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슬로브핫의 딸들 (민 27:1-11, 민 36:1-13)

  • 잡초 잡초
  • 3036
  • 0

첨부 1


슬로브핫의 딸들 (민 27:1-11, 민 36:1-13)

'소외(疏外)'라는 개념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새로이 겪게 된 문제점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대중'이라는 큰 덩어리가 돋보이고 강조되는 사회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혼란스럽게 되고, 그러다 보면 비록 바로 곁에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소위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바로 그런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가도 아무도 날 알아주지도 않는다." - 이것이 전도를 받아도 교회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핑계이면서 또 특히 큰 교회에 다니는 일부 교인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불만입니다.
  분명히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군중'의 공동체이지만, '개개의 교인'은 바로 그 교회 안에서도 오히려 고독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광야교회야말로 그런 문제가 생기기 가장 쉬운 교회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몇 백 명, 몇 천 명의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 안에서도 한 교인이 그런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백만 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모여 있었던 그 공동체 안에서는 어떠했겠습니까?
  어떤 한 사람이 새로 왔는지, 어떤 교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누가 어떤 시험 때문에 교회를 떠나버렸는지 아무도 알아줄 사람도, 알아줄 길도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초대형교회가 바로 이스라엘의 광야교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랬습니까?
  과연 그처럼 큰 교회 안에서는 교인 한 사람이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그냥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놀랍게도,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대공동체 안에서도 거기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축복을 얼마나 완벽하게 누릴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은 바로 이 말씀을 통하여 '교인이라는 개인'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은혜와 특권을 빠짐없이 누리기 위하여 꼭 기억하고 지켜야 할 두 가지 사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람들은 알아주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교인 한 사람까지 교회를 통하여 돌보아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바로 이 사실을 본문 27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우선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1요셉의 아들 므낫세 가족에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나아왔으니 그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2그들이 회막 문에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족장들과 온 회중 앞에 서서 가로되 3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스려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에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4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5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품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일은 앞의 26장에 기록된 제2차 인구조사가 막 끝났을 때 일어났는데, 이번의 인구조사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 각 지파별로 땅을 나누게 될 때 그 분배원칙의 근거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처럼 땅 분배가 현실화될 즈음에 "슬로브핫의 딸들" 다섯 명이 자기네 집안의 권리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모세와 이스라엘의 원로들 앞에 하소연을 해왔습니다.
  그 문제란 곧 자기 아버지 슬로브핫이 "아들이 없이" 죽은 관계로 자기네 가문이 그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분배받지 못하게 된 사정이었습니다.
  본문에 "우리 아버지가... 자기 죄에 죽었고"라는 말은, "고라의 무리"들과 같이 어떤 특별한 중죄를 지어 죽은 것이 아니라, 원래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어 있는 인생의 순리를 따라 죽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슬로브핫의 딸들의 요청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딸들에게는 아무 상속권이 없었습니다.
  결혼할 때 신부가 가져가는 지참금까지도 결혼 후에는 남편의 소유가 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니 슬로브핫이 아들 없이 딸만 다섯 남기고 죽게 되었다면 그에게 할당된 기업은 자연히 그에게 가장 가까운 다른 친족에게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슬로브핫의 딸들은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아버지 슬로보핫 역시 가나안 땅의 기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그 이름으로 자손에게 물려 줄 권리가 있었는데, 단지 아들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 권리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딸들은 그 문제를 모세 앞에 직접 품해 왔습니다.
