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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값진 예물 (시 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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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값진 예물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시편 51편을 지은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조차 인정하지 않는 아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택하셔서 위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의 역사에 가장 빛난 별과 같은 신앙의 금자탑을 쌓았던 왕으로 남게 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다윗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메시아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나심과 고난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다윗을 통하여 약속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예수의 세계라’(마 1:1)라고 기록될 만큼 하나님의 언약 계보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을 소유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없었더라면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고백들을 수없이 시편에 남겼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어두움 가운데 자기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의지하며 걸어갔던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신을 대적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뢰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어렵고 힘든 일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진실로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며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다윗이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아라는 충성스러운 자기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시편 51편은 이 죄를 짓고 세월이 흐른 다음에 선지자 나단이 와서 당신이 바로 하나님 앞에 범죄한 그 자라고(삼하 12:7) 지적할 때에 지은 시입니다.

I.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다윗은 15절에서 말합니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다윗이 얼마나 많은 시를 지었습니까? 그가 지은 시를 읽으면, 우리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 쏟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진실로 깊이 체험했고, 그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진실한 삶이었기 때문에 그가 지은 시는 오늘날 우리에게 커다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다윗은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그 입술이 닫혀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아름다운 목소리는 멎어버렸고, 주님을 노래하던 입술은 닫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죄는 이와 같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보다 하나님과 더 가까운 사람이 없었던 그 사람을, 한 순간의 범죄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고깃덩어리로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찬양의 시를 지어내던 마음의 수금의 줄이 끊어지고 거미줄이 슬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찬양하고 싶으나 입술에서 더 이상 노래가 흐르지 않고, 주님을 전파하고 싶으나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II.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다윗은 이것을 통해서 깊이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는 제사를 즐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름다운 성전을 솔로몬이 지었으나 그 수없이 많은 준비는 다윗이 마쳤습니다. 그리고 법궤가 들어올 때에 춤을 추며 어린아이와 같이 뛰놀던 사람이 다윗이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왜냐하면 법궤가 있는 곳이 바로 제사가 드려지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큰 시련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 ‘주는 제사를 즐겨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범죄를 한 다음에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그는 틀림없이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한 속죄제도 드리고, 자기를 헌신하는 번제도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의 마음이 자유로움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자기의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확신과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충만한 위로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놀랍고 아름답고 정교하게 드려지는 제사가 아니구나’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마음은 딱딱하기 그지없는데도, 예배드리는 것으로 위안삼고 헌금을 자신의 양심을 위로하는 수단으로 삼고 자기의 허한 심령을 달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섬기고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하는 그 일이 여러분들을 거룩하게 만들 수도 없고, 여러분들을 경건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 일이 아무리 하나님 가까이에서 행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 자체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형상을 본받아 지어져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부은바 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결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나 이런 일들을 통해서 영혼의 참된 위로와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이 다윗과 동행하실 때에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향하여 “너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하나님의 모든 도움이 너에게서 끊어졌다.”라고 말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음침한 골짜기를 홀로 걸어갈 때에도 그는 노래했습니다. 물과 불을 지나고 폭풍과 파도를 지날 때에도 그는 ‘비파야 깰지어다,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여호와를 찬양할 지어다’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어두운 골짜기에서 주의 지팡이를 보았고, 주의 막대기를 보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막대기로 울부짖는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대적들을 멸하시며 지팡이로 자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곳이 어디였습니까? 풀밭이었습니까? 아름다운 초원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습니다. 살 소망은 전부 그치고 살아갈 실낱같은 희망도 없는 절망의 골짜기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그와 동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아니라 보좌 위에, 하나님의 택하신 나라의 왕으로 앉아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그를 떠받들고 있고 보살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고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는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러나 이 사람은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깃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것은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선행도 아니었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어떤 것도 그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여기에서 깨달은 결론은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소가 없었습니까? 양이 없었습니까? 염소가 없었습니까?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이라도 그는 얼마든지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번제는 무엇을 상징했습니까?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완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가 번제였습니다. 주님은 그 번제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오고 성막이 쳐지고 나라가 서게 되고, 다윗은 수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진심으로 나아가 온 백성의 죄의 용서함을 구하며 드리는 제사에 참여하고, 그리고 매일 같이 번제로 드리면서 “나와 내 모든 조국은 주님의 것이옵나이다. 마음대로 쓰시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며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제사하며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응답해 주셨던 음성이 시편의 여러 군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III.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

