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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인생을 변화 시킵니다 (고전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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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인생을 변화 시킵니다 (고전 13:1~7)

  오래전에 읽은 책이 기억이 납니다. 어떤 부부가 외식을 했습니다. 외식을 하고는 집에 들어왔는데 마침 식당에서 커피를 못 먹었습니다. 부인이 커피한 잔을 마시고 싶어서 남편에게 “여보, 식사도 했는데 커피 한잔 합시다.” 남편은 커피를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음... 나는 안 먹을래요. 잠도 안 오고 배도 부르고 난 커피 싫으니 당신 혼자 먹어요.” 부인이 “아이고, 같이 식사도 했는데 커피도 같이 한잔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이 왜 자꾸 귀찮게 해요. 커피 먹는 것 가지고” 했더니 부인이 화를 냈습니다. “진짜 커피 한잔 먹는 것 가지고 뭐 그렇게 재느냐고 한잔 먹으면 되는 거지!” 그랬습니다. 남편이 “뭐 커피 먹는 것 가지고 그러냐고! 커피 먹을 자유도 없느냐!” 이렇게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작은 얘긴데 작은 싸움이 큰 싸움이 됐습니다. 부인이 나중에 흥분 하니까 부엌에서 큰 식칼을 가지고 남편을 죽였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아! 부인이 커피를 먹자고 하면 열 잔도 먹어야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커피한 잔이 큰 불상사로 발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부부의 이야기는 감동이 됩니다. 남편이 화물차를 모는 트레일러 기사인데 부산에서 서울을 늘 오고 다니는데 화물차는 저녁에 출발해서 새벽에 서울에 도착합니다. 근데 언제부터인가 남편이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간과 콩팥이 안 좋아서 피를 잘 걸러내지 못하는 심부전증이 생긴 것입니다. 글쎄 일주일에 몇 번씩 투석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생활도 안 되고 힘도 잘 못쓰니 운전 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걸 안타깝게 여긴 아내가 자기 화물, 대형차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운전하다가 힘들면 남편은 옆에 누우라고 하고 자기가 대신 운전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 부부가 얼마나 사랑이 넘치는지 운전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지나간 얘기도 하고, 늘 행복이 넘쳤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어느 부부에게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사랑은 힘들고 어려운 환경도 극복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할 수 만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사랑이 변질되기 때문에 처음 부부처럼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살다보면 그 사랑이 서서히 변질되어집니다. 사랑 때문에 사는 것인지 부부니까 사는 것인지 우리는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자녀를 처음 낳았을 때, 이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지 않습니까?

큰 허물이 안 되니까 이야기 하겠습니다. 심방하다 보니까 어떤 분이 좀 불만 이예요. 아들하고 며느리하고 같이 사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직장에 갔다 오면 손자만 좋아한다는 계예요. 아이를 보고서는 “아이구! 우리 새끼” 하면서 그 동안 애쓰고 수고한 어머니한테는 인사할 겨를도 없이 자기 새끼들만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권사님은 그것이 마음이 아프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최고 인가 봅니다.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웁니다. 자, 그런데 어떻습니까? 아이들이 성장하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들어 갈 때면 부모들이 사랑이 좀 변하는 것 같습니다. 성적이 좀 떨어지면 꾸지람 하고 역정을 내고 머리에 꿀밤을 때리기도 하고 그러면서 “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성적이 떨어졌다고 때리고 꾸지람 하는 걸까요? 아니면 부모가 창피해서 그러는 걸까요? 자기만족 때문에 그러는 걸까요? 우리는 한번 생각 해봐야 합니다. 정말 부모의 사랑은 순수한가? 하는 것을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를 일생동안 섬기다가 떠나시는 목회자 분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원로목사님, 은퇴목사님 이렇게 부르는데, 종종 교회에서 은퇴하신 목사님들이 그 교회에 출석하셔서 이 후배 목사에게 바통을 넘겨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통 교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뒤에 사람에게 바통을 넘겨주어야 뒤에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달리는 것 아닙니까? 바통을 완전히 못 넘겨주고 반을 잡고 계십니다. 왜 못 놔주나? 못 믿어서 그렇습니다. “일생을 내가 이 교회를 세워왔는데, 교회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못 믿어서 바통을 놔주지 못해 교회가 담임목사와 원로목사 사이에 갈등이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는 이교회 못 넘겨주겠다. 자식한테 넘겨주어야겠다.” 