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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주시는 하나님 (히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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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주시는 하나님 (히 11:1-6)

우리 교회 이름은 높은 뜻 숭의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중히 여기는 개념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교회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에 있습니다. 많은 교회와 교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에 있습니다. 더 솔직히 정확한 표현으로 말씀 드리자면 자신의 욕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과 욕심을 이루려고 예수를 믿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냥 기복신앙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밤낮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만 생각하며 자신의 뜻과 욕심만을 이루려고 예수를 믿는 것은 유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유치한 것으로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림만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저와 우리 교회에는 그와 같은 교만함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때문에 제 설교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와 어떻게 하면 그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복 받고 잘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설교는 거의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밤낮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만 생각하고 예수 믿는 유일한 목적이 그저 복 받고 잘 사는 것에 있는 것을 유치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얼마 전부터 나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무조건 유치하게 보는 것이 교만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전부가 복 받고 잘 사는 것이라면 물론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복 받고 잘 사는 것과 그것을 바라는 것을 무조건 유치하게 생각하고 부인하는 것 또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살고 복 받는 것을 유치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부요함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와 같은 것들을 죄악시하는 영지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무조건 가난하고 낮은 것을 훌륭한 것으로 보고, 높고 부한 것을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은 기독교의 바른 신학과 철학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가난하고 낮은 것을 무조건 못살고 실패한 것으로 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하고 낮은 것을 무조건 훌륭한 것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요즘 대형교회의 문제가 참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이렇게까지 욕을 얻어먹게 된 상당 부분의 이유가 대형교회들의 문제들 때문이라고 하여도 절대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형교회의 문제라는 말과 대형교회는 다 문제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대형교회에 문제가 많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해서 대형교회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대형교회의 문제’를 ‘대형교회는 문제’로 오해하게 되면 무조건 작은 교회가 훌륭한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조건 작은 교회 목사들은 다 훌륭한 목사가 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훌륭하지 못한 대형교회 목사들도 많이 있지만 훌륭하지 못한 작은 교회 목사들도 많습니다. 훌륭한 작은 교회 목사들도 많이 있지만, 훌륭한 큰 목사들도 생각 밖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작고 가난한 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크고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크고 부한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을 절대로 싫어하시지 않으십니다. 특별한 이유와 목적이 없다면 하나님은 가능한 한 우리가 부하고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건강하고 부요한 사람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시고 귀히 여기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적으로도 부요하고 크고 성공 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상은 영적인 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을 함께 포함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그렇다고해서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은 무조건 유치한 것이고 기복주의적인 것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 주시고 복 주시는 자 이심을 믿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상과 복만 바라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 없는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과 복에 관심도 가지지 아니하고, 그것을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 믿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시편 127편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지 않으시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우리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모든 수고가 다 헛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드리며 사는 일에 일등 가는 교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동시에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이 세상의 그 어느 교회 교인들보다도 더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으시는 교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복은 물론이고 세상적이고 육적인 복도 많이 받으시는 교인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저는 요즘 남산을 거의 매일 걷다시피하고 있습니다. 남산에 올라가면 절이 하나 있습니다. 운동을 하다보면 그 절 앞에서 사람들이 합장을 하고 허리를 숙여서 몇 번이고 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참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우상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며 복을 비는 모습이 어리석게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참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대상에게 절을 하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신앙심은 나보다 더 깊구나 하는 생각을 참으로 엉뚱하지만 하였습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께 저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저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저와 같은 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을 받으려면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기도하기를 원하시고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구하면 주시고 두드리면 열어주시고 찾으면 찾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복을 빌고 기도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을 유치하게 보는 것이 마치 성숙한 신앙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스스로 속는 일이고 속이는 일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복을 바라고 자신이 믿는 신께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 저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을 타지 않게 금욕하며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옷을 입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이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그 동안 지었던 모든 죄를 진심으로 하나님께 회개한 후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정말 부정을 타는 것과 같아서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기도할 때 정성껏 제물을 준비합니다. 가장 좋고 실한 것으로 정성껏 제물을 준비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물 한 그릇이라도 정성껏 떠 놓고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은 아벨이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예물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4절) 그것은 단순한 예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물에 대한 예배자의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물 한 그릇을 떠서 하나님께 드려도 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요즘 모두가 다 가인의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 요즘 아벨의 제물과 같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 예배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예수님이 칭찬하신 과부의 엽전 두 푼과 같은 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려 예배 하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요? 인색한 마음으로, 마음에 없는 것으로, 흠 없고 온전한 것이 아닌 귀 떨어지고 온전하지 못한 예물로 제사하는 가인과 같은 우리는 과연 아닐까요?

