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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하는 믿음 (히 11: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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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믿음 (히 11:32~40)

너무 많아서

그동안 <믿음의 전당>이라는 제목으로 히브리서 11장을 열다섯 차례에 걸쳐 설교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뭐 그리 많이 했냐며 놀라지만 사실 열다섯 번으로 어떻게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다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열다섯 번이 아니라 백 오십 번을 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 32절에서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열다섯 번에 걸쳐 살펴본 인물들 외에도 또 어떤 믿음의 사람들이 있는가? 기드온과 바락, 삼손, 입다 같은 사사들도 있고, 다윗 같은 임금도 있고, 사무엘과 선지자들도 있는데 이들 모두에 대해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구약에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기에 미처 그들을 다 다룰 수 없다는 것이지요. 신약에 보면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 한 번 요한복음 21:25을 찾아볼까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다 기록한 후에 맨 끝에 이 구절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가 기록한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신 일을 기록했지만 다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낱낱이 다 기록한다면 그 책 분량이 이 세상을 꽉 채우고도 모자랄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남기신 말씀과 행동이 너무 많아 도저히 다 기록할 수 없었다는 고충을 털어놓은 것이지요.

이런 말씀들을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각 방송국마다 무슨 '연예대상' '연기대상'이라는 이름으로 상을 참 많이도 줍니다. 상 받은 사람들이 앞에 나와서 수상소감을 할 때 주로 이런 식이지요. "오늘 제가 있기까지 도와주신 누구누구에게 감사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부모님이나 배우자에게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한 때는 미스 코리아 대회를 하면서 진선미에 뽑힌 아가씨들이 무슨 미용실 원장님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하곤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나를 지금까지 도와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 짧은 시간에 그 모든 사람의 이름을 다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생각해보세요. 남들 이름은 다 나왔는데 자기 이름만 쏙 빠지면 그 분들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그 짧은 시간에 그 분들 이름을 다 부를 수도 없고요. 실제로 영화상의 꽃이라고 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수상소감을 하는 사람마다 하도 소감이 길어서 시상식 시간이 점점 늘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수상소감을 45초 이내로 제한하고 시간이 지나면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울리면서 마이크가 스르르 아래로 내려가도록 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고마운 사람, 기억해야 할 사람은 너무 많은데 주어진 시간은 짧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 번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 제가 저 자리에 서서 소감을 말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고마운 사람, 기억나는 사람이 너무 많지만 그 이름을 다 부를 수 없기에 그 중에 정말 빠져서는 안 될 몇 사람만 뽑아서 수상소감을 해야 한다면 과연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걱정 마세요. 아무리 많아도 저희 교회 성도들과 장로님들 이름은 제가 꼭 부를 것입니다.

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32절 말씀이 나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32절을 볼까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라는 말은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당시에는 말을 하다가 시간이 부족할 때, 즉 수상소감 같은 것을 할 때 이 말을 썼습니다. 즉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낳아주신 부모님께도 감사드리고, 감독님께도 감사하고..." 하다가 45초가 지나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즉 이하 생략이라는 뜻입니다. 글을 쓰다가도 지면이 부족하면 이 말을 썼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지면 관계 상 생략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지면 관계 상 또 시간관계 상 도저히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다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그리고는 다 생략하고 딱 여섯 명만 더 언급한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짧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모자라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들도 앞서 열다섯 주 동안 언급한 믿음의 사람들과 견주어 결코 그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이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그 이름이 안 나오고 이하 생략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이 다 적은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너무 많아서, 도저히 다 기록할 수 없어서 생략한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그 이름이 안 나왔다 하더라도 여기 이름이 나온 사람들과 견주어 결코 부족함이 없는 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저는 거기에 우리의 이름도 들어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한참 무더웠던 지난 7월 8일 저는 이 <믿음의 전당> 시리즈 첫 설교를 하면서 이런 말로 설교를 마무리했습니다. 제가 설교원고를 그대로 읽어보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맺으면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믿음의 전당>이 마감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믿음의 전당>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사람들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며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여기 이름이 오를 사람들이 뽑힌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 하는 명단 뒤에 "믿음으로 아무개는..." 하고 누군가의 이름이 계속 더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이 믿음의 사람들 못지않게, 아니 그들보다 더 귀한 이름으로 <믿음의 전당>에 오르고 더 크고 귀한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참 중요한 말 아닙니까? 제가 설교해 놓고도 참 멋있는 말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을 기억하고 꼭 그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꼭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아직 마감되지 않은 이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꼭 올라가기 바랍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을 열다섯 차례나 설교한 이유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자, 그러면 이제 33절부터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의 모습을 간단하게 살펴볼까요? 여러분은 이제부터 조금 정신이 없으실 것입니다. 워낙 짧은 몇 절 안에 구약에 나오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집약적으로 다 요약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입니다. 조금 빠른 속도로 말씀을 풀어봅니다.

