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섬김과 신뢰 (창 18:1-15)

  • 잡초 잡초
  • 406
  • 0

첨부 1


섬김과 신뢰 (창 18:1-15) 

창세기 18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실 것과 소돔 고모라를 심판하실 것을 알려주신 사건입니다. 오늘은 전반부 말씀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섬김과 신뢰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섬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1-8). 여호와께서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섬길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을 섬기는 것을 “은혜”로 여기고, “급히” 장막에 들어가서 사라에게 “속히” 떡을 만들라고 지시하고,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하인에게 주며 “급히” 요리하게 했습니다. 손님들이 나무아래서 드시는 동안은 서서 시중들었습니다. 고객 감동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최상의 서비스였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는 히브리서 말씀은 이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근동지역이 손님 대접을 큰 미덕으로 여기긴 했지만, 아브람의 행동은 풍속을 넘어서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후덕한 주인이 나그네를 대접한다기보다는 주인을 섬기는 종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그네로 여겼다가 점점 손님들의 범상치 않음을 감지했다고 봐야겠지요. 14절에서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밝혔음에도 아브라함이 놀라지 않은 것을 보면 이미 눈치 챘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조차 알아차릴만한 영적인 눈이 있었으며, 그분의 존엄에 합당하게 대우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섬김은 지나가는 나그네라 할지라도 박대하지 않고 풍성히 섬기는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참으로 존중 할 자를 알아보고 그들의 필요를 구체적이고도 열정적으로 섬긴 아브라함과 같은 태도가 꼭 필요할 것입니다. 진주를 던져줘도 그 가치를 모르는 개와 돼지에게는 밥찌끼가 적당한 섬김이겠지요. 하지만 진리를 사랑하며, 이 세상에 속한 것들보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큰 공경과 섬김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야 거룩하고 참된 교회가 이 땅에 든든히 서갈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교회를 통해 친목회나 사회복지단체와는 분명하게 구별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바르게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존중할 것을 존중하고 참으로 멸시해야 할 것을 멸시할 수 있는 분별력과 구체적인 섬김이 없다면, 그런 공동체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신뢰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의 섬김을 받으시던 여호와께서는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니라”(10b)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장막 문에서 이 말을 들은 사라가 속으로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12)했습니다. 남편이 늙었고 자신의 경수가 끊어졌다는 생리적 현상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녀에 대한 기대를 버렸음을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11). 자연의 법칙은 분명 하나님께서 만드신 뜻입니다. 하지만 그 ‘자연법칙에 하나님께서도 제한받으시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신론)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사라에게는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는 특별 계시가 명확하게 주어졌으므로, 자연법칙에 위배된다고 해서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명백한 불신입니다.

속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여호와께서는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3b-14)하시며 이 특별한 계시가 하나님의 뜻임을 확고히 하셨습니다. 17:21절에서 내년 이맘 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잉태기간 10개월을 제외한다면 이 말씀을 하신 때는 길게 잡아도 두 달 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불신한 사람은 사라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사실을 지적하셨을까요?

그 동안 아브라함은 온 집안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시행하느라 바쁜 시간들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도록 돕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속으로 웃으며 믿지 않는 일이 아내에게도 똑같이 발생했습니다(17:17). 사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배우자나 자녀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계시를 깨닫고 신뢰하게 된 사람은 그만한 책임감을 가져야 함을 지적합니다. 종교적인 활동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돕는 일임을 가르쳐 줍니다.

아브라함이 아무 말 못하고 입 다물고 있는 동안, 사라는 웃지 않았다고 변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비웃은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겠지요. 다만 말씀과 동떨어진 무능해진 자신의 모습 때문에 웃음이 나왔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5)하시며, 어쨌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에서 나온 웃음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사라에게 있어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매우 당황했을 사라의 모습이 쉽게 연상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당황하기까지 사라를 추궁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이 있었고 그 성취의 기한이 임박해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사라는 아직도 하나님을 자연의 법칙은 넘어서지 못하는 분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먹어가는 만큼 믿음은 점점 까먹어가고 있었습니다. 입술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몸으로는 이름을 고치고 할례를 행하는 등의 일에 순응하면서도, 마음은 그 약속하신 말씀에서 멀어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저 귀에 듣기 좋은 소리일 뿐이고, 실제적 삶에 있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이처럼 믿음이 없는 상태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그녀가 믿음을 가지도록 강력하게 도우셨습니다.

그 결과가 사라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는 히브리서 11:11절이 증언합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헬라어 성경으로는 사라가 ‘잉태하는 힘을 믿음으로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사라는 잉태할 힘이 없는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은혜로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받았는데, 믿음은 그 힘을 받을 수 있는 통로였습니다. 이때 사라가 믿고 붙잡은 것은 ‘늙었지만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약속하신 분이 믿을 만 하신 분’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17장의 계시가 아브라함의 신앙을 견고하게 했던 것처럼, 18장 전반부의 계시는 사라의 신앙을 견고하게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믿음의 의미는 자주 처세술에서 말하는 ‘신념’처럼 곡해되었습니다. 정통신앙은 언제나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예수님 자체’에 초점을 둡니다. 따라서 믿음 역시 말해진 ‘어떤 내용’보다는 말씀하시는 ‘어떤 인격’에 대한 태도와 관련 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사상에 대한 신념’이라기보다 ‘어떤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 신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이면 일점일획도 진리라고 인정합니다. ‘그분’의 말씀이기에 그 내용이 무엇이든 순종의 태도를 취합니다. 신뢰하는 분의 말씀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내 스스로가 말씀을 붙들고 믿어보겠다고 용쓰는 것이 아닙니다.

사라 역시 자녀와 관련된 약속의 말씀을 믿어보려고 무진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부르심 받은 후 24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응답받을 수 있다는 신념은 점점 흐려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 말씀해주셔도 속으로 웃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신앙이 더 좋아져야 하는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라에게는 뭔가 신앙의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잘못 놓인 신앙의 초점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갖가지 형식과 제도적 방법의 종교적 활동에 기초한 신앙으로부터 하나님 자체를 신뢰하는 신앙으로의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실제적으로는 믿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객관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주관적으로도 전능한 분이심을 생생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신앙이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님의 백성들이 매 순간 삶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며, 머리카락 한 올의 나고 빠지는 것 까지도 관여하고 계심을 생생하게 신뢰하는 상태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되 내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앙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사라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간절히 기도해온 기도제목이 응답되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속의 믿음이 떨어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목적부터 바로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행복한 노후를 보장받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나의 꿈과 행복을 위한 종교 활동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피해가면서 내 힘과 지혜로 꿈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에, 능력과 지혜의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솟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구원하신 목적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인정하고, 내 꿈이 아니라 그분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뜻이라면 결국은 이루어 질 것임을 알기에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걷는 이 길이 굽어 도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 길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가장 선한 길임을 신뢰할 수 있게 되고 어떤 길로 인도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생을 올인(all-in)하든지 자신이 책임지고 인생을 꾸려가든지 두 가지 중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성도란 하나님께 전부를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