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눈먼 자의 심정일 때, 눈이 뜨인다 (요 9:35- 41)

  • 잡초 잡초
  • 702
  • 0

첨부 1


눈먼 자의 심정일 때, 눈이 뜨인다 (요한복음 9장 35- 41절)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

  감리교 목회자 기도회 때, 한 사모님이 자신은 왜 이렇게 얽매여 살아야 하는지 고통스러워 했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모르느냐?’ 고 말씀하시더랍니다. “하나님 이것이 사랑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늘 혈기 부리는 교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혈기로 사는가? 한심하다.’ 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때 ’내가 너를 사모로 내 옆에 묶어 두었기에 너는 혈기를 부려도 하루를 넘기지 않지 않니?‘ 하시더랍니다. 또 도무지 용서 못할 것 같은 교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보여 주시면서 ’그가 네게 잘못한 것이 크니, 네가 내게 잘못한 것이 크니?‘ 하시는데 그 때 고백했답니다. “주여, 용서하고 말고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면 모든 것이 다 달라집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나면서 소경된 사람은 사실 두 번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한 번은 육신의 눈을 뜬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눈을 뜬 것과 영적인 눈이 뜨인 것 중 어느 것이 더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영적인 눈이 뜨인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뜨인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다 눈을 뜨고 살지 않습니까? 여러분, 눈을 뜨고 사는 것 하나만으로도 너무 행복하십니까? 그리고 그가 눈을 뜬 후 얼마나 더 살았겠습니까? 수십 년 살면 그도 죽습니다. 죽고 나면 눈을 뜨고 산 것이나 눈을 뜨지 못하고 산 것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영의 눈이 뜨인 것은 어떻습니까?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는 지금 천국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몇 십년 눈을 뜨고 산 것과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비교가 됩니까? 영생을 얻은 것이 육신의 눈을 뜨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고 큰 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좀 이상하게 들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되게 하려 함이라” (39절)
바리새인들은 무슨 말씀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보지 못하는 자는 눈을 못보던 자를 말하는 것 같은데 보는 자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인 줄 알고 발끈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맹인이라는 말인가?”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40절) 

예수님 말씀은 그들이 영적으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바리새인들을 맹인이라 하셨는가 하면 첫째,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이런 장애인들은 죄가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다고 믿었고 그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 말은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자기들은 ‘본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죄인이면서 그것을 모르니 영적으로 맹인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죄인 중의 죄인이라고 확신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가장 잘 믿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들도 보았습니다.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는데 그들은 보고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면서 보지 못하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것보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 소경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셨다는 말에 더 놀랐습니다. “뭐야,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이런 나쁜 놈이 있나! 그런 자는 죽여야 된다.” 고 한 것입니다. 그러고도 “본다 하니” 기가 막힌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저희도 죄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면 죄가 용서받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부득부득 “우리가 본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그 말은 우리에게는 구주가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잘 보는데, 왜 우리가 다시 눈을 떠야 하느냐?” 고 영적으로 교만하니 그들은 더욱 영적으로 맹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영적인 눈이 있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합니다. 
여러분, 영혼의 눈이 뜨이지 않았다면, 육신의 눈이 밝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로 갔습니다. 세상적인 눈이 밝았기 때문입니다. 그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도 많이 살아서 큰 부자가 될 땅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땅의 죄악상을 살필 영적인 눈이 뜨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고 벼르는 땅으로 가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어려운 땅이라고 하는 것은 간과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리로 이사를 갔습니다. 결국 모든 재산과 아내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적인 눈이 뜨인 사람은 당장은 돈도 버는 것 같고 잘 되는 것 같아도 결코 부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으면 사람이 죽을 길, 망할 길로 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면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죄인임도 알았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도 알고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과 판단이 다릅니다.

