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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 연공서열 파괴자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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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 연공서열 파괴자 (마 20:1-16)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 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 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

어느 날 미국 듀크 대학교(Duke University)의 교목실장이신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 목사님이 우리가 방금 전에 읽은 이 비유를 가지고 설교하였습니다. 예배 후에 한 젊은 여자가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물었습니다.

방문자: “이야기를 잘 들었는데, 당신이 말씀하신 이야기들의 출처는 어딥니까?”
윌리몬: “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가져온 이야기들입니다.”
방문자: “포도원에 관한 이야기는요? 일찍 온 사람, 늦게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 똑같은 품삯을 받았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윌리몬: “아, 그것은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태 것입니다.”
방문자: “마태요? 그것이 책입니까?”
윌리몬: “맙소사. 당신,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그것은 성경이에요.”
방문자: “오, 그래요? 성경에 대해서는 들어본 일이 있지요.”

알고 보니, 전혀 교회에 다녀본 일이 없었던 여자였습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교제 중에 있는 남자를 따라 지금 대학 채플에 들어와 앉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그녀의 말이 압권입니다. “제가 볼 때 이 포도원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말도 되지 않는 끔찍한 일입니다. 그게 어디 공평한 일입니까? 실제 삶에서 누군가 그렇게 행동했다면 그 사람은 맞아죽었을지 모릅니다!”

그러자 윌리몬 목사님이 유머러스하게 응수하였습니다. “당신 말을 듣고 보니 맞습니다. 정말로 당신을 존경합니다. 웬 줄 아시우? 나는 이 이야기를 수없이 읽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가 이제는 아주 자연스런 이야기가 되었지요. … 그러나 저러나 이 포도원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분이 있는데 예수라는 분입니다. 그분이 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나중에 살해되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 … 오늘 이 이야기에 대해 설교 했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 1,300명의 교인들이 내 손을 잡으면서 ‘정말 오늘 설교 좋았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비유 이야기의 핵심을 잡은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 당신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처럼 이 이야기는 정말로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오늘 이 자리에 앉아계신 경상학부 교수님들에게도 오늘의 이야기가 도무지 상식 밖의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웬 줄 아십니까? 아시다시피 마태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저자는 마태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요즈음 말로 공인회계사(CPA) 출신이 아닙니까? 셈에 관하여, 회계장부에 관하여, 임금계산에 관하여 탁월한 경험과 식견을 갖고 있는 그가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태연스럽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이야기를 쓰고 있었을 때 아마 제 정신이 아니었던지 아니면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그냥 덮어놓고 받아쓰던지 둘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무장한 세무공무원 출신의 마태가 이런 비상식적인 포도원 운영과 임금체계에 대해 “아멘” 할 수 있었겠냐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비유의 말씀은 꿀꺽 삼키기에는 무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쓰디쓴 한약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먹어야합니다. 보약은 쓰기 마련이고, 쓰지만 우리 몸에 좋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옳다는 것을 압니다. 그의 말씀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비유가 우리에게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삼키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이 비유는 정말로 터무니없는,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비유입니다.

[비유란 무엇인가?]

- 비유는 우리가 해석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 비유는 우리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 비유는 우리의 통찰력의 혜택을 받아야만 하는 수동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 비유는 우리를 해석해주는 이야기입니다.
- 비유는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 비유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생각과 세계관을 갖고 있는지, 우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도발적인 이야기입니다.

비유가 우리에게 올 때 예수님의 그 무엇이 우리에게 다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모든 것은 확 달라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읽을 때 이 비유를 통해 교훈을 얻으려 합니다. 아니면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할 도덕적 가르침이나 윤리적 규범을 찾으려 합니다. 다시 말해 비유로부터 그런 교훈이나 윤리를 추출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그들은 교훈이나 도덕을 호두알처럼 취급합니다. 즉 비유 이야기는 호두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라고 생각합니다. 속에 있는 것을 빼어낸 호두 껍데기는 필요 없어 버리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비유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 비유들은 의미를 숨기고 있는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마치 껍데기가 호두 알을 숨기듯이 말입니다.
  ․ 비유들은 여러분들에게 정면으로 맞닥뜨리려는 이야기입니다.
  ․ 비유들은 도전적인 이야기들입니다.
  ․ 우리에게 도발적으로 도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 우리가 안주(安住)하고 있는 세계를 도발해 들어오는 이야기입니다.
  ․ 비유는 우리의 가치들을 뒤범벅 시킵니다.
  ․ 비유들은 우리가 갖고 사는 전제들, 혹은 그러려니 하고 사는
  무의식적으로 입력된 생각들을 도전합니다.
  ․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깨부수려고 달려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읽은 비유의 결론 부분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 이 말씀은 우리가 믿고 사는 모든 것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 이 말씀은 우리가 서있는 모든 것들에 정면으로 돌진합니다.

