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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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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18)

1. 마라톤과 같은 인생

몇 년 전, 미국 뉴욕에 있는 CBS 방송국에 한 시민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 시민은 “아직도 마라톤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 여자 선수가 아직도 허드슨 강변 마라톤코스를 달리고 있다”, 그러니 “마지막 선수가 달리는 모습을 CBS가 생방송으로 내보내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바로 그 날 오전 9시에 뉴욕에서 ‘시민 마라톤 대회’가 열렸습니다. 오전 9시에 시작된 마라톤 경기는 3시간이 지난 12시쯤에 다 끝났습니다. 전화가 걸려온 그 시간은 밤 7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선수가 달리고 있다니요? 그리고 그 마지막 선수가 달리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내보내라니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거기다가 그 시간은 방송으로는 최고 심혈을 기우려야하는 프라임 타임, 즉 황금시간대로서, 시청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각 방송사마다 최고의 프로그램을 내보내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CBS 측에서 시민의 제보를 확인해본 결과,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정말 아직도 마지막 선수가 마라톤 코스를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황금 시간대에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들을 내보내고 있던 CBS 측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간부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마지막으로 달리고 있는 선수의 골인 장면을 방송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뉴욕 시민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 직전, 한 여대생이 이 대회에 참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그를 말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장애인으로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마라톤에 참여하기 위해 이미 1년 전부터 훈련을 해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장애인인 이 여대생이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라톤 대회가 끝난 줄 알았고, 이미 날이 저물어 마라톤 대회의 열기도 식은 채, 또 다른 세계로 빠져 들어가던 시각, CBS에 걸려온 전화로 인해 전 뉴욕 시민은 아직도 계속되는 마라톤 대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밤 8시 54초, 장애인인 여대생이 골인 지점에 들어왔습니다. 11시간 54초 만에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것입니다. 그녀의 골인하는 장면은 CBS방송의 전파를 타고 미국 전역에 보내졌습니다. 이 장애인 여대생은 장애를 극복했다는 점, 인간 승리의 본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아주 대단했습니다. 또 ‘인생은 훈련하고 또 훈련함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이룰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이룰 수 있으며, 그렇게 할 때에 인생은 보다 값지고 훌륭하게 된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이 젊은 대학생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또 다른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삶은 마라톤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 바울은 자신의 삶을 늘 마라톤에 비교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이 달리기를 계속 하리라고 결심하고서 이러한 자신의 포부를 여러 곳에서 밝혔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신앙생활 혹은 인생이 왜 마라톤에 비유되는지, 그리고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 마라톤을 어떻게 달려야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성도의 구원은 계속 된다.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인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1절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또 어떻게 사셨는지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敎理的으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지만,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하신 교리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되신 것으로만 끝낸 분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한 번 사람이 되셨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이죠. 즉 예수님의 생애는 한 번 시작한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그것으로 만족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표지점에 이르기까지 죽을힘을 다해, 아니 죽을 때까지 애쓰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난 다음에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신 것을 통하여, 이것을 보고 듣고 알고 믿는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처럼,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1) “구원을 이루어가라!”