여러분, 이번에도 건축 특별헌금을 하자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재정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통일교 문선명이 우리 교회에 수백 억을 헌금한다면 그것을 받겠습니까?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할 것입니다. 안 받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왜 제사 문제가 힘이 듭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눈이 뜨이지 않았기 때문에 조상님인 줄 알고 부모님인 줄 알고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영적인 눈이 뜨이고 보니 그것이 귀신의 역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다, 할아버지다, 조상이다 하고 속이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절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적인 눈이 뜨입니다. 그래서 이만큼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하여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육신의 눈만 의지하여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도마가 생각하기에는 예수님은 엄청난 기적을 행하시고 메시야로 나타나실 줄 알았는데 너무 연약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 실족을 했습니다. 영적인 방황을 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였을 때도 “나는 믿지 못하겠다! 내가 예수님 손바닥의 못 자국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어.” 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이 “그래 내 손바닥을 만져보고 옆구리를 만져보라.” 고 말씀하셨을 때 도마가 만져보고 손을 넣어보고 할 것도 없이 “주여 제가 믿습니다.” 했습니다. 주님이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눈이 뜨이기는 했지만 쉽게 다시 육신의 눈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자가 되기 쉽습니다. 워낙 우리 육신이 강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주여, 제가 무엇을 보는 자 입니까? 주님께서 영적인 눈을 열어서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주옵소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영적인 눈을 뜨고 사는지 아닌지 크게 두 가지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죄인임을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영이 산 자는 자신의 죄악을 보는 눈이 뜨입니다. 말로만 “주여, 말할 수 없는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누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죄를 지적하면 견디지 못하고 화를 내는 사람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가 너무 내 눈에 크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숨길 수도 감출 수도 없습니다. 육신의 본성이 뿌리부터 죄인인 것을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눈이 열려서 보아야 합니다.

  한 번은 결혼식 주례를 하는데 시간 약속을 잘못하여 교회와 여의도에서 하는 결혼식 주례를 한 시간 간격으로 약속 해놓은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교회에서 주례를 마치고 여의도까지 30분 안에 도착하기란 도무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구급차를 부를 생각을 다 했습니다. 싸이렌을 울리며 가면 다른 차들이 응급 수술을 받는 사람인 줄 알고 비켜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이 죄임을 깨달았습니다. 목적이 옳다고 방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너도 나도 급하면 구급차를 이용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크게 회개하고 택시를 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식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늦지 않은 것보다 정직했다는 것이 더욱 기뻤습니다.

‘내가 정말 그렇게 큰 죄인일까?’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시면 우리가 살인자보다 더 무서운 자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는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러나 살인해 놓고도 자기가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살인보다 더 나쁜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칼로 사람은 안 죽여도 사람을 죽인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음을 모릅니다.

  한 여학생이 자살하였습니다. 누가 농담같이 던진 한 마디 말 때문입니다. “넌 어떻게 그런 못 생긴 얼굴로 돌아다니니? 다른 사람 생각도 해야지!” 이 여학생은 그 말을 농담으로 넘길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나오면서도 고개를 못 들고 지냈습니다. 남에게 혐오감을 줄까 봐. 그러다가 그것 때문에 고민하다가 자살을 했습니다. 누가 그 말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그 사람도 자기가 그렇게 했다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더 심각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도 말로 죽이며 삽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피가 나도록 상처를 입혔다면 그것 때문에 눈물 흘리며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 준 상처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갑니다.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얼마나 이기적이고 악한지를 보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영적인 눈이 열어 자기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죄책감에 눌려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품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엄청난 죄인이지만 용서받은 것 같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용서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전히 죄 많은 사람, 가시같은 사람, 문제 많은 사람이 보입니까? 쉽게 판단하지 말고 “예수님 제 눈을 열어 정말 볼 것을 보게 해주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옛날 어떤 수도원이 어느 날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기 시작했습니다. 썰렁해졌습니다. 깊이 고민하던 수도원 원장이 기도를 많이 하는 지혜자를 찾아가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일러 주었습니다.
"그 수도원이 침체한 것은 수도원 사람들이 큰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원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 우리는 세상도 가정도 다 떠나 수도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큰 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그 지혜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그 수도원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장한 모습으로 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마땅히 존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죄 때문에 수도원은 침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도원 원장이 수도원에 돌아와 모두에게 그 말을 전했습니다. 그 때부터 수도원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어쩌면 저 사람이 변장한 예수님인 지 모른다.' 그러면서 그들 사이에 비난하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그 때부터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습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그 수도원은 다시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답니다.
  우리가 진짜 눈이 뜨여야 합니다.


