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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어떤 곳인가?(12) : 약함과 조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곳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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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어떤 곳인가?(12) : 약함과 조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곳 (고전 1:26-31)

오늘 아침에는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분쟁적인 교회였던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모범적인 교회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만, 고린도 교회처럼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분쟁적인 교회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분부하셨는데, 오늘 아침 우리들이 열린 마음과 귀를 가지고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과 몸의 자세를 단정히 하고 다른 생각들을 다 접어두고 주님만을 바라보시면서 말씀을 경청하여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2차 선교여행 때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후에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일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행18:1-5,11).

고린도는 본래 세속적인 상업 도시였고, 스포츠와 오락의 도시였고, 우상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분쟁적인 요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복음을 받아드리는 지역 사람들의 마음 밭의 성격에 따라서 교회의 성격과 모습이 달라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고린도 교회가 지녔던 세 가지 부끄러운 특징들과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에게 지니라고 분부하신 세 가지 특징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부족한 사람의 설교를 우리 주님께서 축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고린도 교회는 자랑과 교만을 지녔는데 약함을 지니라고 분부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약점 중의 하나는 자기가 잘났다고 자기를 드러내며 자랑하는 교만인데,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와 같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잘났다고 자기를 드러내며 자랑하는 교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 속이 상해서 다음과 같이 책망 섞인 질문을 쏟아 부었습니다.

“너희 중에 잘난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 중에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너희 중에 능한 자가 어디 있느냐? 너희 중에 문벌 좋은 자가 어디 있느냐? 그런데 왜 잘난 척 하면서 자랑하느냐?”(고전1:26-29).

“너희 가운에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너희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 박사를 따르면서 아볼로 박사의 제자들이라고 자랑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따르면서 바울의 제자들이라고 자랑하고, 어떤 사람들은 게바를 따르면서 게바의 제자들이라고 자랑하니 도대체 아볼로가 무슨 물건이며 바울이 무슨 물건이며 게바가 무슨 물건이냐? 사실 아볼로도 바울도 게바도 아무것도 아니니라. 우리는 모두 주님께 속한 주님의 물건들이니라”(고전3:3-7).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 다 그리스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2,23).

사도 바울은 저들의 자랑과 교만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호되게 책망했습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뿐 아니라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4:18-21).

고린도 교회는 자랑과 교만과 분쟁을 부끄러운 특징들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부끄러움이 많은 고린도 교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약해져서 약함을 지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너무 강해도 안되고 너무 유식해도 안되고 너무 유창해도 안되고 너무 화려해도 안되고 약해져서 약함을 지녀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서 첫째로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약한 것이고, 둘째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약해져야 되고, 셋째로 복음을 받는 사람들도 약해져야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3,25).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 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1,3).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사도 바울은 교회가 약해져야 한다는 만고에 불변하는 역설적인 진리를 설파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고린도서 편지만큼 약함을 극도로 예찬한 성경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약함을 극도로 예찬하는 약함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약함을 극도로 예찬한 약함의 사도인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 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후12:5).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리라”(고후13:4).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약함을 귀하게 여기며 약함을 추구하고 약함을 지녀야 하는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약함을 지닐 때 약함의 원조가 되시는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높임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배타성과 불화를 지녔는데 포용성과 조화를 지니라고 분부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약점중의 또 하나는 자기가 처한 삶의 처지를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이 처한 삶의 처지를 받아드리지 않는 배타성과 불화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미국 사람들이 처한 삶의 처지를 절대화하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처한 삶의 처지를 무시하며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은 경상도성을 절대화하고 전라도성과 평안도성을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은 보수성을 절대화하고 진보성을 배척할 수도 있고 진보적인 사람은 진보성을 절대화하고 보수성을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적인 사람은 자본주의성을 절대화하고 사회주의성을 배척할 수도 있습고 사회주의적인 사람은 사회주의성을 절대화하고 자본주의성을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배타성과 불화가 고린도 교회 안에 들어와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한 것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녀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도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처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한 배타적인 생각으로 고린도 교회는 사회적인 혼란과 불화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고전7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한 다양성과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고전7장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 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는 이런 처지에서 살게 하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처지에서 살게 하신다고 말씀하면서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한 다양성과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그러나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7-9).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처녀에 대하여는 내 생각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니라”(고전7:17-28).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 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 하는 것이니라”(고전7:38).