성도 여러분, 20대나 30대 어른이, 아니 초등학교 어린이가 기저귀를 차고 우유병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상상이라도 해보셨는지요? 기저귀나 우유병은 보통 1~2년, 아무리 늦어도 3년 안에는 다 뗍니다. 그런데요, 오늘 수백 명 수천 명의 어른들이 기저귀차고 우유병을 들고서 유유히 모여드는 곳이 있습니다. 양복을 입고, 또 곱게 화장을 했지만, 걸음걸이가 불편하고, 우유병을 들거나 입에 물고 다니는 곳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제법 오래 전부터 교회를 향한 걱정스러운 진단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처음 예수 믿던 그 수준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나온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숙하고 변화해가는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그런데도 믿기 전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인격과 생활이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가집니다. 하나는 “이미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또 다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두 번째는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의문, 즉 “이미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또 다시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답을 내려 봅시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거듭난 그 구원, 즉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본문의 구원이 이런 의미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아직 구원받지 않은 불신자에게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구원은 성도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장차 주님을 뵙게 될 때, 주님이 오실 그 날에 갖추어야 할 완전한 구원을 말합니다. 이 구원은 주님을 믿는 그 순간에 시작되어 계속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15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흠이 없고 순전하여”,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빛들로 나타나며” 등입니다. “흠이 없고 순전하다”는 것은 나무랄 것이 없고, 순수하고 신실한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원래 가장 순수한 포도주나 아주 순도 높은 금속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라고 할 때 흠이란, 얼룩이나 오점이나 티가 없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구원이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룩이나 오점이 전혀 없고 나무랄 것이 없는 순수하고 신실하고 사람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보시나 세상 사람들이 보나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완전케 되는 것’이며, ‘이미 시작된 구원을 끝마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敎理的으로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성도가 꾸준히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마산 발 서울 행 고속버스를 타고 가만 앉아 있으면 서울에 도착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성도의 삶은 마산을 출발해서 서울까지 달려가는 마라톤과 같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천국에 이르기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의 삶을 달리기나 마라톤에 자주 비유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기까지 온전한 구원을 이루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이 잘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애쓰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버스를 타고 여행을 갈 때, 여흥시간을 마련해서 누군가 앞에서 인도하지 않습니까? 노래라도 한 마디 시킬라치면 그것을 귀찮아하고, 자신을 그냥 목적지까지 눈감고 가도록 내버려 달라고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백성들의 삶은 그와는 다릅니다. 내가 해야 할 것이 분명 있으며, 그것을 열심히 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고 할 때에 여러분에게 “원망과 시비가” 없기를 바랍니다(14). 성도는 어떤 일이든지 중얼 중얼거리거나 투덜대면서 일해서는 안 됩니다. 불평과 불만이 성도에게는 합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의를 제기하고 논쟁을 벌이지 말아야합니다. 여러분의 구원이 완성되도록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불평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길입니다.

2) 구원을 이루어 가는 방법

그렇다면 이러한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가야 할까요?

❶ 구원을 이루어가는 첫 번째 방법은 “복종”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복종해야할 일차 대상은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이 그들과 같이 있을 때, 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과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복종했던 것처럼, 이제 그들과 함께 있지 아니할 때에도 그때와 꼭 같이 항상 복종하라고 권합니다. 여러분, 학창 시절에 선생님이 잠시만 교실을 비워도 소리를 지르면서 떠들고 장난쳤던 경험이 있으시지요? 선생님이 잠시 나가신 틈을 타서 막 장난을 시작하려고 “야”하고 일어섰는데, 뒷문에서 선생님이 제 이름을 부를 때,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본문은 선생님이 교실에 계실 때나 선생님이 계시지 않을 때, 그것에 상관없이 행동해야 하는 것처럼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변함없이, 항상, 그리고 한결같이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에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복종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께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하라고 합니다. “두렵고”라는 말은, 과도하게 신경을 써서 신경과민성 질병에 걸리는 것처럼 그 정도로 신경을 써서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떨림으로”라는 말은 공포심을 의미합니다. 노예가 주인에 대해서 겁을 먹고, 주인이 내린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그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하여 벌벌 떨면서 일하는 모습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명령에 대해 그렇게 순종하고 있습니까?

