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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제자도 (막 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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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도
마가복음1:16-20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3년 기간동안 가장 중요한 사역 집중하엿던 사역이 무엇일까요?
물론 3년기간동안 주님은 복음을 증거하시고 선포하시는 사역을 하셨어요. 많은 병자를 고치셨지요, 많은 이적과 능력을 행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보다 더 우선하고 집중한 핵심사역은 바로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함께 하는 사역이었습니다.

보통 세상에서 제자라는 말을 가장 잘 사용하는 곳이 학교입니다. 교사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제자라고 합니다. 또 어떤 기능이나 기술을 배우는 사람을 말할때에도 제자라고 합니다. 보통 제자라고 할 때 일정한 교사에 대한 학생,일정한 일에 대한 학생에 입장을 말할 때 보통 제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사용된 “제자”라는 의미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고백하고 전생애를 바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넓은 의미로 본다면 모든 성도가 제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자입니다.지금 여러분이 제자입니다. 지금 내가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내 자신이 주님의 제자라고 자신하면서 ‘내가 주님의 제자입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닮지 못한 약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자”라는 말을 모든 성도에게 적용하지 못하고 ‘특별히 주님을 위하여 훈련받고 주님을 위하여 헌신된 성도’들을 말할 때 오히려 ‘제자’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제자”로 남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미완성된 제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훈련이 필요하고 배움이 필요한 것입니다.우리가 성경에서 주님의 제자들을 보면서 기억할 것은 제자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3년 공생애 시간 중에 가장 관심을 갖고 시간을 투자하면서 자기를 믿고 따르는 제자를 세워가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마28:18“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했듯이 교회의 우선순위가 ”제자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소망이 없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여 주님은 제자로 삼았습니다. 주님께서 갈리리를 중심으로 시작한 공생애 사역의 대부분의 시간을 제자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내용들이 바로 제자들을 위하여 주신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이렇게 우리에게 기독교가 전달되고 세워질 수 있도록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제자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이 돌아가신 후 주님의 제자들이 남아 있지 않고 그래서 주님을 증거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주님은 이미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역사를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름받은 제자는 어떤 삶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성경 속에 주님의 제자들을 보면서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주님의 제자의 길이 어떤 길인지 다시한번 집중하여 그 길을 향해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 제자는 주님의 비젼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16-17절 주님이 갈리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그리고 비젼을 주셨습니다.
그 비젼은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죄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복음의 비젼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주신 것입니다.
과거의 제자들은 갈리리 바다
를 보고 고기잡이로 살았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매일 고기잡아서 그것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인생이었습니다. 내일과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어렵고 힘든 인생살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 비젼을 주셨습니다.

