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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냐? (출 3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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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가 하나님이냐? (출 32:7~14)

  고대 근동 지방에는 황소 숭배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애굽이 가장 대표적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살아 있는 황소를 신전에 모셔 놓고 숭배했는데 이 황소를 아피스라고 불렀습니다. 애굽인들이 얼마나 아피스를 숭배했는지 아피스가 죽으면 미이라로 만들어 지하 묘지에 안장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1851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마리에뜨가 싸카라 피라미드에서 황소 미이라들이 묻혀 있는 것을 발굴함으로써 증명되었습니다.

  이 황소 숭배가 이스라엘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출애굽 당시 시내 산 기슭에서였습니다. 거기서 아론은 백성들의 요구를 듣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아마 사백 년 이상 계속된 노예 생활을 통해서 몸에 밴 애굽의 문화 탓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황소 숭배는 주전 920년 경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는 새로 세운 나라의 종교적 상징으로 두 개의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단에, 다른 하나는 벧엘에 세웠습니다. 그가 금송아지를 섬기게 된 배경에도 역시 애굽의 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일찍이 그는 솔로몬 왕의 박해를 피해 애굽에 망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때 거기서 황소 숭배 사상을 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세우자마자 그는 남왕국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에 맞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 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들에서 금송아지가 숭배되었던 것을 볼 때 금송아지 숭배는 예루살렘 성전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에 맞서기 위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교활한 정책에서 비롯된 종교 전통이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사상의 충돌이 이어진 역사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니 이스라엘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 자체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이 둘 사이의 긴장과 대립, 그리고 그에 따른 선택이 요구되는 현장에 서 있다고 말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냐?” 그 대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금송아지가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손은 금송아지를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 때 더욱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이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이파크나 타워팰리스 같은 호화 주택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나도 모르게 부러운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좋은 차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재물이 단순히 재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재물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서 별 볼일 있는 사람과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나누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재물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물론 누구나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실제 삶 속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돈으로 우리의 겉모양을 꾸밀 수는 있지만 삶의 질 자체를 결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백만 원짜리 옷을 입고 백만 원짜리 시계를 차서 좀 돋보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에 이백만 원의 가치가 더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까지 살 수는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돈으로 죽음을 조금 뒤로 미룰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아주 면할 수는 결코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라고 대답할 사람은 적어도 우리 중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도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하반절) 그러나 실제 삶 속에서 이 분명한 사실이 그저 이론과 구호에 그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은 것도 사실 아닙니까? 물론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흔히 뉴스에서 보는 것처럼 더럽고 추악한 방법으로 재물을 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적당히 타협하고 눈을 감아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교회 예산이 좀 많아서 건물도 짓고 선교비도 좀 풍족하게 쓰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척척 도와 주기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하기 전에 돈부터 계산합니다. 물론 세상에 살면서 돈하고 아주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아직도 돈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돈에 대한 노예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분명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돈에 대한 노예 근성이 바로 오늘의 금송아지 숭배 사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방영된 미국 흑인 노예들의 고난을 그린 “뿌리”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매우 감동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쿤타 킨테라는 아프리카 흑인이 주인공입니다. 그가 어느 날 산에 갔다가 노예 사냥꾼들에게 붙잡혀 미국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비참한 노예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고난이 닥쳐도 그는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자유로운 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래서 도망쳤다가 붙잡혀 발가락을 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쿤타 킨테와는 달리 어떤 흑인들은 노예의 신분이지만 미국의 편리한 문명 생활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먹고 자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딸 퀴즈에게도 어릴 때부터 그 자유에 대한 정신을 심어 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 퀴즈가 다른 농장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는 농장 주인에게 몸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네가 내 몸은 빼앗지만 내 마음까지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아버지 쿤타 킨테가 자기에게 심어 준 자유에 대한 정신을 잠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둘이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였고 그리고 건강하고 믿음직한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일 주일의 교제 끝에 그녀는 그 결혼을 포기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 남자는 모든 면에서 훌륭했지만 그러나 마음까지 완전히 노예 근성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노예일지라도 마음만은 자유로워야 하고 이상과 꿈을 가져야 하는데 그 남자는 그저 먹고 사는 것에만 매여 있는 말 그대로 구제 불능의 노예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어렵고 또 불행한 처지에 있을지라도 마음만은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노예들이 있습니다. 일의 노예가 있습니다. 돈의 노예가 있습니다. 술의 노예가 있습니다. 사치와 허영의 노예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자유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정말로 불쌍하기 짝이 없다는 말입니다.

  일은 귀한 것입니다. 돈도 그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술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삶의 활기를 불어 넣어 주기도 합니다. 낚시나 골프와 같은 오락도 마찬가집니다. 삶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우리가 그런 것들의 노예가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절대로 그런 것들에 묶이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까지 묶이게 될 것 같으면 그 결과는 비참할 뿐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는 것은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재물은 소중합니다.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습니다. 재물을 정당하게 많이 갖는 것은 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물이 하나님보다 위에 있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본래 지으심을 받은 대로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 땀 흘려 수고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재물에 묶여 있을 것 같으면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자유인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입니다. 절대로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비록 굶는 한이 있어도 자유인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때문에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대답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연 금송아지가 참 하나님이냐?” 마땅히 믿고 의지할 것을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주님만을 끝까지 섬기며 따라가야 마땅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린 양 보좌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라는 칭찬의 말씀을 듣고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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