주전 300여 년 전, 알렉산더 대왕은 그의 군사력과 지혜와 외교로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을 정복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병사들을 이끌고 강력한 방어벽을 치고 있는 한 성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격전에 먼저 알렉산더는 큰소리로 성주를 만나겠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성주가 나타났습니다. 알렉산더는 명령했습니다. “당장 항복하라!” 성주는 비웃었습니다. “내가 왜 당신에게 항복해야 합니까? 우리의 군대가 훨씬 많아서 당신들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당신이 왜 항복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 주지!”라고 말한 후, 군사들을 한 줄로 서게 한 뒤 30미터도 넘는 절벽으로 곧바로 행진을 시켰습니다.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알렉산더의 군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주저하지 않고 행진하여 절벽 밑 바위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오금이 저리는 충격이었습니다. 이렇게 열 사람이 떨어져 죽은 뒤 알렉산더는 나머지 군인들을 멈추게 하고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이것을 본 그 성의 성주와 군인들을 그 자리에서 알렉산더에게 항복했습니다. 알렉산더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사람들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알렉산더의 군인들이 그의 명령에 복종한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십니까? 부하가 상관에게 복종하듯, 노예가 주인에게 복종하듯, 그들이 명령에 대해 가졌던 그 떨림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와 같이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하여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❷ 구원을 이루는 두 번째 방법은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흠이 없고 순결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전혀 나무랄 것이 없고, 순수하고, 신실하고, 얼룩이나 오점이 전혀 없는’ 성도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부터 강조하신 것이 바로 이 거룩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거룩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치관, 삶의 방식, 그들의 문화와 구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과거와 구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죄와 구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은 적극적으로 하나님 쪽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이 세상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성도를 강력한 힘으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도들이 자꾸 끌려가고 그쪽으로 기울어져간다고 해도 이 세상은 잘못되어 있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15절은 이 세상을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했습니다. “어그러지고”란 것은 ‘구부러진’, ‘기형의’ 뜻인데, 특히 이 말은 행실이나 행동이 잘못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비뚤어지고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거스리는”이란 뒤틀리고 꼬인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특히 그 본성이 잘못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언젠가 뉴스에 보니까, 어느 지하철에서 경로석에 앉았다고 야단치는 할아버지를 뒤따라가서는 계단에서 그 노인을 밀어버린 한 중학생에 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꼬여 있습니까? 말을 해도 베베 꼬인 말을 하는 사람,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익숙한 사람, 하나의 사건을 대할 때에도 좋은 것보다는 그것을 여러 가지로 왜곡해서 보는 것이 일상화된 시대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비록 이렇게 비뚤어지고 왜곡되고 부정적인 시대를 살아간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흠이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구약의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 6:5을 보면 그의 원수들이 다니엘에게서 ‘고소할 틈을 발견치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다니엘은 온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안과 밖에 비난이나 비판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는 말입니다. 즉 성도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도 거룩해야 하고, 세상이 볼 때에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이 세대에서 순결의 모델이 되십시오. 진실의 모델이 되십시오. 정직의 모델이 되십시오. 거룩하십시오. 깨끗하십시오. 거룩을 위하여 몸부림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도가 구원을 온전히 이루는 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주님과 그 말씀에 복종하기 위해 힘쓰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를 쓰야한다는 것입니다.

3) 구원을 이루어가도록 도와주시는 분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성도가 이와 같이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절대복종과 절대순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절망적이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13절 말씀처럼 성도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 대하여 소원, 즉 목표를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목적대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이죠.

美國의 두 번째 큰 도시인 LA에는 강이나 상수원이 없습니다. 원래가 물이 없고 메마르고 건조한 사막지역입니다. 즉 LA는 원래 기온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고, 또 상수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LA가 지금처럼 살기에 적합한 기후와 마르지 않는 상수원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요? LA 동쪽 뒤에는 “산타페”라는 만년설로 덥힌 거대한 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산 너머로는 거대한 모하비 사막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모하비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풍이 산타페 산꼭대기의 만년설을 녹여줌으로서 LA의 기온이 그렇게 살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주고, 그 녹은 물이 흘러내려와 생활용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건조하고 메마른 광야 같은 세상, 그리고 불모지 같은 우리의 삶이지만, 살기 좋게 만들고, 생수가 늘 흐르게 만들며, 삶이 풍성하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여러분을 돕고 계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은 가능한 일이고, 장차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온전한 구원을 향하여!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완전하게 될 때까지 ‘계속 이루어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그냥 가만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노력해야하는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은 60대 노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골인지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마라톤 선수라고 여겼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왔고, 앞으로도 계속 달릴 것입니다. 그는 쉬지 않고 천국에 이르는 그날까지 달릴 것입니다. 이 바울이, 아니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계속 달리라고 말합니다. 장차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말이죠!

혹시 여러분 가운데 주저앉아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쉬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적당하게 놀 것 다 놀고, 즐길 것 다 즐기고, 세상과 타협할 것 다하면서, 신앙의 마라톤을 하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그런 분은 골인지점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30km 지점을 지나자 브라질선수 "디다"가 질주를 해서 선두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결승점에 도달하기 직전 한 괴한이 나타나 그를 방해하는 바람에 우승을 놓친 황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잘 달려 주님 앞에 서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오늘 여러분을 향하여 ‘여러분도 그렇게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이르는 그 날까지 쉬지 않고 달리고, 여러분의 골인지점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기까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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