여기 주님의 제자들의 이력서를 보면 세상사람들의 안목에서는 “수준이하의 작품”일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의 안목으로 보면 주님이 주신 비젼의 가능성과 기대을 걸기 어려울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주님의 손에 붙들리어 이들은 비젼을 위해 만들어져갔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인격으로 비젼이 다음어져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롯유다를 제외하고는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면서 비젼을 성취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서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한 비젼을 보고 선택을 한 것입니다.
비록 지금 보기에는 별볼일 없습니다.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변화될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과거를 보면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모습을 본다면 그들의 실패작입니다.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주님이 선택한 제자들은 물론 과정에 있어서 실수도 하였지만 결국 그 비젼을 향한 선택의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한 지 만7년이 되어갑니다. 저는 한해를 보내고 한해를 준비할 때 모든 것을 “비교”하면서 측정을 합니다. 모든 것을 통계로 비교하여보면 객관성을 갖고 어느정도 알 수 있습니다. 자칫 교역자가 “주관성”으로 평가를 하면 문제가 많아집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이 일년동안의 여러 가지 데이터를 갖고 비교를 하여보면 부흥과 성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처럼 변화된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깊이,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을 섬기는 변화가 일어난 분들이 많습니다. 이제 그들이 주님의 비젼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드려지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결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주님의 비젼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고기낚는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세상 속에서 그냥 먹고 사는 인생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면서 비젼이 생겼습니다. 주님은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는 비젼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비젼을위해서 귀하게 드려질때 3천명 5천명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야고보가 주님의 비젼을 위해 순교하며 살아갈 때 그를 통해 복음의 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제 주님의 비젼의 사람들이 비젼의 향해 살아갈 때 세상에서는 무시당하고 비난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랬습니다. 바울이 그랫습니다. 본문에 제자들도 예외아니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와 핍박은 가장 가까운 사람 집안에서부터 찾아옵니다. 제가 주님의 나라에 저의인생의 비젼을 걸고 그 길을 가고자 할때 저희 어머니가 저를 반대했고 핍박했습니다. 어머니의 주장은 “이제 대학까지 가르쳐놓았더니 세상에 가서 돈을 벌지 않고 무엇하러 돈도 안되는 그 길을 가려고 하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책을 찢었습니다. 겨울날에 아파트 문을 걸고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설득시킬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비젼을 보았고 주님의 비젼이 나의가슴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비젼이 있엇기에 고생도 비난도 참고 이기고 나갈수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교사를 하다가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대학교때 여름방학이면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시간을 내어서 여름성경학교 교사와 주일학교 교사를 했습니다. 교사를 하면서 아이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자라가고 변하는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그래서 괘도에 찬송가를 그리고 인형극을 위해서 나무 판자를 만들고 해서 시골교회를 돌면서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찬송도 인도하고 설교도 인도하고 레크레이션도 인도하면서 주님의 나라 백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넘 보람있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때에 복학해서 30분 걸어사 가는 개척교회를 전도사님과 개척하면서 토요일 주일 청년회 주일학교를 섬겼습니다. 그랫는데 그것이 고생이 아니고 기쁨이었고 행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전적으로 비젼을 걸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고향목사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구할 때 주님이 저에게 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요한복음6장 27절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늘비젼을 위해서 우리는 부름받은 존재들입니다. 그 비젼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주님의 제자는 주님나라의 비젼으로 살아가는 자들인 줄 믿습니다.

2. 제자는 순종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부를때 제자들은 순종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시자 어떻게 순종합니까?
18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나름대로 직업도 있습니다. 가정도 있습니다. 그 현실의 여러것들을 고려하고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분명히 나름대로 이유도 있고 질문거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히브리서11장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합니다.
어떻게 즉각적으로 순종이 가능합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고민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전폭적으로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키면 ‘나중에 할께요’ 하고 습관적으로 일을 미루던 아들이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그런데 휴가를 나왔을 때에 완전히 달라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군대에서 무엇을 배운게냐?”
“예 지금 당장 순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주 중요한 말 잊을 수 없는 말 마치 성경에서 나오는듯한 말을 했습니다. “순종을 미루는 것이 불순종인 것을 깨달았습니다.혹시 지금 내가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지금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제자의 삶은 순종의 길입니다.
나중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지금 순종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순종하기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버리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내려놓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본문에서 ‘그물을 버려두고’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계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이익과 계산을 앞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계산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배와 그물과 세상의 것들을 버리면서도 그것을 아까와하지 않고 용기있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12명 중에서 제자의 길을 실패한 가롯유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계산에 빨랐습니다. 이익에 빨랐습니다. 경제논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주님의 길을 순종하며 갈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주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은 순종하면서 제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즉각적으로 순종합니까?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 주님의 일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라면 그분이 기쁘시게 여기는 일에 지금 여기에서 즉각적으로 순종하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사람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갈리리 바닷가에 찾아오시어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지금 여기에 찾아오셔서 나에게 역사하고 계시가는 영적인 관점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생각 나의 느낌 나의 경험이 아닌 주님이 통치하고 인도하시는 것임을 믿음으로 바라보시시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순종하면서 제자의 길을 걸어간 제자들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주님이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열매맺게 하셨습니다.

