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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 : 절제 (갈 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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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절제(갈라디아서 5:22~23)
 
  미국에는 전세계적인 체인망을 가지고 있는 3개의 대형 피자체인이 있습니다. 시장 점유율 22.2퍼센트로 1위를 달리고 있는 '피자 헛'이 있고 11.7퍼센트의 '도미노피자', 8.4퍼센트의 '리틀 시저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혜성같이 나타난 피자업체가 하나 있습니다. 조만간 기존의 모든 질서를 무너뜨리고, 궁극적으로 피자업계를 완전 평정할 것 같아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파파 존스'라는 피자업체입니다. 파파 존스는 36세의 젊은 슈내터가 창업하여, 매년 두 배의 시장점유율 증가를 보이고 있는 무서운 피자 체인입니다. 파파 존스의 신장과 도전은 모든 선발주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머리털을 세우게 만드는' 무서운 도전입니다.

  그러면 후발주자인 슈내터의 파파 존스가 이렇게 강력한 도전을 주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음식을 고르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맛'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케팅 기법이 발전하다보니까, 본질적인 요소 이외의 것들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피자 헛'은 맛보다는 피자의 '다양성'을, '도미노 피자'는 '빠른 배달'을, '리틀 시저스'는 '싼 값'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맛을 파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팔고, 음식의 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파는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나 음식의 근본은 '맛과 음식의 질'에 있는 것입니다. 파파 존스는 부수적인 것에 식상해 있는 소비자들에게 근본을 강조하는 본질의 승부를 벌였고, 그리고 이것이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파파 존스는 최상의 맛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영양가 많은 피자라는 광고를 했습니다. 그들의 캐치프레이즈는 '최고의 재료, 최고의 피자'였습니다. 결국 최후의 승리는 본질에서 강력함을 나타내는 진검승부의 승자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진검승부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성령충만이고 그리고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성도의 맛은 역시 성령충만이고 성도의 멋은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을 한번 따라해 봅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이 말씀에서 주님이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이유를 분명히 밝히시고 있는데 "우리로 항상 열매를 맺고 열매가 항상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항상 열매를 맺는 삶,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열매 맺기 위한 성령의 열매 그 아홉번째 시간 절제의 열매를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인 에덴동산을 주셨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모든 좋은 것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의 복을 지키는 한 가지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절제의 계명"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좋은 것은 다 먹으라.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먹지 말라" 창세기에 나타난 최초의 행복원칙, 에덴의 계명은 절제의 계명이었습니다. 절제는 에덴의 행복을 지키는 유일한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에덴의 행복을 지키는 절제의 계명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지킬 자격이 있느냐 하는 절제의 시험을 치루며 살아야 합니다. 절제하면 행복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새해 벽두에 파산한 사람과 크게 성공한 기업가가 함께 기자회견을 하게 됐습니다.
  먼저 파산한 사람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실패 요인이 무엇이었나요?"
"낭비였습니다. 사업이 한창 잘될 때 돈을 종이처럼 썼죠." 

  이번엔 성공한 재벌에게 물었습니다.
"기업이 일어선 요인이 무엇입니까?" "절제였습니다. 사업이 한창 잘될 때 종이를 금처럼 썼죠."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공과 실패 사이에는 절제란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절제가 무엇입니까?
  절제란 헬라어로 "엥크라테이아"라고 하는데 우리말 모든 성경은 이것을 "절제"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temperance(KJV)라고 합니다. 영어성경(NIV) self-control이라고 해서 자기통제라고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알맞게 잘 조절한다"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을 억제하고 다스리며 지배하는 자제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알맞게 조절하여 방종하지 않도록 통제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말씀은 "자기통제"(self-control)를 버리고 "성령통제"(spirit-control)로 나아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우리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self-control)대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 하나님께서 통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통제를 "절제"(temperance)라고 합니다.