하고 세습하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꼭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생을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것은 아름답지만은 교회를 내 기업처럼 남에게 넘겨주기 아까워서 나의 자녀에게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려 한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목회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목회하고, 후배 목사에게 넘겨주면 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은 누가 책임입니까?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교회는 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니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많은 목사님들이 그것을 못합니다. 그래서 늘 그 갈등 속에서 삽니다. 안타깝습니다. 임무가 끝나면 조용히 묵묵히 물러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또 어떤 부부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구속하는 경우도 있어요.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고 그저 “어디 갔느냐? 돈을 어디다 썼느냐?” 자꾸 간섭합니다. 그 아내가 힘듭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구속하고 멍에를 매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자유하게 하는 것이지 상대를 얽어매고 숨 막히게 하고 구속하는 것이 결코 사랑은 아닙니다. 우린 역사 속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폭행을 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행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사랑을 가리켜서 가장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믿음도 패하고 방언도 패하지만은 사랑은 영원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만큼 위대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뭐라고 말합니까? 사람이 방언을 말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소리 나는 구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소리 나는 꽹과리, 구리는 이교도 예배에서 행해지는 습관입니다. 사랑이 없는 방언 사랑이 없는 천사의 말 그것은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모든 세상의 지식과 비밀을 아는 예언의 능력이 있어도, 앞의 일을 미리 투시하는 능력이 있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내 재산을 다 팔아서 남을 구제할지라도, 아니 내 몸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구제도 귀하고, 충성도 귀하고, 봉사도 귀하지만은 그 동기가 사랑이 되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기과시, 자기자랑, 자기교만, 자기만족, 자기업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의 동기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내 제자인줄 알 것이다.” 본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할 때, “아! 저들은 그리스도인이구나!”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돌아가셨지만 유명한 기독교 학자 중에 “프란시스 쉐이프”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한 표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마에 십자가를 붙이고 다닌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식, 심볼, 뺏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말을 누가 믿겠느냐 라고 의문하고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표현은 헬라어로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에로스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은 이성간에 성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필리아다” 그러면 이것은 친구간의 우정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또 ‘스토르게’라고 하는 사랑은 가족 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피 흘리신 그 사랑입니다. 희생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에게 그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때 아가페 사랑을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때에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13장은 우리가 사랑장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몇 가지 성격, 대표적 성격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4-7절에서는 15가지 사랑의 속성이 소개됩니다. 다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 그 중 대표할 만한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것입니다. 따라해 봅시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무던히 참아주는 겁니다. 오늘 성경말씀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됩니다.