  여자의 이름으로 상속권을 주장하는 것도 그렇지만, 또 그처럼 여자들이 모세에게까지 나아와서 그처럼 전례가 없는 일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당당하게 요구한 그 자체도 그 이스라엘 사회의 전통으로 볼 때 정말 대단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6절 이하 11절 말씀에 "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7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비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얻게 하되 그 아비의 기업으로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8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기업을 그 딸에게 돌릴 것이요 9딸도 없거든 그 기업을 그 형제에게 줄 것이요 10형제도 없거든 그 기업을 그 아비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11그 아비의 형제도 없거든 그 기업을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 얻게 할지니라 하고 나 여호와가 너 모세에게 명한 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판결의 율례가 되게 할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세가 그런 사연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하나님께 기도드리자, 하나님께서는 천만뜻밖에도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다"라고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슬로브핫에게 할당된 기업을 그 딸들에게 줄 뿐 아니라, 바로 이 사건을 새로운 판례로 삼아서 앞으로도 그대로 적용하도록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상속받을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 순으로 유산되던 전통을 깨고, 이제부터는 딸이 아들 다음으로 상속권의 우선 순위자로 지정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선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물론 기절초풍할 만큼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이스라엘 전통사회 속에서 남자에 비하여 완전히 무시당하던 여자들에게, 그것도 지금 이백만 명이나 되는 대집단 속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고 게다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의 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상한 조처를 내려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보고서도 우리가 '교회 안에서 소외감을 느낀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과 생각들을 하게 되는 이유는 자신의 교회생활을 오직 사람과의 관계만을 염두에 두면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하면서 그 안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 뵈옵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누리는 성도는 결코 그런 무슨 '영적 소외감' 따위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눈이 나쁘셔서 작은 교인 한 사람을 못 보고 지나가시거나 마음이 좁아서 목사나 장로 같은 '중직자'만을 편애하실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백만 명이나 되는 광야교회 안에서도 다섯 명의 여인을 그처럼 세밀하게 보살펴 주신 하나님이신데, 오늘날 아무리 '큰 교회'라 해도 그 안에 있는 교인 한 사람을 모르시거나 무시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같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기 위하여 우리 편에서 꼭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슬로브핫의 딸들처럼 각자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나오는 것입니다.
  자기의 어려운 형편을 위하여 교우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자기가 당하고 있는 시험을 교역자에게 알려서 권면을 받는 것이 바로 그 문제들을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품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바로 이 순서를 빼먹고 있으면서 자기는 교회 안에서 소외되었다고 불평하는 것을 흔히 봅니다.
  이런 교인들은 교회의 교역자들이나 다른 교우들이 무슨 신비한 레이더나 텔레파시 따위를 가지고 있는 줄로 아는 모양입니다.
  자기 마음에 무슨 시험을 당하고 있는지 자기가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목사님쯤 되면 의례히 척 알아차려 주어야 하고, 자기 집안에 어떤 어려운 일이 있는지 자기는 직접 말해 주기 이전에 같은 교회 교인이라면 다른 무슨 경로를 통해서라도 다 알고 있어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꽁하니 가슴속에 묻어 놓고 있는 것을 터놓고 말하기는 거북해 하고 자기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위하여 함께 기도해 달라고 말하기는 자존심 상해 하면서도, 정작 상대방을 향해서는 자기 형편을 몰라준다고 섭섭해 하는 이상한 심리를 가진 교인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늘 그런 마음자세를 가지고 교회와 성도들을 대하고 있으니 이미 소외감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큰 교회 안에서는 현실적으로 목사가 교인들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목자장 되신 주님께서는 자기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까지 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십니다.
  교구담당 전도사는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고 심방장이나 구역장조차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형편과 사정들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 되신 교회를 통하여 확실히 연결되어 있는 지체의 아픔을 같이 못 느끼실 리가 없습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과 16절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문제점을, 나의 시험거리들을 교역자들에게 가져오고 교회의 성도들과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들을 두고 서로 기도해 줄 줄 알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자상하게 돌보고 계시는지, 정말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다 세시면서 기억하고 계시는지를 우리 모두가 꼭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극히 작아 보이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로 교회를 중심으로 서로 교통하며 피차의 형편과 처지를 위하여 함께 간절히 기도드림으로써 꼭 풍성하게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개인의 권리만을 주장하지 말고 공동체의 질서와 화평을 위하여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민수기 마지막 장에 이 슬로브핫의 딸들에 관하여 연이어지는 사건이 나오는데, 우선 36장 1절부터 4절 말씀을 보면 "1요셉 자손의 가족 중 므낫세의 손자 마길의 아들 길르앗 자손 가족의 두령들이 나아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의 두령 된 족장들 앞에 말하여 2가로되 여호와께서 우리 주에게 명하사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기업의 땅을 제비 뽑아 주게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우리 주에게 명하사 우리 형제 슬로브핫의 기업으로 그 딸들에게 주게 하셨은즉 3그들이 만일 이스라엘 자손의 다른 지파 남자들에게 시집가면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의 기업에서 감삭되고 그들의 속할 그 지파의 기업에 첨가되리니 그러면 우리 제비 뽑은 기업에서 감삭될 것이요 4이스라엘 자손의 희년을 당하여 그 기업이 그가 속한 지파에 첨가될 것이라 그런즉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 지파의 기업에서 아주 감삭되리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전례에 없었던 여자 상속권을 허용하게 되자 그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또 다른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일단 '각 지파별'로 구분해서 분배받았고 각 지파는 또 그 안에서 '각 종족과 가족'을 따라 땅을 더 세분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분배된 땅들은 계속 '자기 자손'에게 물려줌으로써, 결과적으로 각 지파들에게 나누어 준 땅의 경계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남자에게만 상속권을 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슬로브핫의 딸들이 땅을 상속받게 됨으로써 한 가지 장래에 발생할 문제가 예상되었습니다.