  절제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가장 나중인 9번째 열매입니다. 왜 절제의 열매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맨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절제의 열매를 마지막에 쓴 것은 아마도 이 덕목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절제의 훈련 없이는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모든 인격적인 열매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대 그리스 운동 경기자들은 경기에 앞서 10개월 가량 고된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음식 오락 수면 등 모든 일에 있어 자기를 절제해야 했습니다. 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통제하는 일은 성을 점령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뜻입니다. 절제는 최고의 열매인 것입니다. 절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절제는 다른 열매들을 담는 바구니와 같습니다. 아무리 많은 성령의 열매가 맺혀도 담을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또 그릇이 있어 설혹 담았다 하더라도 그릇이 깨어지면 다 쏟아지게 됩니다. 절제가 없다면 모든 열매가 쏟아 질 수밖에 없습니다. 절제가 있어야만 다른 열매도 잘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제 없는 사랑, 절제없는 기쁨, 절제되지 않는 평화, 절제되지 않는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이 모든 것들은 다 덕이 되지 못합니다. 절제가 될 때 아름다운 열매가 되고 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열매를 소중히 지킬 줄 아는 성품이 바로 절제입니다.

  말라버린 샘물

  한 사막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우거진 야자수 사이로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오아시스라고 하지요. 노인은 그곳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퍼주며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그네들은 물을 얻어먹고 노인에게 몇푼의 동전을 건네주기 시작했습니다. 노인은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금고에 동전이 쌓여가면서 욕심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노인은 이제 돈을 모으는 것에 몰입했습니다. 그리고 샘물을 철저하게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나그네에게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노인은 생각했습니다. 샘물이 더 많이 솟아나면 돈을 더 벌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잎이 무성한 야자수가 샘물을 흡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야자수를 몽땅 잘라버렸습니다. 그런데 야자수가 잘린 후부터 점점 샘물은 줄어들었고 결국 샘물은 말라버렸습니다. 야자수가 만들어낸 그늘도 없어졌습니다. 이제 아무도 노인의 오두막집을 찾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한채 외롭고 쓸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절제되지 않는 과욕은 결국 이처럼 죽음을 낳습니다.

  악한 마귀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지게 합니다. 광고 문구에 보니 "그냥 하세요."(just do it)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그냥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잠깐 멈춰 서서 도대체 그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절제를 상실하고 본능 그대로 살아가는 동물의 세계일 뿐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뭐든지 하고 사는 사회, 그것이 동물의 세계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런 본능을 절제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적인 절제를 해야 합니다. 지성의 절제, 생각, 말을 절제해야 합니다. 지성과 이성을 넘어 영성의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행동을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되지 않는 인간의 욕망은 흉기가 되는 것입니다. 절제되지 않는 권력, 지식, 감성, 욕망은 무서운 흉기가 되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인 '라챠드 3세'는 영국 어느 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리차드 3세는 왕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형이 왕이었으므로 큰 부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왕좌를 욕심내고 있었으며, 그것만이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리차드는 살인까지 범하는 악행을 하였고, 결국 소원 성취를 하여 왕좌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량한 영국국민들은 그를 반대하는 반군에 가담을 하게 되고, 양쪽 군사들이 서로 싸우는 중에 리쳐드3세는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그처럼 갈망했던 댓가는 자신을 결국 명망시켰던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습니다. 그리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습니다. 절제하지 하지 않는 모든 욕구와 욕망은 곧 흉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찌르고 자신도 찌르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25장 28절을 보십시오. "자기 영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무너져 내려 성벽이 없는 도시와 같으니라."하셨습니다. 무너져 내려 성벽이 없는 도시는 적이 침입하면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결국 패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너져 내려 성벽이 없는 도시와 같은 영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 영을 다스려야 하는데 문제는 자기 영을 다스린다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자기통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성령의 방법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절제시키시면 우리의 육신의 욕망이 통제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인격을 강력하게 장악하시고 다스리기 시작하면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강력하게 조절하게 됩니다.

  절제의 복

  절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잘 지키는 지혜입니다. 절제는 이미 우리에게 부어주신 열매들을 소중히 간직하는 성품입니다.  성령님은 절제의 열매를 부어 주시므로 행복을 지키는 시험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십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5).

  절제 없이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갈 5:17,21)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6장에서는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갈 6:8)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축복의 열매를 쏱아지지 않게 담는 절제의 그릇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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