두 번째, 영안이 열린 사람은 예수님이 언제나 살아계신 구주이심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두려움이 오고 염려가 오고 혼자 있어서 외롭고 힘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도 ‘나는 혼자다.’ 하고 탄식하지 말고 “주께서 함께 하심을 보게 해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면 됩니다. 
(히 12:1)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우리에게 응원 부대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우리보다 먼저 천국에 가신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영 안이 열리면 그것이 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십니다.
(시 84:5-7)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 그들은              ...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시온의 대로가 보이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Garry Wienz는 모든 성도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랑되시는 예수님과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 길에 만나는 모든 힘든 일, 어려운 순간은 모두 주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아름다운 신부가 될 준비임을 알면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완벽하군.” 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모든 일이 달리 보입니다.

  쟌느귀용 부인은 죽음의 문턱에 갔다고 할 만큼 중병을 앓고 난 다음, 세상의 모든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서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던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주님께 완전히 순종할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완전히 만족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간절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본다, 나도 판단이 있다, 나도 판단할 수 있다, 내가 알아서 한다, 나는 눈먼 자가 아니다.’ 하는 생각도 결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영적 교만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하면 영적인 눈이 더욱 어두워집니다. 아무리 내가 옳아 보여도 “주님, 저는 육신의 눈은 밝지만 영적으로는 주님이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제가 옳은 것입니까? 주님 이 길이 바른 길입니까?” 묻고 살아야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성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계 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지난 2005년 4월 8일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충현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창인목사님은 "해방 직후 신사참배한 목사들을 두고 마귀당이라고 하고 밥도 같이 먹지 않았습니다. 처음의 뜻은 좋았지만 내가 잘났다는 교만심이 커지고 판단만 하고 사랑은 흐려졌습니다." "평생 나 자신이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았으면서도 가장 무서운 교만 죄를 가지고 함부로 입을 열어 정죄하고 저주했던 죄를 지었습니다. 하늘 나라는 회개한 자만 간다고 했습니다. 이 교만했던 죄와 부족한 종이 바로 죽을 수 있도록 축복해주길 바랍니다." 며 목이 메인 채 고백을 마쳤습니다.

  경동교회 담임목사였던 강원용목사님께서는 자신이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는 힘을 쓰면서도, 정작 기독교 교단 사이의 일치에 대하여 소홀했던 점을 회개했습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결코 값싼 것이 아닌데도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이 없는 ‘값 싼 은혜’ ‘무조건 축복받는 것’ 만 강조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이생과 안목을 좇아 썩어가는 옛 사람의 구습을 벗지 못했습니다." "너무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게 살았고, 말로만 사랑하고 진실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나를 위해 살았습니다." "너무 나 자신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았습니다." "가끔은 이웃의 고난에 참예하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에 참예하지 않았습니다." "또 사회 악에 대해 침묵했습니다. 부정과 부패에 고개를 돌릴 때도 있었고 옳은 것은 옳다 나쁜 것은 나쁘다고 말하지 못한 비겁함이 제 생애에도 뼈저리게 있었습니다." 며 "70 평생에 죄인의 괴수라고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값싼 은혜에 안주하기를 탈피하고 새 사람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합니다."

  정말 대단하셨던 목사님들입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옳다.”고 당신 사역에 확신이 있었던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돌아보니 회개할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옳다, 나는 판단할 수 있어!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교만입니까? 여러분, 내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우릎꿇고 “주여, 제가 무엇을 보는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이 보여주시지 않으면 옳고 그른 것 하나를 분별을 못합니다.” 하고 주님의 판단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는 길을 계속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안일하면 안됩니다. 앞은 보지 못하면서 천길 낭떠러지 절벽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고 “주여, 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이것이 진정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세입니다. 그것을 모르니까 천하태평인 것입니다.

“내 눈에 안약을 발라주소서!” 그 심정으로 새벽마다 기도하며 무릎을 꿇을 때, 영적인 눈은 더욱 뜨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새롭게 보입니다. 무엇이 소중한지, 무엇이 급한지, 무엇이 복인지, 사람이 보입니다. 사랑이 보입니다. 용서가 보입니다. 기쁨이 느껴집니다. 감사가 느껴집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길을 살다가 주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