제일 먼저 33절에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구 얘기일까요? 분명치는 않지만 아마 앞서 나온 여섯 명 가운데 사사들과 다윗 왕의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비록 이 명단에는 생략되었지만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가나안으로 들어가 정복전쟁을 시작합니다. 이 때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정복사업은 열두 명의 사사들을 거쳐(비록 오늘 본문에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네 명만 대표로 나오고 있지만 말입니다) 다윗 임금과 그 아들 솔로몬 임금 때에 이르러 최고 절정에 달하여 그 영토가 엄청나게 커집니다. 즉 이들의 믿음은 다른 이방민족과 싸워 이기는 승리의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의를 행하기도 하며" 이것은 앞서 언급한 사사와 왕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의지해 의롭고 바른 통치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은 "약속을 받기도 하며"입니다. 사사와 임금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의지할 때 하나님이 이 나라를 지켜주시리라는 약속을 받아 그대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즉 사사나 임금 같은 통치자들이 누구를 의지했느냐는 말입니다. 통치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해서 나라를 다스릴 때 나라는 평안하고 부강했지만 반대로 자신의 힘만 의지하거나 다른 강대국을 의지하거나 우상을 의지할 때 나라는 큰 위기에 빠지거나 심지어 망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구약의 역사서라고 부르는 여호수아 - 사사기 - 사무엘상하 - 열왕기상하 - 역대기상하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 짧은 33절 한 절에서, 즉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라는 짧은 구절을 통해 여호수아서부터 역대기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약의 많은 책들은 한 마디로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임금이나 통치자가 믿음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즉 하나님만 의지하면 그 나라가 살고 부강해 질 것이지만, 반대로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을 의지하면(자신이나 군사력이나 강대국이나 우상이나)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함께하지 않으시냐의 차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12월이면 이 나라를 4년 동안 다스릴 대통령을 뽑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처럼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인을 뽑을 때도, 또 교회를 이끌어갈 담임목사나 지도자를 뽑을 때도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지도자가 누구를 의지하느냐, 무엇을 의지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사업을 할 때나 가정을 이끌어 갈 때나 무엇을 할 때든지 항상 누구를 무엇을 의지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누구 이야기가 나옵니까?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이건 쉽지요? 바로 사자 굴에 들어갔어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다니엘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바사의 관리들이 다니엘을 모함합니다. 누구든지 왕 이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넣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유일한 신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던졌는데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사자들의 입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다음 34절에 나오는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들 또한 다니엘처럼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다가 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털끝 하나 불에 타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은 모두 타협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도, 풀무 불에 던져져도, 그 어떤 환란과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이 반드시 눈동자 같이 지키셔서 보호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믿음대로 하나님은 이들을 보호하시고 결국 승리하게 하십니다. 믿음이 이긴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구약의 선지자들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이 죽이려고 쫓았고(왕상 19:2) 엘리사는 여호람 왕이 죽이려고 쫓았고(왕하 6:31)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왕을 피해 숨었습니다(렘 36:19, 26). 모두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다가 미움을 받아 그리 된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임금을 피해 달아납니다(삼상 18:11). 그런데 이렇게 한 나라의 절대권력자인 임금이 죽이겠다고 쫓아왔어도 그들의 목숨을 빼앗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중에는 쫓아오던 왕들이 비참한 죽음을 당합니다. 왜냐? 하나님이 보호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더니 그들을 미워해서 죽이려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방패요 피난처가 되셔서 끝까지 지켜주시고 나중에는 원수들이 오히려 망하게 하십니다. 승리의 신앙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성경에서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인데 겨우 300명의 군사들만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삼손은 머리카락이 잘려 힘을 잃고 눈까지 뽑혔다가도 민족을 구했고 에스더는 연약한 여자였지만 멸망 직전에 있는 유대인들을 구원합니다.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이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 여호수아나 사사들, 다윗 임금 같은 사람들이 이방민족을 믿음으로 물리친 사건을 뜻합니다.

