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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신을 드리는 헌금 (고후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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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드리는 헌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 8:2)

I. 본문해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헌금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마게도냐 교회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이러합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서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이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십시일반으로 헌금을 해서 그 재난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이지만 참된 신앙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부분이 헌금생활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 교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고린도시는 항구 도시로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었던 곳이었으므로 부유한 곳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넉넉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으면서도 헌금 문제에 있어서 올바른 질서 가운데 있지 못하였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면서 올바른 헌금생활을 위해서 고린도 교회에 사랑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헌금생활의 본보기로 소개한 마게도냐 교회는 본문에서 볼 때 환란의 많은 시련을 당한 교회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마게도냐 교회가 당해야했던 시험과 시련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이방세계에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였으니 커다란 박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물리적인 박해는 물론이거니와, 그렇게 철학이 발달한 마게도냐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사상적인 박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낙인찍고 박해하고 핍박하는, 환란과 시련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어쩌면 이방 세계의 불신자들이 이들을 핍박하여 교회에 심각한 해를 끼치려고 하는 박해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교회는 극한 가난 가운데 처해있는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 이 말을 들으면 함께 떠오르는 그림이 ‘환란과 시련이 많은 교회’, ‘극히 가난한 교회’, 그러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게도냐 교회로 하여금 부유한 항구도시에 살아가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부끄럽게 한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II. 마게도냐 교회에 주신 은혜

우리는 여기에서 환란과 시련이 헌금 생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란의 많은 시련을 당하고 극한 가난 속에서 고통을 받는 교회였지만 이 교회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한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넘치는 연보로 고통당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힘은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A. 넘치는 기쁨

그들로 하여금 환란의 시련, 극한 가난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넘치는 헌금을 드림으로 성도들을 섬기게 해 주었던 원동력은 넘치는 기쁨이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이 비록 환란의 많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피를 말리는 고난과 자기의 마음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커다란 환란을 쉴 새 없이 당하며, 밀려드는 시련의 파도와 환란의 물결과 더불어 몸부림치며 살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넘치는 신앙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환란을 능가하는,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위로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련은 컸지만 시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환란은 있었지만 환란을 능가하는 놀라운 기쁨과 위로,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이 이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의 심령 속에 넘쳐났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쁨이 그들을 주관하였고 그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환란과 시련의 모든 물결을 헤치고 언제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이 우리의 믿음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자 하는 여러분들을 이 세상은 끝까지 방해할 것입니다. 세상의 환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도와주지도 않으며, 삶의 모든 여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끔 밀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상에서 시련과 환란은 없을 수 없으며 궁핍과 결핍이 떠나지 않습니다. 결핍이라는 것은 우리가 늘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결핍을 느낍니다. 가난도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환란도 있고 시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란의 시련, 극한 가난을 능가하는 큰 기쁨이 마게도냐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 한 분 때문에,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 때문에, 나 같은 죄인에게 이와 같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 생활할 수 있게 해주신 은혜 때문에 기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감사와 그 기쁨이 마게도냐 교회의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을 잃어버린 성도들은 그 마음이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고통 받는 성도들을 향해 닫히고 급기야는 지갑까지 닫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넘치는 기쁨을 가진 이 교회를 묘사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은근히 책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 교회처럼 많은 시련과 환란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에는 그러한 기쁨이 없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환란의 시험과 시련의 폭풍에 강타 당하였어도 여전히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궁핍하고 가난한 교회였지만 고린도 교회가 가질 수 없었던 것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넘치는 기쁨이었습니다. 교회란 이런 모습이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러한 신앙생활 자체가 그의 물질적인 궁핍이나 물질생활에 있어서의 어떤 잘못된 태도 하나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 전체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심치 못한 자들의 대표적인 욕망은 탐심입니다. 그 탐심이 인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물신(物神)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하지 못합니다. 성도들의 헌금생활을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개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자신의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돈지갑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그 회심을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저에게 누군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마지막에 포기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이 바로 물질에 대한 집착이요, 사랑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B. 사랑의 고백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받은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표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고, 우리의 중심을 바치는 기도로 예배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본보기로서 우리의 귀한 헌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태복음 26장의 죄인인 한 여자가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다가와서 옥합을 깨뜨려서 향유를 부었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녀는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 모두 부어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 향유가 부어진 것은 이 여인이 살아온 지난날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부어진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죄인으로서의 생애를 살며 자신의 인생을 깎아서 모은 향유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물질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던 자신이었지만,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엔 많은 돈으로도 위로할 수 없었던 자신의 속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어루만져졌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없던 외롭고 고달픈 인생길을 살아가던 그 여인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여인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자 이제 삶의 가치가 바뀌게 되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 향유를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가져와 아낌없이 부어 버릴 수 있게 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헌금을 바치는 삶을 통해서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 제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제가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주님 당신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질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매일 부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주나 물질 때문이 아니라 여기까지 우리의 인생을 구속하시고 많은 환란 가운데서 건져주시며 시련의 폭풍 가운데서도 이끄셨던, 그리고 극한 가난과 결핍 속에서도 우리를 홀로 있게 내버려두시지 않고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사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살아가는 것도 내 손이 움켜진 이 물질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때문에 사는 것이라는 이 사실을 헌금을 통해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고백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 기억되고 있는 것으로 인해서 만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익숙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나님만이 이해하시면, 모든 것들을 인내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분께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귀한 것들을 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 뿐만이 아닙니다. 재능과 시간 모든 것들이 그러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바치면서 살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자기의 귀한 것을 바치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바치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 당신이 늘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러한 넘치는 기쁨과 사랑이 우리를 주관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앞으로 살아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또한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서 드리고자 하는 섬김으로 그렇게 우리의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12) 만물이 다 주님의 것이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우리의 제물과 번제물에 탐을 내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고 싶어 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물질이나 우리의 재주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그 마음의 진실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 중심이 담겨있는 헌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여러분에게 주어질 때 교회적으로나 누군가를 도와야할 상황이 올 때도 그러합니다. 그렇게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게 될 때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워지겠습니까.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 또한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마게도냐 교회로 하여금 수많은 악조건을 물리치고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자신을 드리고 귀한 헌금을 드리는 놀라운 신앙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III. 자신을 드리는 헌금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힘에 넘치도록 하나님 앞에 드린 헌금이었고 두 번째는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헌신할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자원한 헌금이었고 마지막으로는 자기 자신을 드린 헌금이었다는 것입니다.

