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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간증 설교 (행 21:37 ~ 행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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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간증 설교 (행 21:37 ~ 행 22:21)

정말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그냥 모든 것 다 버려두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던가요? 정말 뛸 듯이 기쁘고 즐거울 때 또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 기쁨과 즐거움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하지는 않는가요? 사람이 참으로 이상한 것이 마음으로는 정말 힘들어서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싶은 그런 때 그냥 다 버려두고 떠나버리고 싶어 하는 바로 그런 순간에도 어떤 미련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그나마도 못하게 되는 때가 많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미련과 두려움이란 이 두 가지가 언제나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왜 사람들은 좋은 일보다는 나쁜 생각부터 하게 되는 걸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토록 미련을 가지게 만드는 것일까요? 무엇이 행복한 그 순간에 오히려 두려움을 가지게 만드는 것일까요?

위기는 오히려 기회의 때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장 힘든 때가 오히려 가장 복된 때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긍정의 눈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긍정의 눈으로 보기 보다는 부정의 눈으로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어떤 까닭인가요?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절망의 때야말로 주님을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때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 곁에 계시건만 우리는 그 주님을 종종 잊고 삽니다. 그리고 혼자서 몸부림을 치다 못해 지쳐 쓰러지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곁에 계신 주님을 지금까지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깨닫고 사는 사람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굳게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주님만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우리는 결과로서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은 언제든지 함께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며 절망의 때에도 오히려 주님을 전하는 기회를 삼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항상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병영 안으로 끌려들어갈 때 천부장에게 한 말씀 드릴 수 있겠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천부장의 말이 정말 뜻밖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얼마 전 폭동을 일으키고 4,000명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이집트 사람인 줄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가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임을 밝히며 자기를 폭행하던 사람들에게 말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허락을 받고 난 다음 바울은 층계 위에 올라서서 손을 내저어 무리를 조용하게 한 다음 히브리말로 연설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히브리말로 연설하는 것을 듣고는 더 조용해지지 자기가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즉 자신의 간증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폭행하도록 선동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를 않습니다. 자기는 너무 억울하고 분하다는 말을 할 법도 한데 그는 결코 그런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기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할 뿐입니다.

사실 바울은 참으로 억울합니다. 자기는 이방인을 성전 뜰로 데리고 들어간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정결 의식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지례짐작으로 바울을 모함하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끌어내어 죽도록 두들겨 팼을 뿐입니다. 지금도 온 몸에는 얻어맞은 자국으로 가득합니다. 거기다가 로마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를 하지를 않습니다.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통해 자기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정말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그 억울한 사정을 먼저 말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어찌 억울하다는 말 한 마디,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애매하게 욕을 먹고 두들겨 맞았다면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온 몸이 얻어맞은 상처로 인해 욱신거릴 때 어찌 분한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내가 욕을 먹고 얻어맞을만한 일을 했다면 모릅니다. 그것이 아니라 정말 내 할 도리를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내 할 최선을 다했음에도 여전히 욕을 먹고 있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것도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하다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욕을 먹는 것인가? 주님을 위해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데도 주님은 그런 나를 어찌 지켜주시지 않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섭섭하기도 알 것입니다. 정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주님 이게 다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인데요? 그런데 어찌 제가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합니까?” 당연히 그렇게 외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바울 역시 누구를 위해서 그런 꼴을 당하는 것입니까? 주님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아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이런 꼴을 당할 때 어찌 억울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자기를 힘들게 한 사람들에게 참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 베푸는 사랑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무감각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억울할 일을 당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랑으로 대하고 그 사람을 선대하게 되면 이윽고 때가 되면 그 사람들이 그 사랑에 거꾸러질 때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19절로 21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수 갚는 것이 나에게 있으니 내가 갚을 것이라. 여러분은 이렇게 하십시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당하는 많은 고난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있기에 그런 권면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억울하게 어떤 일을 할 수밖에 없다면 오히려 기쁨으로 그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이왕 하는 일 불편한 마음으로 하게 되면 그 하는 일도 엉망이 되고 그 몸도 더 힘들 뿐입니다. 하지만 이왕 하는 일 기쁨으로 하게 되면 내 마음도 더 편해지고 오히려 몸도 더 상쾌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하라는 겁니다. 언제까지 하기 싫다고만 하면서 뒤로 미루겠습니까? 설거지가 하기 싫다고 언제까지 쌓아놓기만 할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합니까? 하기 싫은 일부터 해치우는 것입니다. 그것도 입을 삐쭉이 내밀고 하지 말고 오히려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마음이 상쾌해 질 것입니다.