35절에는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약에 이런 사건이 어디 나옵니까? 사르밧 과부와 수넴 여인은 죽었던 아들을 믿음으로 살립니다. 신약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음으로 오라비 나사로를 살립니다. 이 사건들은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죽음의 권세까지도 이기는 승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씀하는데 앞서 여인들이 믿음으로 죽은 자식이나 오라비를 다시 살렸습니다만 이 부활도 좋지만 많은 사람들이 육신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보다 "더 좋은" 부활, 즉 영원히 사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핍박과 환란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기꺼이 순교의 길로 간 사람들은 이 "더 나은 부활" 즉 영원한 생명을 믿었기에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배교하지 않고 순교의 길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36절, 37절, 38절에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교회사에 보면 실제로 수많은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이런 핍박과 환란을 당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느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조롱과 채찍질 당하고, 꽁꽁 묶여 감옥에 갇혔을 뿐 아니라 심지어 스데반 집사가 순교당한 것처럼 돌로 맞아 죽고,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톱으로 몸이 잘려 순교 당했다고 하는데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순교당하고, 칼에 맞아죽고, 양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누추한 옷을 입고 집도 없이 방황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박해를 피해 광야와 산과 토굴에 숨어 비참하게 살기도 했습니다. 정말 엄청난 핍박과 고난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정도 괴로우면 배교합니다. 자기 신념도 버립니다.

그런데 38절 첫 부분 괄호 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 말은 "그들에게 세상이 가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만약 세상이 더 가치가 있다면 어떻게든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겠지만 이들은 세상보다 더 가치 있는 천국과 영생을 믿었기에 기꺼이 박해 받고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맞아죽고 얼어 죽고 굶어죽어도 절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칼에 맞아죽고 맹수에게 물어 뜯겨 죽으러 원형경기장에 들어가면서도 찬송 부르는 그들을 누가 말립니까?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정말 무서운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인가요? 바로 승리의 믿음입니다. 지금 내가 비록 이렇게 고난당하고 죽임 당해도 반드시 하나님이 내게 승리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대가

39절과 40절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이 이상합니다. 분명 33절에는 이들이 약속을 받았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뒤에서 말한 약속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약속의 성취입니다. 즉 이들은 모두 구약시대 사람들이기 때문에 '구약'(舊約)이라는 말 그대로 옛 약속, 즉 율법이나 하나님의 계시를 통한 약속은 받았지만 '신약'(新約) 즉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한 새 약속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토록 귀한 믿음으로 핍박과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오늘날 신약시대에 살며 예수님을 알고 믿고 구원 받은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겠느냐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믿음의 모습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교하면서 제일 많이 나온 낱말이 무엇인지 찾으면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뭐지요? '승리'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가 "승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다른 나라들을 이기고, 핍박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또한 비록 지금은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승리했습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도 "승리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 믿음은 분명히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핍박이나 환란도, 어떤 원수의 방해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입니다. 이 힘은 누가 주느냐?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반드시 이깁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승리합니다. 지금은 비록 약한 것처럼 보이고 지는 것처럼 보여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 믿음을 가지셔서 최후 승리를 얻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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