  그녀들이 땅을 분배받은 후 처녀로 지낼 때에는 아무 상관없지만,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문제가 달라질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들이 자기네 므낫세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의 남자들에게로 시집을 가게 되면 그녀들에게 속한 땅 역시 자동적으로 그 남편들의 소유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므낫세 지파에게 속한 땅 중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할당되었던 땅 한 쪽만 뚝 떨어져서 다른 지파의 소유가 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각 지파에 속한 땅이 영원히 그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땅 분배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매매나 빚 청산 과정을 통해 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될 경우에도 희년이 되면 무조건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어 있는 것도 바로 각 지파의 땅이 섞이지 않게 하려 함이었는데, 지금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주어진 땅들은 그런 법률을 적용시킬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요셉 자손의 가족 중 "므낫세" 지파에 속한 "두령"들은 바로 이런 복잡한 문제가 생길 것을 예견하고 이를 모세와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 제기해 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난제 역시 하나님께서는 간단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계속되는 5절 이하 12절까지에 "5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에게 명하여 가로되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 6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가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 7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니 8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중 무릇 그 기업을 이은 딸들은 자기 조상 지파 가족 되는 사람에게로 시집갈 것이라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조상의 기업을 보존하게 되어서 9그 기업으로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 10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11슬로브핫의 딸 말라와 디르사와 호글라와 밀가와 노아가 다 그 아비 형제의 아들들에게로 시집가되 12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가족에게로 시집간 고로 그 기업이 그 아비 가족의 지파에 여전히 있었더라 13이는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신 명령과 규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지파 두령들의 그런 말을 들으시자마자 또 "요셉 지파의 말이 옳도다"라고 맞장구쳐 주셨습니다.
  아까는 여자 상속권을 인정해 달라는 슬로브핫 딸들의 말도 옳다 하시더니, 이제는 그 여자 상속권 인정하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므낫세 지파 두령들의 말에 대해서도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서로 상반되는 주장들을 둘 다 맞는다고 대답하신 것은 언뜻 보기에는 분명한 모순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둘 다 공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며 그 양자가 서로 상반되지 않는 해결책이 있으시기에 그처럼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그 해결책이란 그 슬로브핫의 딸들로 하여금 "오직 그 조상 지파의 가족에게로만 시집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 지파인 므낫세 지파에 속한 남자하고만 결혼하도록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그녀들이 시집가서 그 땅이 남편의 이름으로 등기가 된다 할지라도 그 땅은 여전히 므낫세 지파에 속한 상태로 남게 되니까 지파별로 구분된 땅의 경계에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상반되어 보이는 입장 사이에 그처럼 완벽한 해결책을 보여 주셨고 이 사례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도 계속 지켜야 할 "명령과 규례"로 삼도록 지시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규례는 슬로브핫의 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인 희생, 곧 그녀들이 배우자를 정함에 있어서 그 선택의 폭이 제한을 받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다른 지파 남자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게 될 가망성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은 배우자를 훨씬 쉽게 구할 수 있는 길임은 분명했습니다.
  즉 그녀들은 이스라엘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그녀 자신들의 개인적인 권리를 부분적으로 포기해야만 할 형편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슬로브핫의 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행하여" 다섯 명 모두 다 "므낫세 자손의 가족에게로 시집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들이 분배받았던 므낫세 지파에 속한 기업은 그녀들이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그 아비 가족의 지파에 여전히 있게" 되었습니다.
  즉 그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유익과 질서를 위하여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했던 것이었습니다.

  어느 단체에서든지 만일 그 속한 회원들 모두가 자기의 권리만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그 안에는 마찰과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일입니다.
