반 당하고,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붙잡아 주시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함께 삶을 나눌 자가 이 우주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 예수님의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고 그 불빛을 마음에 받아서 어두운 가운데서 빛을 찾아 나가는 인생들이 되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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