[끝줄에 서있는 사람들의 종교]

복음서들에는 이러한 “꼴지가 첫째 ― 첫째가 꼴지”와 같은 유(類)의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그 다음 장인 마태 21:31을 열어보십시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창녀들이 너희들 보다 앞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자, 여러분이 총회에 파견된 총대 목사님들을 향하여 “존경하는 총대 목사님들, 심란한 이 소식을 들어보십시오. 용산 창녀촌의 여자들이 여러분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아마 기분이 더럽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예수께서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처음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삼키기에 너무 큰 알약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 좀 벌고, 옷도 그런대로 잘 입고, 안락한 집에 살고 있는 여러분과 저와 같은 크리스천들에게 이 말씀은 상당히 거북스럽고 마음이 편치 않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모른 사이에 아니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안전이라는 안경을 통해 복음서들을 읽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치들을 뒤섞어버리는 말씀들이 나오면 걸러냅니다.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 체계에 맞지 않거나 거북스러운 말씀들이 나오면 옆으로 제쳐놓거나 아니면 무시하고 지나쳐 버린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말씀들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일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처음이 나중이 되고 나중이 처음이 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가 잘 지적하였듯이,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노예들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방인들로 구성된 많은 교회들에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사실입니다.

본질상 기독교신앙은 모든 사람들의 명단에 가장 밑바탕에 있는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끝줄에 서있는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은 비유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 우리의 비유는 우리의 가치들을 뒤섞여놓습니다.
  ․ 우리가 세워놓은 질서들과 순서들을 뒤섞여놓습니다.
  ․ 우리의 비유는 우리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어서 우리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 우리의 비유는 우리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어서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보게 합니다.
  또한 우리가 앞으로 무엇이 되어야 할는지 보게 합니다.

우리의 비유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가장 일찍이 부르심을 받아 고용되었고, 가장 길게 일하고, 가장 열심히 일한 일꾼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농장 주인의 처사가 공평치 않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말이 맞는다고 동조합니다.

그러나 농장 주인이 불평하는 일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공평하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들에게 지불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그대로 지불했기 때문이야. 하루에 한 데나리온이라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치명적인 비교]

물론 먼저 고용된 일꾼들만 있었다면 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가 끝날 즈음 그들은 아침에 약속받은 만큼의 품삯을 받을 것이고 아무런 불평 없이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금밖에 일하지 않고도 그들과 똑같은 품삯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치명적인 비교”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비교는 치명적입니다. 비교와 함께 질투와 시기, 적대감과 정의를 호소하는 부르짖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처음에 고용된 일꾼들이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 보상이라는 것은 노력한 만큼 주어져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 보상은 항상 노력의 대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보상은 노력의 저울추와 비례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보상이란, “똑같이 일했으면 똑같은 품삯이 지불되어야한다!”

우리의 경제는 역시 이와 동일한 원리에 따라 움직여집니다. 이런 원리가 정지되면 경제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것이 경상학부에서 가르치는 원칙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이야기를 입에 담고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자신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을 찾으려고 아침 일찍 나간 주인과 같다. 그는 일꾼들에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그 일꾼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문제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장 주인이 오후 5시경에 고용된 일꾼들에게 하루 종일 일한 일꾼과 똑같은 품삯을 지불하면서부터 문제가 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먼저 온 사람이 먼저 진급해야하고, 나중 된 사람은 나중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총회총대들이 창녀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뒤집어진 체계]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세워놓은 시스템을 뒤집어 놓으십니다. 즉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더 사랑하셔야하고 어떤 사람은 덜 사랑하셔야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시스템, 즉 우리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을 뒤바꿔 놓으십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에서, 하나님은 공평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선 공평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선 관대함, 은혜로움과 같은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하나님은 품삯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비유 안에서,
  ․ 하나님은 재판관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 조심스럽게 상을 나눠주는 분으로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 왜냐하면 은혜는 많고 적게 나눠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은혜는 그 자체로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한두 시간 정도만 일한 일꾼들은 온종일 일한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지불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루치 품삯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한 일은 겨우 한두 시간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하루치 품삯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농장주인의 관대함과 자비로움 덕분이었습니다.

