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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요 3:14-16, 민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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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요 3:14-16, 민 21:4-9)

1943년 10월 10일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들에게 억류되었던 포로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그 날 감방 안에 라디오를 감추고 있었음이 발각되었고, 일본군들은 그 라디오를 찾아내려고 포로들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의심이 되는 포로들을 전에 YMCA회관으로 사용되었던 켐페타이 헌병사령부로 데리고 가 고문을 했습니다. 며칠 사이에 50명 전원이 불려 나갔는데 절반이 고문으로 죽었습니다. 그들 중 살아남은 생존자가 그 곳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YMCA 건물 안 무서운 감방에 갇혀 있었던 그 긴 기간 동안에도 눈에 보이는 위로와 힘의 근원이 있었다.
나는 감방을 밝혀 주는 조그만 창문을 통해 보이는 교회의 첨탑과 그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과 나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셨던 분을 생각했다.
그 십자가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갖 잘못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바르고 진실되게 서 있었다. 나도 바로 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대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견디어 내리라고 결심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사람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고 그 십자가에서 힘을 얻게 하였을까요?
십자가는 기독교와 어떠한 관계가 있길래 교회에서는교회에서 십자가, 십자가를 부르며 심지어 십자가를 찬송한다는 말인가요?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나무를 말합니다. 그 십자가 모양의 나무틀에 달려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그냥 보면 나무에 불과하지만 거기에는 기독교가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구원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왜 우리가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3장을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3장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장입니다.
3장 1-21절에는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나누는 대화가 나오는데, 어느날 밤에 니고데모라는 공회의원이 예수님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구약에 나오는 사건 하나를 인용합니다.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런데 예수님이 이 사건을 언급할 때에 니고데모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은 것을 보면 니고데모가 그일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에서는 역사교육, 율법교육이 철저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교육을 받아 당연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면 줄줄줄 암기하고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배경이 되는 성경말씀이 민수기 21장 (4-9절) 입니다.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광야 길을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기를 에돔이란 곳으로 가라했는데 그곳은 멀리 돌아서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가까운 길로 가지 않고 먼길로 돌아간다고 또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수기21장 4절에 보면 길로 인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였다, 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읽어보면 “길을 돌아가는 고생을 참지 못해..” 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징계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사막의 뱀을 소개하는 다큐멘타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뱀이었는데 그것이 사람을 물면 몇초이내에 사람이 죽어버리는 맹독을 가진 뱀이었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불뱀이 바로 그러한 사막의 뱀입니다. 그런 뱀이 백성들을 물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냥 두고 보시지 않습니다. 백성이 자기들의 잘못을 알고 뉘우치는 순간 그 죽음에서 살아날 길을 마련해 놓으십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 (민 21: 7-9)

그러한 뱀에 물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뱀에 물린 사람들은 몇초안에 죽기때문에 어디로 데리고 와서 치료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너무 급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만들어 높이 매달고는 뱀에 물린 자마다
그 놋뱀을 바라만 보면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자연이 문제가 해결되어 버립니다.
뱀에 물렸을 때 그저 고개만 돌려 놋대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그것으로 상황 끝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건을 정리해 보자면, 백성들이 불평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하니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한 징계로 불뱀을 보내 백성들을 징계하셨고 백성들이 다시 죄를 뉘우쳐 용서를 구하자 하나님께서 다시 살길을 열어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꺼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와의 대화중에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장대에 놋뱀을 단 사건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얼마전에도 원망을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다 죽고 가나안땅에는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갈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듣고도 거기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습니다.
과거에 자기들이 어떤 잘못을 해서 이렇게 고생하는가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눈앞에 닥쳐오는 일이 힘들다고 원망을 하곤 합니다.
민수기 11장 4절 -5절 에는 심지어 먹는 것을 가지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 과거 애굽에 있을때가 좋았어, 그때는 먹기는 잘먹었지 ..” 그리고 더하나 그들이 항상 불평끝에 붙이는 말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입니다.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기들을 그런 길로 인도하시는가를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생길이 간혹 힘들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 (출 13:16)
렘29 장 11절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사 55: 8)

이와 같이 하나님 생각은 우리생각과 달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데도 그길이 조금 험하다고 항상 불평을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실상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구원을 요청할 때에 그것을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7절에 보면 “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였으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 라고 하였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한 방법은 불뱀이 떠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그게 아니라 뱀에 물린 사람은 놋뱀을 쳐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왜 하나님께서는 다른 해결책을 제시해 주셨을까요 ?