오늘 7절에도 보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 했습니다. 참음에 대한 말이 제일 많습니다. 역시 사랑의 우선순위의 속성은 참는 것입니다. 못마땅해도 참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녀가 좀 못마땅해도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왜? 그가 변화될 줄 알기 때문에 그를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조금만 못마땅해서 화내고 분노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또 껄끄러운 사람, 또 불편한 사람, 뭔가 내게 미움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오래 기다리고 참아줄 수 있는 것 이것이야 말로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대감을 가지고 참는 것입니다. 변화될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옆에 분들한테 한번 이야기해주십시오. ‘사랑은 참는 거랍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남편에 대해서도 기다려 줄줄 아는 마음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지금은 내 아내가 좀 못 마땅해도 앞으로 좋은 아내가 될 줄 알고 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지금 내 남편이 좀 못 마땅해도 앞으로 좋은 남편 될 줄 알고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제 고향 강원도 평창에 가면 약수란 마을이 영월서 평창 들어가다 보면 있는데 가나안 농장이라고 조그마한 농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농장 입구에 바윗돌을 하나 세워 놨는데 거기 전에 계시던 목사님이 그런 걸 새겨 놓았어요. “그것 까지 참으라.” 그랬습니다. 그것까지 참으라. 참고, 참고 또 참았는데 마지막 그것까지 참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죠지 애틀리’라고 하는 젊은 선교사님이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이 선교하다가 원주민에 의해서 그만 살해당하고 맙니다. 창과 몽둥이로 살해당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나중에 다른 분들이 가서 시신을 수습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조지 선교사님은 영국제 아주 좋은 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총에는 10발의 총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맞아 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방아쇠를 당기면 총을 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몽둥이에 맞아 죽었습니다. 왜 죽었을까요? 간단합니다. 만약 방아쇠를 당겼다면 이 지역에서 선교는 끝이납니다. ‘선교사는 총 가지고 사람 죽이는 놈이다.’ 이렇게 하면 선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희생의 밀알이 되길 원한 것입니다. 그가 맞아 죽은 이후에 총을 가지고 있던 사실이 발견되었을 때 그 원주민들 마음에 충격을 받습니다. 감동을 받습니다. “아!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결국 그 들이 마음을 열고 동네 원주민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참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를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생활에서 정말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잘 참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 째로 이 사랑의 속성들을 종합해 보면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다.”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따라해 보세요.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상대의 부족한 점을 덮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보니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덮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허물을 끄집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제가 언젠가 꼬마 신랑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납니다. 오래된 이야기 같은데 예전에 조그만 꼬마신랑이 새 색시를 얻었습니다. 이 꼬마 신랑의 나이는 10살이 채 안되고 이 색시는 나이가 19살 즘 됩니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죠. 자 그런데 이 꼬마 신랑이 늘 색시한테 조르는 것입니다. 누룽지를 달라. 엿을 사다 달라. 보채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주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닙니다. 치마 자락 붙들고 조르는 것입니다. 일해야 하는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는 시부모님이 시장가셨습니다. 집에 아무도 없어서 “야! 오늘은 이 꼬마 신랑 버릇을 고쳐놔야 되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곤 데려다 세워놓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니 덜렁 들어다가 지붕위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러자 꼬마 신랑이 초가집에 지붕에 뚝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섭다고 그냥 울고불고 하는 것입니다. 내려달라고 “색시야 내가 잘못 했으니까 내려죠.”하는 것입니다. “아니야 좀 더 있어 봐야해.”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아니 근데 웬걸요. 시장 갔던 시부모님들이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싸리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지붕위에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야! 이놈아 너 거기 왜 올라가 있어.” 자 이제 큰일 났습니다. 긴장했습니다. 이제 꼬마 신랑이 한 마디만 뻥끗 하면 이 색시는 끝장나는 것입니다.  “색시가 나를 들어 던졌다.”하면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물을 쓱쓱 닦더니 꼬마 신랑이 능청을 떨기를 “색시야 큰 호박 딸까? 작은 호박 딸까?”그러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야 이놈아 빨리 큰 것 따서 내려와라.” 그래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합니다. 밤에 자는데 이 꼬마 신랑이 의젓하게 한마디 했습니다. “색시야. 오늘 내가 입만 뻥긋했으면 죽을 뻔했지?” 색시는 그게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 때부터 이 꼬마신랑을 사랑으로 잘 섬겼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입니까?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는 것입니다. 내 허물을 들춰내지 않고 덮어주는 그 꼬마 신랑이 너무 대견스럽고 너무 고마워서 그런 것 입니다. 사랑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결혼을 했는데 이 아내에게 늘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젊을 때 너무 부쩍 어려운 일을 해서 그런지 머리가 자꾸 빠지고, 눈썹이 다 빠졌습니다. 눈썹이 없는 여자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이 아내는 늘 화장할 때 마다 눈썹을 진하게 칠하곤 했습니다.