처음에 고용된 일꾼들이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농장 주인이 묻습니다. “내가 관대하고 넉넉하고 너그럽다고 해서 너희가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냐?”

이런 질문 안에 우리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가로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은혜”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 비유는 일꾼이나 그들이 행한 일의 업적이나 성과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습니다.
  ․ 비유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농장 주인입니다.
  ․ 비유는 그분의 예측치 못하는 행동, 그분의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
  아니면 우리가 흔히 하는 용어대로, 그분의 주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에게도 조절이나 통제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가 하루를 마감하는 늦은 오후 5시에 몇몇 일꾼을 더 채용하기를 원한다하더라도 누구도 그에게 “콩 나와라 팥 나와라, 이렇군 저렇군” 하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그분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겠다고 한다면 그분 마음대로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 마음대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몇몇 일꾼들은 이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자 그분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당신 것이나 챙겨 떠나라. 짐을 싸들고 떠나라. 내가 이 마지막에 고용한 일꾼들에게 내가 당신들에게 주는 것과 똑같이 주기로 작정했어.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은 농장 주인인 나야. 내가 내 것 갖고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 뭐가 잘못인가? 내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 하기로 했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보십시오.
  ․ 내가 주기로 했다.
  ․ 내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하기로 했다”는 이 말 한 마디로 농장 주인은 그의 일꾼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 협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협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일꾼들이 내뱉는 모든 불평과 중얼거림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불평과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잊은 결과입니다. 많이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빌 2:14-15).

“모든 일은 불평 없이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하거나 다투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잘못했다고 비난할 수 없을 것이며, 여러분 역시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비뚤어지고 악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두운 세상에서 밝은 빛을 발하는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십시오.”(쉬운 성경)

․ 불평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사람들의 특징적 행동입니다.
․ 불평은 하나님은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사람들의 특징적 행동이다.

[은혜의 속성]

은혜는 항상 예측 불허입니다.
  ․ 왼쪽에서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른 쪽에서 나타나고
  ․ 위에서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래서 솟아오릅니다.
  ․ 여러분의 크리스천 친구로부터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여러분의 무신론자 친구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은혜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은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언제나 자유롭게, 우리의 기대와 예상을 너머서 옵니다.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분의 때에, 그분의 계획아래서 우리에게 옵니다.

현존하는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문필가이며 목사인 프래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는 말하기를, “은혜는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은혜는 오로지 주어질 뿐입니다. 은혜는 버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은혜를 버는 길은 없습니다. 은혜를 받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 일은 없습니다.
  ․ 마치 산딸기(래즈베리) 크림의 감미로운 맛은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
    우리가 그 맛을 얻을 일을 하기 때문에 산딸기(래즈베리) 크림의
    감미로운 맛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 멋지게 보이는 것은 그 자체가 멋지게 보이기 때문이지,
    우리가 멋지게 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멋있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가 태어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가
    생명을 노력해서 얻었기 때문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생명이 선물로 주어져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 잘 자는 것이 은혜입니다. 노력하고 애쓴다고 잘 자는 것이 아닙니다.
- 달콤한 꿈도 은혜입니다. 달콤한 꿈을 꾸려고 애쓰고 노력한다고 달콤한 꿈이 꾸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대부분의 눈물 역시 은혜입니다. 쥐어짜는 눈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눈물 말입니다.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면서 흐르는 눈물, 고마움에 잡아 주는 손의 체감을 느끼면서 뒤돌아설 때 흐르는 눈물,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흐르는 눈물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은혜입니다.
- 빗소리도 은혜입니다.
-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역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고용된 시간에 따라 좋은 소식처럼 들릴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공평하시지 않으시다면, 아마 거기에는 우리의 실제적 가치보다 더 많이 쳐주어서 넉넉하게 주실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예상 밖에 주어지는 은혜 말입니다. 즉 여러분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할 것 이상으로 더 받게 될 것입니다. 비록 오후 5시 고용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아멘.
(류호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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