A. 힘에 지나도록

먼저 이 마게도냐 교회는 자신의 힘대로 헌금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힘에 지나도록 헌금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할 때에는 이 마게도냐 교회가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이고 세워진지 얼마 안 되는 교회인 데다가 가난하고 시련과 환란이 그치지 않는 교회인데 이 교회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모금을 할 때에 낼 수 있는 교회의 예상목록을 짜면서 고린도 교회는 좀 많이 써 놓았지만 마게도냐 교회는 거의 써 놓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보는 환경과 여건에서는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회는 사람의 생각과 예상을 깨고 더 넘치는 연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믿어 동족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근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을 때에,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는 것처럼 그렇게 헌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릴 때에 적당히 회비를 내는 식으로, 사무적인 태도로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힘껏 마음의 중심을 드리고 헌금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것이 진실이지만, 그러나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내는 그 헌금 속에 중심이 깃들어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정말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고, 그 헌금 드리는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은 아무렇게나 즉흥적으로 헌금을 드리지 않습니다.

오늘 이 마게도냐 교회를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으로 힘을 다하여 헌금했고, 그렇게 힘껏 헌금해도 그것으로도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수 없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힘에 지나도록 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이러한 변화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손이 지갑에 닿을 때는 갑자기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높이 들고 찬양하던 그 손이 지갑 가까이 가기만 하면 왜 그런지 떨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색해집니다.

자신들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하여 가난한 자 되시고, 자신들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버려서 빈털터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할 때 마게도냐 교인들은 그 은혜를 받은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가난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시련과 가난의 고통을 통해서 눈물 흘리시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드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재물에 대해서 인색해지고 고통 받는 지체와 이웃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힘을 다하여 헌금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말하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감동받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그리고 정한 눈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시기 위해서 그는 자신을 다 버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분은 생명을 잃으셨고 우리에게 영광을 베푸시기 위해서 치욕과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당신에게 좋은 모든 것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안락하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은 그 모든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버리셨고, 삶에 있어서의 즐거움을 버리셨으니 이는 우리를 즐겁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마게도냐 교인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나니,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하는 탐욕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 손에 쥐고 있는 흙덩이와 같은 재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예수처럼 가난해지고 낮아져서 자기들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다른 지체와 이웃들을 부요하게 하는 그 길을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헌금을 드리는 것 사이에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재물에 대한 사랑을 영원히 내려놓지 못하는 인간적인 연약함이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개입하는 세속적인 생각들을 끊임없이 미워하고 부정하는 자기부인이 없이는, 은혜 받은 대로 헌금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하여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는 그 찰나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계산적 성품이 그 은혜가 물질을 바치는 헌금으로 고백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그러한 생각을 부인하고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물질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자기확인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와 헌금을 드리는 실제 삶 속에 파고들어오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며 만나를 쌓아두고픈 우리의 계산적 생각을 추방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B. 자원하여

두 번째로는 바울에게 자신들도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고 드린 헌금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가 가난하거나 어렵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을 돕고자 하는데 동참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바울에게 자원하여 헌금을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를 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게도냐 교회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운 일에 자신들도 동참시켜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귀한 성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자신의 필요보다도 오히려 교회의 필요와 지체들의 필요에 더 예민해집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자신들에게 할당된 의무만을 이행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물질로 다른 성도들을 섬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그 은혜로운 헌신에 자신들을 동참시켜달라고 자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할당된 기회를 의무적으로 이행하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십시오. 지금도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구석구석 살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물질적인 삶에 있어서도 불꽃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헌금생활을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C. 자신을 주께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잠 23:26) 아버지는 효도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달라는 것은 너 자신을 나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들은 헌금 생활에서도 자유롭습니다.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착각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한때 내 자신을 바쳤다고 해서 지금도 내 자신을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때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바친 추억이 있다는 것과 지금 내 인생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우리 자신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의 인생에 대한 소유권을 부정해야 합니다. 다 주님의 것이고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드림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으로 그 일부를 드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 마음이 헌신된 고백과 멀어지고자 하는 그 간격을 순간순간 피흘리는 열심으로 투쟁하면서, 내 안의 죄와 여전히 남아있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죽이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삶을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하나님께서는 이 마게도냐 교회에 넘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기쁨으로 인하여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습니다. 여전히 물질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인색하고 자신을 향해 부요한 사람들은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고 이제껏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물질과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헌금은 자기 자신을 바치지 않고는 드릴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의 헌금 생활이 형식적이고 마음을 드렸다고 할 수 없고 영적으로 부요하지 못하다면, 헌금 생활에 있어서 잘못된 태도는 여러분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부요하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이 숨어있는 헌금을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신앙의 고백이 녹아있는 헌금을 드림으로써, 빈 잔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더 깊이 경험하며 아버지께 가까이 다가가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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