  개인의 권리란 공공의 이익과 상반될 때가 많은 것이며,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희생정신이 필연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세상 사회에서도 각 개인에게 언론의 자유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음란한 내용을 방송윤리위원회에서 삭제시키는 것이며, 거주 이전의 권리가 보장되면서도 녹지대 같은 곳에서는 제 마음대로 집을 못 짓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내 양심의 자유대로 다 주장하고, 내게 있다고 여겨지는 권리대로 다 행사하고 사는 것이 제대로 된 교회생활이라고 착각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교인이 교회 안에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게 되면 그 교회 자체가 존속하지 못하게 될 것은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너무나 자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뜻대로 다 안 된다고 해서 자기가 교회에서 따돌림 받는다고 불평하는 '철없는 교인'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교인들은 자신이 세례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맹세했던 세례서약 제4문, "나는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며"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나의 죄인임'과 '예수 구원'과 '경건생활'이라는 이 '개인적인 신앙'에 대해서만 고백하지 아니하고 이 네 번째 서약, 곧 '교회중심'의 삶에 대해서도 약속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래야만 '나 자신'과 '다른 교우들 전체'가 다 함께 이 교회를 통하여 "정결함과 화평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역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준법생활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한 일에 자신부터 순종하고 희생하는 법을 실천하지 아니하면 그 교회를 통한 은혜를 나누어 받을 길이 전무하며 평생 교회에 대한 불평불만분자로 남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대접,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겨지는 말, 당연히 주장할 수 있다고 판단되어지는 권리만을 내세우지 말고, 먼저 교회 전체의 질서를 위하여 말씀을 통한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고 공동체 전체의 화평을 위하여 개인적인 희생을 기꺼이 바침으로써, 축복 넘치는 교회의 일원된 각 교인에게 절로 내려지게 되는 특권 역시 반드시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슬로브핫의 딸들은 원래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이름은커녕 숫자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지극히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 두 곳에서 그녀들의 이름들은 "말라와 디르사와 호글라와 밀가와 노아"(27:1, 36:11)라고 똑똑히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초대형교회였던 광야교회 안에서도 이 다섯 여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뚜렷하게 기억되었던 것입니다.

  "교회 나가보았자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는다."라는 말, 전도할 때나 심방할 때 자주 듣게 되는 핑계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사람이 자기 알아주는 재미로 나오는 곳입니까?
  큰 교회에 나가면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도 자기 얼굴 못 알아보시고 자기 이름 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작은 교회에 나가면 자기는 열심히 신앙생활 안 해도 목사가 더 받들어주고 교인들이 더 높여줄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 안에서의 소외감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교회의 중심에 들어오지 않고 자꾸 아웃사이더로만 돌려고 하면서, 그런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핑계거리로 나오는 변명에 불과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그런 교인들은 자신이 교회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실상은, 요즘 학생들이 표현하는 대로, '자따' 즉 자기 스스로 외톨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잘못 만드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 지체가 신경도 통하지 않고 영양분도 공급되지 않게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본인이 교회 가장자리만 슬쩍 스치면서 왔다갔다고 하고 있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지 확실히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하면 결코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렇다 저렇다'라고 늘 불만스러워하고 불평하는 교인들은 먼저 자기 자신이 정말 교회중심의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이것부터 솔직히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진정 '교회 중심의 신앙'을 지키면 그것은 곧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직결되는 것이니 결코 목사나 교인들 같은 '사람 중심'으로 흐르지 않게 될 것이며, 늘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하면 교회를 통하여 충만히 넘치고 있는 축복이 그 교회의 지체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을 리가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몇 달 전에 우리 교회 심방장 사역보고회 때 어느 심방장 집사님께서 자기가 경향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에 경향교회 교인들은 주일예배가 끝난 후에도 다들 무슨 권사회다, 전도회다, 경향선교회다, 교사회다 하면서 각자 얼마나 바쁜지 자기하고 놀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소외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고 간증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소외감을 느꼈던 당사자가 우리 경향교회에 온지 몇 년도 채 못 되어 심방장까지 되어서 지금은 자기도 주일 하루 종일뿐 아니라 주중에도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그러나 또한 정말 기쁘고 보람되게 교회생활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이든지 작은 교회이든지 간에 자신이 바로 교회 한 가운데에 들어와서 바쁘게 사는 교인들은 소외감을 느끼려야 느낄 새가 없지만, 자신이 그 중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으면 절로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문제를 뒤에서 불평하지 아니하고 광야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가져왔던 자, 광야교회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개인적인 권리를 공동체 전체 유익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알았던 자 - 그처럼 '교회 중심'으로 살 줄 알았던 '슬로브핫의 딸들'은 그 많은 교인들 있는 그 큰 교회 안에서도 결코 소외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역시 하나님께서 오직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 바르게 하는 성도를 그 교회 안에서 외롭게 하실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어려운 일이나 시험이 있을 때 함께 교회에서 기도하며 주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교회 중심으로 순종하고 봉사할 줄 아는 교인들이 되어서, 바로 그 귀한 교회를 통하여 오늘도 각 사람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크게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