다윗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원하시는 것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번제가 상한 심령이라” 상한 심령, 이것을 주께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죄악의 덩어리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와 같이 된 채로 한 마리의 염소를 끌고 가고, 소를 끌고 가서 불태우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나를 받으신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인생을 산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만물의 찌끼와 같이 불행한 자인 것입니다. 그 제물은 아무 힘도 없으며 그의 이웃도 구원할 수 없고 자신의 영혼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상한 심령은 세상의 일로 말미암아 상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상한 심령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상한 마음입니다. 내 마음을 위로하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이외에는 아무도, 또 아무 것도 들어올 수 없는 마음,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시면 나를 살리실 수 없고, 하나님이 아니시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소도 받지 아니하시고 양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 당신 앞에 드려지는 상한 심령, 하나님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 위로가 없고 하나님만이 나의 위로이시고 내 영혼의 참된 치료자이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마음, 주님이 나를 만져주시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마음,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상한 심령은 죽어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심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심령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를 원하는 심령입니다. ‘주님이여 내가 살기를 원하나이다.’ 절절히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음성만 들어도 하나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분께로부터 멀어진 자기 자신으로 인하여 애통하고 자기의 죄를 슬퍼하며 그분과 더 친밀해지고 더 친근해지기를 사모하는, 이러한 마음이 바로 상한 심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시인은 이것을 상상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범죄 속으로 들어가면서 깊이 깨닫게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무엇을 기뻐하시는 지를 보았던 것입니다. 번제가 아니요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상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구하지 않습니다. 고요한 예배당에 흐느끼며 부르짖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마음이 상한 사람입니다. 침묵 가운데 예배를 드리면서도 한 구석에 앉아서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소리는 내지 못해도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라고 울부짖고 흐느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열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상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상하여 가난하게 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리하여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당신은 누구이시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직접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바는 이것입니다. 주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단수입니다. 하나입니다. 주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수없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상한 심령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그 유일한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정성껏 예배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넘치도록 하나님 앞에 자기의 소중한 것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상한 심령이 될 때에 그 제물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제물이 된다고 다윗은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지갑 속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드러난 열심 속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방해하고 오히려 예배에 참석한 것이 여러분의 의무가 되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를 원하는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다면, 차라리 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몸이 여기에 와 있고 여러분이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깨뜨려지고 상한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상한 심령은 하나님 한 분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달으며,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고 주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는 비루한 인생인가 하는 것을, 그리고 주님은 거룩하시고 자신은 그 거룩함에 합당치 못한 낮고 천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심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는 자가 우는 자가 아니요, 탄식하는 자가 탄식하는 자가 아니고,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가 아니며, 신음하는 자가 신음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하면 강하고 담대하고 딱딱한 자가 되어서 도무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상한 심령으로 나아오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는 한없이 가난하고 한없이 연약하면서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그래서 ‘누가 나를 도와줄까!’ 하고 끊임없이 도움을 바라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마음을 다해 긍휼을 구하고 손을 벌리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부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록 인생의 시련의 폭풍을 지나고,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시련 속에 이를 깨물며 수없이 죽기를 다짐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인생의 최악의 환경을 지날지라도, 그 속에서 부르짖으며 안타깝게 외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도무지 그 분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라고 외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렇게 상하고 찢어지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다윗에게는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아갈 때 송사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시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내 입술을 열어주옵소서” 기도할 때 ‘네가 우리아를 기억하느냐? 너의 모함으로 말미암아 충성스럽게 싸우다가 네 부하들에 의해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그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기억하느냐? 휴가를 와서도 집에 들어가 잠을 자지 않던, 너를 위해 그토록 충성스러웠던 우리아를 누가 죽였느냐? 그 우리아의 아내는 어디에 있었느냐?’ 송사가 끊임없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순결하고 고결한 사람이었던 다윗이 얼마나 많은 양심의 송사를 받았겠으며, 그 심령으로 얼마나 고통하고 괴로워하였겠으며,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양심적인 사람이 되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를 바라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어떤 사실을 깨닫고 붙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이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이 세상에서 죄인 중에 괴수이며, 마땅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주님이 나에게 주셨던 놀라운 왕국의 언약과 놀라운 구원의 모든 언약을 앗아가시고 나를 사자들이 부르짖는 사망의 골짜기에 던져 주심이 마땅하고, 내 영혼을 음부로 내리심이 마땅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자를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영적인 모든 곤고함과 삶의 실패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참된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여기에서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아니하신다’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만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건만을 생각하면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 안 되고,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도 안 되고, 이미 나의 죄는 정해졌고 나는 심판밖에 없다.’라면서 포기를 했다면 다윗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신앙적인 모든 곤고함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것이 놀라운 진리가 되어서 다윗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시면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때 “네가 무엇을 했느냐?” 그렇게 묻지 않으시는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아담을 보십시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를 했는데 하나님은 “아담아 선악과를 따먹었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범죄한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도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돌아오는 자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입니다. 하나님 한분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며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을 멀리했으며 나 스스로 높은 담을 쌓아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라고 하는 깊은 참회, 깊은 회개 이것을 통해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IV. 더 값진 예물이 지금 있습니까?

