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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 자 같으나 죽은 자 (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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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산 자 같으나 죽은 자
본문 : 요한계시록 3:1~6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요한계시록 3장 1-7절)
우리는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가능한 한 쉽고 편안한 것을 택합니다

요사이 대학생들에게 선교하는 선교단체 간사들의 말을 들어 보면 전도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이 생각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젊은이들이 편하고 쉬운 것을 추구하며 즉각 대답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어려운 일이나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더더욱 골치 아파합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하며 고뇌하는 것을 포기하는 한 더 이상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서 고뇌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어떠할까요? 교회 나오는 것도 좋고, 각 부서에 참여해서 교제하며 성경 공부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찬양을 부르며 마음속에 기쁨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가에 대해서 듣는 것은 꺼립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대면하는 것이 무서워서 때로는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쉽고 편안한 것을 택하고, 문제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직면하기보다는 가능하면 우회하려고 합니다.

어떤 여인이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가 진찰을 하더니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인은 다른 의사에게도 진찰을 받아보겠다며 다른 병원에 갔습니다. 이번 의사는 위암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의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첫 번째 의사한테 가야 되겠습니다. 그래도 맹장염이 위암보다는 백 번 낫지 않겠습니까?”

만약 질병에 대한 진단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했다면 몸에 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맹장염이 위암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암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맹장염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원인이 되는 병을 먼저 진찰해서 정확히 알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병 이름을 내 마음대로 붙이고 거기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위암인데 맹장염 수술을 받아서는 안 되고, 맹장염인데 위장염 수술을 받아서도 안 되는 것이 우리 몸입니다.
‘타조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타조는 갑자기 사자와 같은 맹수를 만나면 피할 수 없으니까 머리를 모래 속에 처박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사자가 안 보이니 이제는 안심이구나.’ 하면서 그 순간을 모면하는 어리석음을  보이는데 그것을 타조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문제나 위기가 분명 옆에 있는데 지금은 안전하다고 믿는 증후군입니다. 정직하게 자기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면서 ‘이 정도 살면 그래도 남보다 낫지. 그래도 남보다는 정직하게 사는 것이지.’ 하고 인생을 스스로 만족해 버리는 증후군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앓고 있습니다. 

사데 교회는 바로 이런 증후군을 앓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원래 ‘사데’라는 도시는 헬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탈레스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헬라의 유명한 법률가였던 솔론도 머물며 거주했던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철학, 법률, 음악의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모직공업과 금은보석의 세공업이 발달된 지역이었고, 아데미 여신을 숭배했던 우상숭배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복음이 들어가서 축복받은 도시가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셔서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면서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문제는 그 전부터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개의 교회 중 특히 두 교회는 몹시 꾸중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라오디게아 교회였고 또 하나는 사데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무슨 문제가 있어서 예수님의 눈에 잘못된 교회로 비추어졌을까요? 아마 세상의 화려함, 세상의 유혹이 성도들의 마음을 훔쳤을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나태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육체에 대한 사랑에 몰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데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꾸짖지 않았습니다. 신앙적 교리에 문제가 있다고 꾸짖지 않았습니다. 다만 행위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형식과 외형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살아있는 것 같으나 실상 보면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했지만 그 믿음에 따라서 행위가 뒷받침되고 있지 못합니다.

살았으나 실상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믿음의 모양은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초라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죽은 것과 같이 앞뒤가 다르고 표리가 부동합니다. 그런 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구나.”

사데 교회는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 풍속을 즐기며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도 드리고 하나님의 이름도 부릅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서는 믿음과 다르게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돈과 재물을 앞세워 살아간 것입니다. 남보다 더 출세하기 위해서, 조금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서, 자기 양심을 팔고 거짓과 불의를 행하면서 살아가는 사데 교회 성도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꾸중하십니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며 예배드리고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보니까 행위가 문제구나. 썩었구나. 죽었구나. 육체적인 쾌락 때문에 신앙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신앙을 뒷전에 감추고 사는구나.”

본질이란 소중한 것입니다. 인생에서 회복되려면 본질에 대해서 다시 깨닫기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가 개혁되려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헌금이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교인의 숫자가 많고 적음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천하보다 소중한 한 영혼, 한 영혼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소중합니다. 교회는 수많은 멋진 행사가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 서서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 전체가 무너집니다. 사람들은 그럴 듯하다고 말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네가 갖고 있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나는 그것에 대해서 관심 없다. 나는 네 마음, 네 생각, 네 사랑에 대해서만 관심 있다.” 