남편은 아는지 모르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남편이 직장에 나가다가 퇴직해서 할 일이 없어 둘이서 연탄을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 한번은 무더운 여름날 연탄을 밀고 언덕을 올라가는데 왜 그렇게 더운지 거기에 바람이 불어서 연탄제가 아내의 얼굴에 묻었습니다. 그러니까 눈도 뜰 수가 없었습니다. 리어커를 세워 놓고 “여보 좀 쉬어, 내가 닦아 줄게” 하면서, 아내의 얼굴의 연탄재를 닦아주는데, 그 눈썹 부분은 교모하게 피해가면서 다른 부분을 다 닦아 주었다고 합니다. 아내는 속으로 아직 말을 안했지만 우리 남편이 알까 모를까 두근두근하고 있는데, 괜히 눈썹 쪽을 닦았다가는 눈물과 땀 때문에 눈썹이 잘라져 나갈 까봐 걱정했는데, 남편은 아내의 눈썹을 피해서 닦아주었습니다. 아내는 깨달았습니다. “아! 우리 남편이 알고 있구나! 내가 눈썹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그러나 우리 남편이 내가 민망할 까봐 감춰주고 있는 그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 마음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이와 같은 거예요. 허물을 덮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허물을 들춰내고, 동네방네 소문을 낸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상처를 싸매주는 것입니다. 아픈 상처를 자꾸 건드리면 안 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가서 “내가 너 그렇게 하는 것 보니 그럴 줄 알았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잘했든, 잘못했든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위로의 말이 필요합니다. 격려의 말이 필요합니다. 따듯한 말 한마디가 그 에게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외국에 수지라는 한 아이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어느 날 샌드위치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습니다. “엄마 그거 왜 만드는 거야?” 엄마가 대답했습니다. “옆집에 스미스 부인이 있는데 그 남편이 얼마 전 돌아가셨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니? 스미스 부인이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그 마음을 좀 위로해 주려고, 상처를 좀 위로해 주고 싶어서 샌드위치를 맛있게 만들고 있는 거야” 수지는 엄마가 요리하는 틈에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일회용 반창고 하나를 들고 옆집 아줌마를 찾아갔습니다. “아줌마,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요. 아줌마! 마음이 너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줌마 얼마나 힘드세요? 저도 상처가 나서 피가 났을 때 이 반창고를 바르면 낫거든요. 아줌마 마음의 상처에 이 반창고 얼른 붙이시고 빨리 나으세요.” 일회용 반창고를 스미스 아줌마에게 선물했습니다. 그 아줌마는 괴로운 마음 중에 있다가 수지의 말을 듣고 너무 감격했습니다. 수지가 준 일회용 반창고를 병속에 넣어두고 쳐다볼 때 마다 큰 위로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상대방의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배려하고 내가 그를 도와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에는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상처를 받아도 주인이 사랑을 줄 때 강아지도 빨리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란 진정한 배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 모든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지난 번 버지니아 공과대학에서 조승희라는 한국 청년이 총기로 세계적인 물의를 일으킨 적 있었습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한 추모식에 많은 사람들이 글을 남겼는데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조승희에게 미안하다, 조승희. 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다. 네가 그렇게 고독해하고 외로워하는지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해서 너를 위로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라는 추모사가 남겨져 있었답니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해서 우린 때로는 분노가 쌓이고, 원망이 쌓이고, 찌르는 창처럼 남을 찌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어릴 때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분들이 남을 잘 공격한다고 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 남을 공격하는 것으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사랑이 부족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을 주고, 사랑 받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교회란 사랑의 공동체가 아닙니까 ? 교회에서 사랑이란 말을 빼면 시체입니다. 교회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곳입니다. 서로를 싸매어 주고, 서로를 격려해 주고, 서로를 위로해 주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랑 받으면 달라집니다. 집에 있는 강아지도 사랑해주고, 예뻐해 주면 주인을 잘 따릅니다. 그러나 발로 걷어차고 미워하면 주인을 향해서 짖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람이 변합니다.