그러면 왜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곤고하게 살아가면서도 이렇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와 주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사로 몸과 마음을 다 드리는 일이, 일생에 몇 번밖에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마음과 영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마음이 있는데 마음은 실체가 아닙니다. 마음은 영혼과 육체에 닿을 수 있는 하나의 기능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마음도 없어집니다. 육체는 땅에 묻히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가게 되고 마음은 남아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만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라는 기능이 생겨납니다. 주님을 거절할 때도 마음으로부터 육체로, 마음으로부터 영혼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몹시 상하는 일이 있으면 맥박이 올라가고 숨이 가빠지는 육체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계속되면 얼굴의 혈색이 나빠지고 그것이 계속되면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이것들의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통하여 영혼에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영혼을 하나님께 돌이키라’,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마음을 물 쏟듯 하여라(애 2:19),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신 10:16),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욜 2:13)”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하나님만 오셔서 두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도 와서 두드리고 사단도 와서 두드립니다. 무엇을 향해서 청종하는 마음이 되어 그 마음을 열 것인가, 그것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자기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영혼은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범죄하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영혼은 우리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한없는 탄식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그리워하며 그 분의 얼굴빛을 자신의 영혼에 비춰주시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있어서 영혼의 그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자꾸 세상에 있는 것들과 물질 등에 빼앗김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진정한 고통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복되고 굳어짐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상한 마음, 가난한 마음을 드리지 못하고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시인이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시 108:1) 하나님 앞에 마음을 굳게 정하고, 우리의 마음의 깊은 문제들을 치유하고 고치시는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 우리의 인생의 문제와 영혼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자 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만 고정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주일을 꼬박꼬박 지키고 말씀과 기도 속에 억지로라도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의를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가난한 심령이 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영혼 속에 부르짖는 하나님을 향한 외침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곤고하고, 우리가 스스로는 자신 있게 잘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앞에 얼마나 멀리 떠나있으며, 그리하여 사실은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많은 시련 속에서 신음하고 고통하며 만족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말씀이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 일어서서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다윗이 깨달았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않으신다’는 믿음의 진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이것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V. 결론과 적용

마음이 하나님 앞에 놀랍게 변화되어서 주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드리는 찬양은 천사들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입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악기도 그와 같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주님 앞에 드리는 이 헌신이, 그렇게 드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커다란 힘과 위로를 주는지 모릅니다. 지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이렇게 모여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의 은혜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어 한없이 감사하게 됩니다.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하늘을 여시고 하늘로부터 우리에게는 없는 신령한 힘을 공급하셔서 어두운 세상을 찬란한 불꽃으로 사는 성도들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 춥고 추워서 모두 얼어붙은 사람들만이 살아가는 이 거리를 활활 타오르는 횃불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번제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께로 먼저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제물보다 하나님의 사죄와 은총, 그리고 사랑을 갈망하는 진실한 심령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갈망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였던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고 상한 심령으로 바친 제사가 하나님께서 흠향(歆饗)하셨던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한 순간 죄를 범하였지만 참회를 통해 더욱 순결해졌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더 귀하고 값진 예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 희망도 없고 하나님이 아니면 도울 자도 없다고 하는, 비참한 한 죄인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순간순간마다 이 값진 예물을 드려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로 드려질 수 있도록 간절히 구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이 음성을 기억하시고 말입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잠 23:26)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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