오히려 죽도록 싫었던 일이었는데 기쁨으로 하는 동안 그 일이 즐겁게 바뀔 것입니다. 싫은 걸 어떻게 하느냐고요? 미운 걸 어떻게 하느냐고요? 그렇기 때문에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랑의 주님을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너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주님을 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처럼 내가 가장 힘든 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조차도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의 간증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바울은 먼저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자기는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요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그 밑에서 조상의 율법대로 엄격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요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었던 사람이라고 자신을 먼저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그 열심에 대해 설명하기를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하여 그들을 죽이기까지 했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그들을 붙잡아 감옥에 넣었던 사람이요 이에 대해서는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바울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언해 줄 것이라고까지 합니다.

이렇게 간증은 내가 변화되기 전의 모습에 대해 간략하게 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과거의 못된 모습에 대해서 너무 자세히 그리고 오래 동안 설명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단지 과거에 나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오히려 예수에 대해 핍박하는 사람이었다는 간단한 말로 과거의 나의 모습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어떻게 내가 변화 받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자기가 어떻게 변화하게 됐는지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다마스커스로 가게 된 이유를 먼저 설명합니다. 자기는 다마스커스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는 공문서를 받고 그곳에 있는 신자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려와서 벌을 받게 하려고 다마스커스로 떠났다고 먼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된 과정을 자세히 설명을 합니다. “정오쯤 되어 내가 다마스커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밝은 빛이 나를 둘러 비췄습니다. 나는 땅에 엎어졌고,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분이 내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빛은 보았으나,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은 듣지 못했습니다. 나는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일어나 다마스커스로 가거라. 거기에 가면, 네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그 빛의 광채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커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계속해서 자기가 어떻게 다시 눈을 떠서 보게 됐으며 왜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됐는지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다마스커스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사는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그 곳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나를 찾아와 내 곁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시오’ 하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떠 그를 보았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가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당신을 택하셔서 그분의 뜻을 알게 하셨고, 그 의로우신 분을 보게 하시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습니까? 일어나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죄 사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다시 한 번 자기를 보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 과정과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그 후,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 뜰에서 기도하고 있는 도중에 어떤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환상 중에 주님을 보았는데,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나라. 이 곳 사람들은 네가 나를 증언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습니다. ‘주님, 이들은 제가 여러 회당을 돌아다니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때리기까지 한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증인인 스데반이 죽임을 당할 때에 제가 그 자리에 있던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때, 거기에 서서 그들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찬성했으며 그를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맡아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가거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들에게 보내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간증 역시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과정과 그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내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야 됩니다. 그럴 때 듣는 사람들이 아하 나도 그렇다면 저렇게 변화될 수 있겠구나 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간증하는 일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기도 합니다. 하지만 간증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 과거의 모습과 그리고 지금의 모습 그리고 그 사이에 그렇게 변할 수 있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주체가 되는 예수님을 전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간증을 통한 복음 전도가 되겠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는 내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삶의 변화에 대해 전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는 이랬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이렇게 달라졌다고 그 달라진 내 모습을 그 좋아진 모습을 전해주면서 그것이 바로 내가 만난 예수님 때문이라고 전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전하는 가운데 주 성령께서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강권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실패가 두렵습니까? 아니면 듣는 이들이 듣고 난 다음에 나를 힘들게 할 것이 두렵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내 책임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으로 내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전하기 전에 주님께서 그 안에서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써 예수를 전했다면 그 다음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반응이 싸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들 역시 우리들처럼 될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수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큰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이렇듯 우리의 삶의 체험을 전해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더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그 귀한 생명을 우리는 주님께 바쳐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역시 우리들에게 온 천하 만민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주님이 기뻐하시는 소중한 생명들이 주님 앞에 이르도록 이끄는 일에 우리 모두가 힘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소식을 들었다면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천국 이야기보다 더 좋은 이야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보다 더 귀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더군다나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예수를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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