첫번째 생각해 볼 것은 어느 것이 더 유익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뱀만 없어진다면 모든일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뱀만 떠나버리면 뱀에 물린 사람은 그대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자가 생기지 않는다 뿐이지 이미 뱀에 물린 사람은 죽을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뱀에 물린 사람을 낫게 해주는 해결책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해주십시요, 라고 기도해도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그 것보다는 이게 낫겠다, 하시며 다른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는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우리에게 더 좋은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는, 이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질을 잘 아니까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달아 놓고 그것을 보면 살리라 했을 때에 그 백성들의 반응이 어땠을 것 같아요 ? 맨처음에는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슨소리 ? 다른 약을 주던가 한다면 몰라도 그냥 쳐다만 보면 나을 수 있나 ? 그러면서 믿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놋뱀을 매어 달아 놓게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백성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을 다시 한번 더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뱀을 없애달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뱀을 없애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놋뱀을 달아놓고 바라보라 하신 것은 이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우리에게 제발 좀 믿어달라, 믿어달라 하십니다. 내 말을 좀 듣고 그대로 따라 행하는믿음을 보여달라고 하십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 놋뱀사건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러면 왜 예수님은 불뱀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첫번째는 예수님이 높이 달려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달리신다, 놋뱀은 장대에 달리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옛적에 광야에서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처럼 자기 자신도 그렇게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들이 그를 보고 죽음에서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장대에 높이 달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 있던 바라보기만 하면 살 수 있었던 놋뱀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높이 달려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메고 뛰어 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듯이 예수님의 구원사역도 그렇게 누구나 아무나 바라보기만 하면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사랑입니다. 놋대에 달린 놋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도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16절에서 분명히 그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또한 세번째로는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의 방법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구원받는 방법이 훨씬 쉽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마음에 믿고 그것을 바라보면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의 방법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는 신이 만족할만한 어떤 일을 해야만 그들은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지고 그들은 살아갑니다.

그렇게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보혈의 공로를 믿는 자마다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해결책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달라신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우리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어야만 할까요?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광야에서도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놋뱀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모세의 말을, 하나님의 말을 믿고 따르는 믿음이 필요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바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놋뱀을 바라보지 않아서 죽은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놋뱀을 바라보지 않아서 죽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도 믿지 않고 바라본다면 그것은 한낱 나무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그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십자가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과 15절 그리고 16절을 연결시켜보면 이렇게 됩니다.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나니.
15절, 이는 곧 광야에서 놋뱀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저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사심이라.
여기에 십자가와 영생의 연결고리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십자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16절에 이 모든 것을 정리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자, 그렇게 될 때에 십자가는 비로소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아까 서두에 말씀드린 그 일본군에 의해 포로되었던 사람의 간증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일본군의 무서운 감방에 갇혀 있던 시간에도 그에게 위로와 힘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비록 몸은 쇠창살안에 갇혀있었지만 그가 바라보는 십자가는 그에게 예수님의 피흘리신 고난을 생각나게 해주었고 예수님의 사랑을 일깨어 주었으며 그래서 모진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진리를 깨달은 우리들은 앞으로 십자가로 더 가까이 가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십자가의 신비를 설교한편으로 전달하기에는 너무 오묘하며 무궁무궁합니다.
앞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며 여러분과 함께 나누도록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 하나만 확실히 우리 마음에 새깁시다.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누구나 바라만 보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이런 생각을 해 봅시다.
우리가 그 광야에서 불뱀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함께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가정을 해 봅시다.
우리도 불뱀에 물렸다가 모세의 말을 믿고 장대위에 걸려있는 불뱀을 보고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마침 옆집에 있는 철수 아버지가 뱀에 물렸다고 옆집에서 소리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그럴 때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높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자, 고 우리마음에 다지는 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상황이 옛적 광야에 벌어졌던 불뱀사건과 같은 실제상황이기때문입니다. 비유의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면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라는 주제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는 가를 알았습니다.
이제 믿음의 눈으로 믿지않는 우리 형제, 자매, 이웃을 바라봅시다.
그들은 멸망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문으로 바라보고 있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들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합니다.알아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는 눈뜬 장님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를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우리만 믿음의 눈을 뜰 것이 아니라 그들도 눈을 뜨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예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사명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 올리는 것입니다.
예수이름을 높이 들어 누구나 그이름을 보고 믿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서 우리 주변의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힘쓰며 수고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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