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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히 11: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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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히 11:29~30)

공동체의 신앙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꼭 예배를 교회 와서 드려야 하나요? 집에서 혼자 예배드리면 안 되나요? 어디서든지 예배만 잘 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자, 여러분 같으면 이런 질문 받았을 때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절대 안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다수결로 정할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다수결로 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정답은 "안 된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개인이 아닌 공동체(단체)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의 전당>이 공동체의 믿음을 소개한 것일까요? 공동체의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새 주기도문)에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계속해서 '우리'로 나오는데 그 까닭은 기도도, 신앙고백도 우리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즉, "내가 믿는 것"이요 하나님과 나와의 1:1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나 혼자 믿고 나 혼자 구원 받는 것이 다가 아니라 교회를 통해 믿고 공동체를 통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신앙의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뭐가 필요하냐? 집에서 혼자 예배 잘 드리면 되지." 하는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실제도 미국 같은 나라에서, 그리고 우리나라도 혼자 집에서 케이블 TV를 통해 예배드리고 헌금하는(온라인으로)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는데 이건 아닙니다. 교회를 통해 신앙생활을 하고, 공동체가 함께 예배하며,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며 공동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도 오늘 유일하게 이스라엘 공동체의 믿음을 다루고 있는 것인데 이 이스라엘 공동체는 곧 오늘날 교회를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공동체의 믿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하며 온 성도가 함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함께 섬기면서 감사한 마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도우며, 서로의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돕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교회가 중요하고, 공동체가 중요하고, '우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이스라엘 공동체의 믿음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어떤 믿음이 아름다운 공동체의 믿음이요 교회의 믿음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믿음 : 믿음과 의심의 차이

자,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온 이스라엘 공동체의 믿음은 무엇이냐? 크게 두 가지 믿음의 특징이 나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전혀 반대되는 자세가 나옵니다. 바로 애굽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의심 때문에 다 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과 애굽 사람들의 의심이 완전히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다함께 본문 29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 말씀은 여러분도 잘 아는 출애굽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앞에는 홍해바다가, 뒤에는 애굽 군대와 병거가, 양 옆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가로막은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처지였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홍해바다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육지처럼 바다 한 가운데를 건너게 하신 후 애굽 군대가 뒤쫓아 올 때 다시 물이 덮쳐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지 않습니까?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장면이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된 까닭이 믿음이냐 의심이냐의 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바다도 육지 같이 건널 수 있습니다. 즉 기적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바다도 육지 같이 건너고, 산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의심하고 시험하게 됩니다. 누구를 시험하냐? 하나님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합니다. 이미 앞서 열 가지 재앙을 겪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테지만 더욱이 지금 눈앞에서 바다가 갈라지고 그 사이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더 이상 추격하지 말고 포기했어야지요. 그런데도 끝까지 추격한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을 시험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안 믿고 테스트 한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강력한 군사력과 허다한 말과 병거를 하나님보다 더 믿었는지 모릅니다. 자기네가 하나님보다 더 능력 있다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결과는 뻔하지요. 오늘도 이렇게 보고도 못 믿고, 의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자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믿고 의지하는 자들은 애굽 사람들처럼 반드시 의심의 바다에 빠져죽게 마련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가 얼마나 다른지를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5절부터 함께 봅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제법 물 위를 잘 걷던 베드로가 왜 갑자기 물에 빠졌을까요? 처음에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물 위를 걸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같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걷던 중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건져주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이 말씀을 볼 때 베드로가 물에 빠진 이유는 믿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믿음이 없어진 것입니까? 베드로의 마음속에 의심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입니다. 믿음의 반대말이 '안 믿음,' '못 믿음'이겠지요? 그런데 이 안 믿는 것, 못 믿는 것이 바로 의심이라는 말입니다. "설마 그렇게 되겠냐? 그런 일이 진짜 일어나겠느냐?" 하고 의심하고 못 믿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처음에는 믿음으로 물 위를 걷습니다. 베드로가 믿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29절에 보면 물 위를 걸으시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그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이 나에게 오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라고 믿은 것입니다. 즉 내 힘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라 하시니까 예수님의 능력에 의지해 걸을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가다가 30절에 보면 웬일인지 갑자기 바람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던 눈이 바람을 보니 두려운 마음이 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놓친 것입니다. 세차게 부는 바람을 보고, 사납게 치는 파도를 보느라 예수님을 놓쳤는데 그 바람에 예수님만 의지하고 믿던 마음 대신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믿음 대신 의심이 베드로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어 물에 빠진 것이지요.

서커스를 보면 곡예사가 높은 공중에 외줄을 매달아 놓고 줄타기를 합니다. 곡예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외줄을 타고 유유히 건너편으로 갑니다. 그냥 건너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줄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거나 자전거까지 탑니다. 제이 커크린이란 곡예사는 나이아가라 폭포 120미터 상공에 외줄을 걸고 540미터 길이를 건너기까지 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고공공포증이 약간 있습니다. 높은 곳에 가면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학교 가면서 육교 건널 때가 가장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어디 저만 그렇겠습니까? 높은 곳에 올라가면 누구나 공포를 느낍니다. 곡예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곡예사도 앞을 보고 외줄을 건너야지 아무리 간이 큰 사람이라도 아래를 보면 다리가 후들거려 건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어디를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베드로도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할 때 담대하게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일으켰지만 그 눈을 돌려 바람을 보고 파도를 보니 의심이 생겨 물에 빠진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누구를 보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면 나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놓치고 세상의 다른 것을 보게 되면 금세 내 마음에 의심의 바람이 불고, 불신의 파도가 쳐서 그 의심의 바다에 빠져죽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 않은지요.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심하는 행위, 이것은 불신입니다. 기도하고도 의심하면 그것도 불신입니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정말 그렇게 되겠나?" 한다면 그것은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반대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 능력만 의지하고 "내 힘으로는 안 되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담대히 물 위를 걸으면 진짜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 눈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나는 세상의 것은 보지 않겠습니다. 이 바람도, 파도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고 고백하게 되면 물 위도 걷고, 물을 가르기도 하고, 내 인생의 어떤 바람과 파도도 잠잠케 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생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입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믿음