사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들이 처한 사회적이고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해서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면서 살아가고 있고, 우리가 처한 삶의 처지와 방식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아파트의 평수와 자동차의 배기량으로 사람들을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그런 경향이 극심하게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삶의 처지와 방식을 절대화하는 것을 금했고 그것을 상대화하고 다양화했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혼자 살 수도 있고 결혼해서 살 수도 있다고 지적했고, 부자로 살 수도 있고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중요하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 삶의 지위나 처지나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의 말씀은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한 다양성과 상대성과 조화를 가르치는 매우 값진 말씀입니다. 삶에 대한 폭 넓은 지혜를 가르치는 신약의 잠언과 같은 보배로운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

우리 신자들이 지니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자기가 받은 영적인 은혜와 은사를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혜와 은사들을 무시하는 배타성과 불화를 지니는 것입니다. 요사이 한국교회 안에도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그것들을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기들이 받은 영적인 은사들을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사들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배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책망하며 은사의 다양성과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한 몸에 다양한 지체들이 있는 것처럼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도 다양한 은사들이 존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몸에 붙은 지체들이 다른 지체들을 싫어하거나 부정하면 몸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은사들을 서로 부정하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고전12:14-77).

그리고 구체적으로 은사들의 다양성과 조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8,19).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1-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39-40).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은 은사들은 다양한데 자기가 받은 은사만 강조하고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사들을 무시하지 말고 모두 존중하면서 질서 있게 조화 있게 은사들을 사용하므로 덕을 세우고 화평을 도모하라고 분부했습니다. 교회는 은사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그리고 덕을 세우고 화평을 도모하면서 조화 있고 균형 있게 주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셋째, 이기적인 인색함을 지녔는데 이타적인 사랑을 지니라고 분부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약점중의 또 하나는 이기적인 인색함인데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와 같은 약점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스스로 인생을 ‘이기적인 존재’라고 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 자신을 살펴볼 때 저 자신이 이기적인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조금씩 그 약점을 벗으려고 애를 썼고 조금은 벗었지만 저는 아직도 여전히 이기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는 이기적인 인색함이 두드러지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마 무역에 종사하는 상업도시 시민들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스포츠와 오락을 즐기는 엔조이 형 시민들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여튼 고린고 교회 신자들은 돈과 관련해서 너무 인색했고 헌금과 관련해서 아주 인색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밭을 팔아서 바치는 바나바와 같은 착한 신자는 한 명도 없었고, 집을 내어 놓는 루디아와 같은 너그러운 신자는 한 명도 없었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돈이 생기면 사업을 하든지, 스포츠 구경을 가든지, 오락을 즐기든지, 여행을 떠나든지 했고 감사헌금이나 구제헌금이나 선교헌금을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극단적인 인색함으로 아무런 사례도 받지 못하고 의식주 때문에 손으로 일하면서 어렵게 목회를 했습니다. 구제 사역은 전혀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때를 회상하면서 고전 9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실 저들의 인색함과 부끄러움을 지적하는 글이었습니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전9:6-15).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부끄러운 인색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편지였습니다.
고린도 후서에서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극도로 인색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의 도움으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까지 지적했습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함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고후11:9).

아마 사도 바울은 그들과 헌금 이야기는 물론 마음대로 농담도 못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들이 시험에 들까 봐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을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극한 가난 중에서도 연보를 풍성하게 했던 마게도냐 교회들의 예를 들면서 저들도 연보 생활에 힘쓰라고 권면을 한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1-5).

그리고 연보 생활을 힘쓰라고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고후9:6-14).

풍성한 연보를 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그치지 않고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고 헌금하는 자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이기적인 인색함에 사로잡혀 있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자기 자신의 삶의 최고의 모토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들도 그렇게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최고의 모토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삶이고 그것은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고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삶의 원리에 붙잡혀 사는 헌신적인 삶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삶의 모토요 선언이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날뛰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

예언의 은사와 믿음의 은사를 받아서 날뛰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2).

구제의 은사를 받아서 나팔을 불며 자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사도 바울의 마지막 고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인색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위하는 길이라면 사도 바울 자신의 재물과 몸과 생명을 허비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저들을 향한 책망이 희생적인 사랑으로 마무리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12:15).
사도 바울과 같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눈물과 희생과 사랑이 가득한 목회자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과 교만에 사로잡혀 살던 고린도 교회와 배타성과 불화에 사로잡혀 살던 고린도 교회와 이기적인 인색함에 사로잡혀 살던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자기 자신의 삶의 모토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이 보다 더 높고 더 위대한 삶의 모토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이 삶의 모토를 저의 삶의 모토로 삼기를 소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삶!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삶! 결국 사랑이라는 삶의 원리에 붙잡혀 재물과 자기 자신을 허비하면서 살아가는 삶! 이 보다 더 높고 더 위대한 삶의 모토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아마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교회의 신자들도 고린도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자기가 잘났다고 자기를 드러내며 자랑하는 교만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약함이란 찾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교회가 너무 강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자기가 처한 삶의 처지를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이 처한 삶의 처지를 무시하고 받아드리지 않는 배타성과 불화를 몸에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포용성과 조화란 찾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교회가 너무 배타적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이기적인 인색함을 지니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타적인 사랑과 희생이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회와 이웃에 대해 너무 인색해지고 너무 무정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 고린도 교회에 하시는 세 가지 말씀을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약함을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포용성과 조화를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타적인 사랑과 희생을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모토와 권면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라.”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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