저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아니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이, 높고 고상한 신앙을 가졌다고 함부로 기복주의 신앙을 논하고 미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들이(저를 포함하여) 새삼스럽게 남산에 올라가 절간 문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정성껏 기도하는지, 남산 큰 바위 아래에서 대낮에도 촛불을 켜놓고 얼마나 정성껏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드리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엉뚱한 말씀이지만 저들에게서 예배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신도 아닌 우상 앞에서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데 우리는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얼마나 버릇없고, 정성 없이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를 한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신은 그냥 정성껏 제물을 준비하는 것과 부정 타지 않게 목욕재계하고 정말 정성껏 기도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우리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잘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절대로 우리 기독교를 좇아오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정성껏 제물을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미신에는 말씀에 순종하는 개념이 없거나 부족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이들 말로 정말 쌔고 쌘 것이 복 주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정작 그 말씀들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함으로 복 주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 이하에서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 창고에 들이면 하늘 문을 열고 땅에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 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잘 믿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보다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부터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도 이루지 못하고 약속하신 축복들도 받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에서 하나님이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한번 말씀하신 것인줄로 생각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과 복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수재헌금을 하였습니다. 부끄럽지만 거의 5천 명이나 출석하는 교회의 수재헌금이 1,400여만 원이었습니다. 몇 년 전 강원도에 큰 수해가 있었을 때, 우리 교회 주일 출석이 지금의 절반도 되지 않았을 때 우리들이 하였던 수재헌금은 6천 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헌금이 적다고 한 번 더 헌금을 하여 거의 일 억 원 가까운 헌금을 하였었습니다.

경기가 전보다 더 나빠졌을 수도 있고, 전에 비해 교회 안에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져서 헌금에 대한 부담이 많아져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감안해도 5천 명 출석 교인의 수재헌금이 1,400만 원 이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부를 잘하려면 성취동기가 높아야만 한답니다. 무엇을 이루고 성취하려고 하는 동기가 남보다 강한 사람이 공부를 잘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공부를 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 중에 성취동기가 낮고 약한 아이들이 많듯이 교인들 중에도 성취동기가 낮고 약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다니는 사람이 아마 제일 많을 것 같고, 괜히 교회 나오지 않고 무엇을 하면 벌이라도 받을 것 같아 액땜하듯 나오는 사람도 꽤 많을 것 같습니다. 이왕 교회에 나오고 예수를 믿을거면 한번 믿음의 진검승부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믿음에 욕심을 내어 남 보기에는 조금 유치한 것 같아 보이고 수준이 낮은 것 같아 보여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상과 복을 바라고 열심히 정성껏 예수를 믿는 것이 첫 번째로 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상과 복이 너무 커서 그것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상과 복도 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부터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겠다는 것은 너무 현실과 동 떨어진 생각 같아 보입니다.

며칠 전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기도하다가 문득 이런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하나님, 지나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평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의 또 다른 제 버전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제게 모든 면에서 너무 지나치십니다.

저의 사람됨과 제가 한 일에 비해 하나님이 주시는 상과 복은 언제나 지나치셨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고 상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66권에 얼마나 많은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약이 무엇입니까? 약속입니다.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무엇에 대한 약속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실 상과 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주시고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난 주 저와 여러분들이 수재 헌금을 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높은 뜻은 나중에 이루고 내가 주는 상과 복부터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거라.’고 말씀입니다.

지난 주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차를 몰고 사고를 위장한 자살을 하려고 하였던 분 하나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가 설교를 듣는 모든 분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설교도 많은 분들이 그냥 흘려보내실 겁니다. 그러나 몇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 중에 반드시 하나님의 상과 복을 넘치게 받아 다윗이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듯이, 부족한 제가 ‘하나님 지나치십니다.’라고 고백하였듯이 여러분들도 하나님께 대하여 그렇게 고백하시고 ‘여호와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가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하며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에 남은 생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 다 되시게 될 겁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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