살아있다는 것과 죽어있다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살아있는 것은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물고기, 생명이 없는 물고기는 아무리 강물에 집어넣어도, 아무리 큰 것을 잡아넣어도 강물에 둥둥 떠서 그냥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아무리 잡아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저항하며 도전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이며 변화합니다.

영적인 생명의 사건과 영적인 죽음의 사건 사이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세상에 도도하게 흐르는 물결에 도전하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세상과 함께 파멸을 향해서 흘러가는 영혼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 풍조와 맞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가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초연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것을 거슬러 올라가는 몸부림이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뇌하고 고통 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삶에서 너무 잘 흘러가는 흐름에 따라가는 것은 어쩌면 영적으로 죽어있는 표식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으면서 세상을 향해 나가려면 때로는 힘들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 외롭고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 살아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자로 저항하고 도전하기 때문에 우리 삶에 또 다른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 삶이 늘 고난 받고 괴롭고 우울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늘 새로운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승리해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는 기쁨,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회개하고 다시 변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저를 향해서 “네가 살아있다는 이름이 있으나, 내가 보니까 넌 죽었구나. 네가 참된 목사냐? 네가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바르게 섬기고 있느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두렵고 떨릴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향해서 “이 교회가 이름은 있으나 죽은 교회다.” 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두려울까요?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보면서 “교회가 살아있는 것 같이 숫자도 많아졌고 큰 교회도 많아졌지만, 내가 보기엔 죽은 교회다.” 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얼마나 두렵고 떨릴까요?

우리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의 예외가 될 수 있을까요? 내 안은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합니까? 아니면 살아있는 신앙도 있어서 때로는 예배도 잘 드리고 찬양도 잘 부르지만 “네가 정말 살아 있느냐?” 라고 질문하실 때 진정으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있는 남은 것이 아직 완전히 죽지 않고 조금 살아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다시 살려 보아라. 불쏘시개가 아직 남아 있는데 다시 불을 지펴 보아라. 생명의 불을 지펴 보아라.”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 세상을 향해 나가 허랑 방탕하게 지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돈을 모두 낭비해서  더 이상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돼지가 먹는 밥통에 자기 입을 갖다 대고 탄식하며 자기를 되돌아 보았습니다. ‘아, 내가 죽었구나. 내가 없구나. 나는 망했구나. 내가 하나도 가진 것이 없구나. 내가 가진 것이 뭐가 있을까?’
그 때 한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떠나온 아버지가 있었구나.’ 그 순간 그는 창피한 것과 부끄러운 것을 무릅쓰고 아버지가 받아줄는지 확신도 없으면서 아버지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아들이 먼 곳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껴안고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열어 달라.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왔노라. 내가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노라.”

우리의 인생 안에서 하나님 앞에 죽은 인생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다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들은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라. 네가 받은 것과 들은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라.”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기가 어렵습니다. 성령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나가야 하기에 예수님은 다 죽어 없어진 것과 같은 사데 교회의 가능성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사람이 있구나. 세속적인 타락으로부터 자신을 지킨 사람들이 있구나.”

이것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성적인 타락과 음란으로부터 거룩함을 지키는 사람들 몇 명이 있구나.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의 주인으로서 재물을 사용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구나. 내게 주어진 달란트와 명예, 권력과 직분을 자기 욕심을 위해서 쓰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기를 열망하며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구나.”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기대와 소망을 가지시고 다시 회개하고 회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 도전하는 자, 부딪칠 줄 아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익명의 글로 주님의 마음을 쓴 글이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생명이라고 부르면서, 왜 나를 원하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은혜롭다고 말하면서, 왜 나를 신뢰하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영원이라고 하면서, 왜 나를 찾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의롭다고 하면서, 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 왜 나와 걷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 왜 나를 바라보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부유하다고 말하면서, 왜 내게 구하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지혜라고 말하면서, 왜 내게 배우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능욕이라고 말하면서, 왜 나를 우러르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공평하다 하면서,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고귀하다고 하면서, 왜 나를 섬기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왜 내게 순종하지 않느냐?

그런 즉 내가 너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생명이시면 생명을 받고 생명으로 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빛이시면 빛으로 받고 빛의 세계를 향해서 끊임없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시면 거짓 것을 물리치고 진리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알고 순종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교회와 우리들을 세워 주셨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살아있는 교회, 살아있는 성도, 살아있는 한국 교회, 하나님 앞에 축복받는 민족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 위에 다시 설 때 우리를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름만 살아있다고 하고, 주님 보시기에 죽은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대로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행동이 변화되게 하옵소서.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하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민족의 역사가 바뀌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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