 
  미국에 가필드 고등학교라고 있는데 그 학교에 유명한 학생이 두 명 있다고 합니다. 조니라는 학생인데, 이름이 똑같습니다. 한 아이는 모범생으로 유명하고, 한 아이는 불량학생으로 유명합니다. 선생님이 일 년에 한 번씩 부모들을 모셔서 상담을 하는데, 조니의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착각을 했습니다. 불량학생 조니의 어머니를 모범생 조니의 어머니인줄 알았습니다. “아이고, 조니는 너무 착하고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격이 참 좋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입니다.” 하고 칭찬을 해 줬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어머니는 불량학생 조니의 어머니였습니다. 그 어머니가 아들에 대한 칭찬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우리 아들이 이렇게 선생님의 칭찬을 받는 아이가 되었다니.’ 집에 들어가서 자기 아들 조니를 앉혀놓고 칭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야! 네가 선생님한테 이렇게 인정 받다니, 엄마는 오늘 너무 대견스럽더라, 너무 자랑스럽더라.” 하면서 조니를 칭찬하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조니는 다음날 선생님을 찾아와서 “선생님, 저는 선생님에게 참 못 되게 굴었는데, 저를 그렇게 사랑해주시고 인정해 주시니, 제가 이제 앞으로 좋은 학생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불량학생 조니가 그 때부터 모범생이 되어갔습니다. 성실한 학생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해줄 때, 그는 변화됩니다. 그게 바로 사랑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 우리가 변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변하고 성품이 변하고 삶이 변합니다. 왜?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지만, 테레사수녀에게 한 아가씨가 와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수녀님, 저 살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어요.” 그러자 테레사수녀가 말합니다. “내가 지금 너무 바쁘니까 3개월만 나를 도와주고 그 다음에 죽어도 늦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아가씨는 테레사를 열심히 도와줬습니다. 병든 사람들의 고름을 짜주고, 상처를 싸매어주고, 청소를 해주고, 상담을 해주고. 3개월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죽고 싶으세요?” “아니! 수녀님 죽기는 왜 죽어요. 너무 세상이 살맛나는데.” 남을 위해 봉사할 때, 사랑을 베풀 때, 사람은 의욕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치 있는 일을 할 때, 사람은 삶의 존재의미를 느끼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이것이 인생을 변화시키는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정말 사랑할 능력이 내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오늘 이 4절~5절 말씀에다가 제 이름을 넣어서 한번 대비를 시켜봤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대신 제 이름을 넣어봤습니다. “이영무는 오래참고, 이영무는 온유하며, 이영무는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이영무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이영무는 교만하지 아니하며, 이영무는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이영무는 자기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이영무는 성내지 아니하며.” 읽어보니 별로 어울리지 않더라고요, 왜냐구요? 제가 성을 잘 내기 때문입니다. 제가 때론 온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 못 참습니다.

  여러분은 저보다는 좀 낫지 않으시겠어요? 여러분 이름을 넣어가지고 한번 읽어보십니다. 4절만 합니다. 자기 이름을 앞에 넣어 봅시다. “OOO는 오래참고 OOO는 온유하며, OOO는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OOO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OOO는 교만하지 아니하며”  여러분, 자기의 이름을 넣어서 읽으니까 어울립니까?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랑’하고 너무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기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성내지 아니하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자. 그런데 여기에다가 예수님의 이름을 넣어서 읽으면 어떨까요? “예수님는 오래참고 예수님는 온유하며, 예수님는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예수님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예수님는 교만하지 아니하며” 어때요? 어울립니까? 안 어울립니까? 좀 어울리지요? 역시 예수님은 어울리시는 거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능력이 부족해요. 그렇다고 우리는 사랑할 수 없을까요? 아닙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을 부어주신다고 하셨어요. 로마서 5잘 5절에 보니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마음에 부음바됨이니”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것부터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은사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첫 번째가 사랑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여러분 성령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랑할 능력이 없어!’ 그렇게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시고 가장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이렇게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의 발을 씻어주는 것 같은 작은 일들이 바로 사랑을 완성시켜 가는 것입니다. 요한1서 3장 18절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했습니다. 순수한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가장 작은 사랑부터 실천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이 사랑의 실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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