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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월을 아껴라 (엡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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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15) 세월을 아껴라

  인터넷 검색란에 ‘가장 빠른 새’를 쳐 보았습니다. 새들이 얼마나 빠르게 날까요? 한번 추측해 보십시오. 통신용 비둘기 전서구는 1시간에 150km를 간다고 합니다. 열대 지방의 큰 바다에서 사는 군함조는 시속 418km의 속도로 난다고 합니다. 군함조보다 더 빠른 새가 있다고 합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 바로 ‘눈깜짝할새’입니다. 어느 날 ‘눈깜짝할새’에게 ‘세월’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누가 더 빠른가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눈깜짝할새’가 세월을 보고 놀라, 그냥 줄행랑을 쳤다고 합니다.

  시간은 정해져 있고, 세월은 참 빨리 흘러갑니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항상 부족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시간입니다. 어떻게 해야 지혜롭고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4당 5락.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 그 때 혼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사회에 나와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5시간 이상 자는 사람은 성공할 생각을 하지 마라. 여러 번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 안하면 될거 아냐.’

  나폴레옹은 3시간 잤다. 누구는 4시간 잤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또 지껄였습니다. ‘그래서?’ ‘나 보고 어쩌라고?’ ‘잠 좀 자자.’

  사실 게으른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잠언 26:14에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게을러서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뒹굴거리는 꼴이 문짝이 열렸다 닫혔다 하며 도는 꼴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 보고 있으면 정말 돌아버리겠지요.

  그런데 몇 년 전 이런 책이 유행했습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가 1998년에 쓴 책입니다. ‘빨리 빨리’의 가치 속에 살던 우리 한국 사람에게 ‘느림’의 철학을 가르쳐 주어 충격을 주었습니다.

  올해도 기젤라 크레머가 쓴 ‘게으르지 않고 느리게 산다는 것’이란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혼의 균형을 잡아, 행복과 건강을 누릴 수 있을까?” 오랫동안 찾은 그녀의 대답은 예상 외로 단순했습니다. 그저 우리의 일상과 생활을 게으르지 않되, 단순화하고 느리게 살아라. 실제 책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는 느리게 살아가기, 단순하게 살아가기, 휴식하고 명상하기였습니다. 욕심은 최소화하고, 늘 자신을 개발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라고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부지런히 살아라’ 말하고, 한 쪽에서는 ‘느리게 살아라’ 합니다. 대체 어느 것이 맞습니까? 세상 사람은 이 두 가지 입장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 부지런하게 살면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느리게 살아야 창의력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참 세월이 빠릅니다. 9월은 추석 연휴 때문에 더 빨리 도망갔습니다. 올해도 3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유수와 같이 빠른 세월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참 악하다.”(엡 5:16) 무슨 말씀입니까?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다른 성경에서는 ‘기회를 사라’ ‘기회를 잡으라’ ‘기회를 가장 잘 활용하라’라고 번역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꽉 찬 때가 있습니다. 헬라인들이 말하는 소위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달력의 시간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사건 중심의 시간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기회를 잡아라’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유수와 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기회를 잡아야 할까요?

  첫째, 우리 성도들은 기도할 기회를 잡아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혼자 일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일하면, 내 책임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일하면, 하나님도 더불어 책임을 지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절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구하는 것이고, 구하는 것은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구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고 나서는 열심히 구했습니다. 응답도 빨랐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제 기도대로 응답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응답되지 않는 것이 응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름을 붙였습니다. ‘거절의 응답.’ 요즘은 주로 하나님의 임재부터 구합니다. 살 만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구할 것이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끊어지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부터 구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제 방에 이런 팻말을 서 붙이려 합니다. ‘묵상의 집.’ ‘임재의 방.’

  둘째, 우리 성도들은 신령한 것을 추구할 기회를 잡아야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3:1-3절 말씀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위의 것, 하늘의 것, 산 것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뭐든지 심는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둡니다. 갈라디아서 6:8 말씀에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구하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구하리라.” 하였습니다. 심는 대로 얻습니다.

  목회 하면서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유익은 죽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평등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인간적으로 변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흙으로 변하는 인생을 보며 정말 썩어질 것을 위해 투자하지 말아야 하겠다 결심하고 결심했습니다. 그 대신 평생 썩지 않을 것, 하늘의 것, 종말의 것, 신령한 것, 최후에 남을 것을 추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셋째, 우리 성도들은 선을 행할 기회를 잡아야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9 말씀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였습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제사장과 레위는 바빴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자기 여행의 스케줄을 어느 정도 망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이웃을 도울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 시간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시고 뭐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에이, 쯧쯧, 제사장, 레위, 헛살고 있네. 아 반가와라. 제대로 사는 친구가 하나 있네.

  선이 무엇입니까? 선행이 무슨 뜻입니까? 선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행이 다 유익한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적 감상으로 하면 오히려 사람을 망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는 한에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선을 베풀다가 도와준 사람을 망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미국 공항에서 참 감동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물을 사러 편의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지체 장애인이 열심히 카운터에서 바코드를 찍으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복지 정책에 탄복했습니다. 보조금을 주는 것도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일할 기회를 주는 것은 더 선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밥을 흘립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먹여 줍니다. 왜요? 아이를 도와 주고 싶어서. 아이에게 선을 베풀려구요. 그러나 이것은 아이가 실수를 통해 배울 기회를 빼앗는 일입니다. 아이에게 선을 베푼다 생각했으나 사실은 아이의 성장을 방해한 것입니다.

  절대 빈곤은 도와야 하겠지요. 그러나 사람의 독립과 성장을 방해하는 선행은 안하니만 못합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중세 수도사들은 자기를 ‘viator’, ‘나그네’로 불렀습니다. 역시 ‘세상을 지나가는 자’라는 뜻입니다.

  한비야 씨가 오지 여행을 잘 다닙니다. 언젠가 책에 이런 말을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여행을 하면 우리가 꼭 필요한 것이 얼마 안된다는 것을 경험한다. 사는 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여행은 너무 익숙한 보금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를 생각하며 미리 떠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가령,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기도하는 일과 신령한 것을 추구하는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우리가 행할 때마다, 그 순간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 점이 하나씩 찍힐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에 투자하며 살다 보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점이 모아지고 이어져서 굵은 선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선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나 자신을 이어주는 시간의 줄입니다. 이 선은 내 삶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성적 삶을 살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후에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서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을 1:1로 대면할 때, 이 선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음으로 우리는 덜 후회스럽고 덜 부끄럽게,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세월을 이 시간의 영성으로 충실히 산 자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

  세상 사람들은 자기 성공을 위해 시테크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신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공을 위해 영적 시테크를 하시기 바랍니다. ‘빨리 빨리’ 바쁜 삶보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실속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가을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곧 가을이 깊어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기회를 잡읍시다. 신령한 것을 추구할 기회를 잡읍시다. 선을 행할 기회를 잡읍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종착역에서 좋은 결실을 맺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송인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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