둘째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고 했습니다. 본문 30절을 읽습니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이 말씀은 여호수아 6장에 나온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서 설명한 대로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홍해만 건너면 될 줄 알았더니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방황하게 됩니다.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큰 은혜를 체험하고 기적을 체험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데 또다시 방황도 있고 시험도 옵니다. 이런 몇 차례의 큰 시험과 방황을 그 때마다 믿음으로 이겨내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제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다 마치고 바야흐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눈앞에 거대한 성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여리고성입니다. 1999년 성서고고학자 브라이언트 우드(Bryant Wood) 박사는 여리고성을 발굴한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는데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당시 여리고성은 정말 난공불락의 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은 외벽과 내벽 두 겹으로 되어있는데, 외벽은 5미터 정도 높이의 기초성벽 위에 두께 2미터, 높이 7미터의 진흙 벽돌 벽을 세웠으며, 내벽은 지상으로부터 높이가 14미터 정도 되는 둑 위에 다시 높이 성벽을 쌓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당시의 여리고성은 이처럼 2중의 튼튼한 구조를 가진 난공불락의 성이기에 양식만 풍부하다면 몇 년이고 버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숫자는 장정만 60만, 전체 200만에 달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 해도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는 오합지졸이요, 무기도 변변치 못하고 성을 공격할만한 어떤 공성무기도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정말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불가능의 성이었다는 뜻입니다.

자, 우리 한 번 상상해 봅시다. 40년간 광야생활에 지쳐 있다가 이제 가나안에 입성하면서 희망에 들뜬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첫 번째 본 광경은 눈앞에 떡하니 펼쳐진 엄청난 성이었습니다.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더욱이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도저히 점령이 불가능한 여리고 성벽이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절망 그 자체지요. "이제 끝이다."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겠지요.

오늘 우리도 인생을 살다가 이런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지치고 힘든 삶을 살다가 이제 좀 살만 하다 싶었는데 그만 눈앞에 떡하니 벽이 서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만저만한 벽이 아니라 아예 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여리고성 같은 인생의 벽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TV에 그야말로 기구한 운명에 처한 사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고아로 자란 한 남자가 역시 고아로 자란 여자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돈 벌면 결혼식을 올리자며 결혼식도 미룬 채 이를 악물고 돈을 벌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을 것 못 먹어가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습니다. 이렇게 고생고생 하다가 여러 해 만에 비로소 작은 공장을 운영하게 되었고 그동안 미루었던 결혼식 날짜도 잡고 이제 정말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며 단꿈에 젖어있을 때 그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오래 전부터 몸이 안 좋았지만 병원비 아낀다며 약만 사먹고 버텼는데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보니 암 말기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불과 몇 달 살지 못할 것이라고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결혼식도 못 올리고 죽을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소설 같은 인생이 정말 있을까 싶겠지만 정말 실화입니다. 고생이 좀 끝나나보다, 이젠 좀 살만한가보다 하는데 갑자기 인생의 벽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도 절대 넘을 수 없는 견고하고 높은 성벽입니다. 어디 이 사람 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도 세상을 살다가 이 여리고성 같은 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에게는 절망뿐입니다.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이제 죽을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은 참 이상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매일 여리고성 주위를 한 바퀴씩 돌라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을 그렇게 하다가 일곱째 날이 되면 성을 일곱 바퀴 돈 후 나팔을 불고 큰 소리로 외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성이 무너진답니다. 참 웃기는 일이지요. 수백만이 쳐들어가도 안 무너질 그 견고한 성이 기껏 나팔 불며 빙빙 돌면 무너진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정말 엿새 동안 여리고성을 한 바퀴씩 돈 후 일곱 째 날에 일곱 바퀴 돌고 나팔 불고 큰 소리로 외쳤더니 그 난공불락의 성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어떤 이들은 때마침 지진이 나서 무너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정말 이 사람들 말처럼 지진이 난 것일까요? 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해보니 큰 지진의 흔적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때마침'은 아닙니다. '우연히'도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사전에 결코 '때마침'이나 '우연히'라는 낱말은 없습니다. 우연히도 아니고 때마침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상식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과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고, 의학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안 된다고 해도,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 봐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데도 하나님이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오늘 내 앞을 가로막은 홍해바다는 무엇입니까? 나를 전후좌우 사면초가로 가로막은 일들은 무엇입니까? 내 앞길을 가로막은 여리고성은 무엇입니까? 나를 절망케 하는 높은 벽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젠 끝이라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우리를 주저앉게 만드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그 홍해를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도 내가 아니라 나는 손 하나 까딱 안 하는데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고난이 닥쳐오고 실패가 닥쳐와서 홍해 바다가 앞길을 막거든 바다보다 크고 넓으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 여리고 성벽이 가로막으면 그 성벽보다 높고 강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역경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원수를 넘어뜨리고 모든 불가능을 넘어서게 하는 승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여러분과 제가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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