오늘 나의 삶 우리의 삶에 가장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를 찾아오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문제를 지적한다면 무엇을 문제삼을까요?
우리는 말씀도 읽습니다. 기도도 합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헌금도 드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고 진정 그분을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순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험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험은 나름대로 약점을 따라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통해 순종의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가롯유다에게는 돈을 통한 순종의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제자 도마에게는 합리적인 생각과 이성을 통한 순종의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순종을 가로막는 이런 약점들은 너무나도 견고한 진과 같아서 순종 앞에서 불순종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합니다.이런 시험 앞에서 믿음으로 철저하게 주님께 맡기면서 시험을 이기고 순종해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요 대학교수인 겔브레이스라는 사람이 있엇습니다. 이분이 자서전을 쓰면서 자기의 평생 비서요 가정부엿던 에밀리라는 여성에 대해서 찬사를 했습니다. 한번은 겔브레이스가 너무 피곤하여 잠깐 쉬겠다고 말하고 낮잠에 빠졌습니다. 그가 낮잠에 빠져있을 때에 미국대통령이 직접 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여기 백악관인데 겔브레이스 교수 좀 바꾸시오”
하지만 에밀리는 바꿔주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은 너무 피곤해서 잠시 쉬고 있습니다”
할수 없이 대통령이 신분을 밝혔습니다.
“나는 린든 존슨 대통령이요”
하지만 에밀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각하시군요.너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를 고용한 저의 주인은 각하가 아니라 교수님이십니다. 아무리 각하라 해도 저는 주인의 명을 먼저 따라야 합니다.
할수 없이 대통령이 나중에 다시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제는 정말 훌륭한 가정부를 두었더군.백악관으로 보내주면 안되겠나”

진정 주님의 제자입니까? 주님의 뜻이라면 주인되신 그분에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베드로처럼 아브라함처럼 즉각적으로 순종하면서 주님의 제자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3.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가는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따라가니라.여러분 제자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떤 길을 가십니까? 고난의 길입니다.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의 길도 고난의 길이요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신 길은 고난의 길이 끝이 아닙니다.죽음의 길이 끝이 아닙니다. 고난을 넘고 죽음을 넘어서 부활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늘보좌 우편에 앉는 영광의 길을 가셨습니다. 소망과 영생의 길을가셨습니다.

이제까지 제자들은 세상길로 갔습니다. 이제까지 제자들은 자기욕심 자기 야망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만남으로 주님의 진리의 길로 하나님의 나라 길로 인생의 방향이 바꾸어진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도 주님의 길을 가다가 중간에 낙오하기도 하였습니다. 포기할뻔도 하였습니다. 뒤로 물러날 뻔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승리하였습니다.

여러분 제자의 길 믿음의 길을 가는데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12장2-3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에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시기바랍니다. 제자는 주님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만약에 사람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고 현실을 보면 우리는 주님을 따라갈 수없습니다.
그런 농담이 있습니다. 외국 단체여행을 갔다오신 시어머니에게 며느리가 물었습니다. ‘어머니 구경 좋았어요’ 그러자 그 시어머니가 ‘나는 깃발만 구경해단다’라고 하더랍니다. 길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가이드가 든 깃발만 열심히 쳐다보고 길만 따라 다닌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깃발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의 깃발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곳에 주님이 역사하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명심할 것은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갈 때 함께 갈 때 주님을 잘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주님이 제자들을 한명만 부르지 않고 여러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왜 주님이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을 불렀을까요? 서로 함께 교제하면서 주님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외톨이가 되어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셧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교제하면서 주님을 믿음으로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과도 사귐이 있는 자이지만 주님의 자녀들 주님의 제자들과도 서로 사귐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주님과 사귐의 곳이기도 하지만 주님의 사람들과 사귐의 곳입니다. 주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통하여 주님깨 가기도 하지만 수평적인 주님의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주님을 함께 따르기도 합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이 카타콤에서 박해를 이기고 죽으면서도 믿음의 길에서 승리할 수 잇었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순교의 영화를 보면 그들은 서로 함께 주님을 따르는 사귐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람들과 교제를 통해서 얻는 힘은 주님이 주시는 힘과 다를바 없이 큰 것입니다.

여러분 그 교제에서 고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그 교제에서 낙오되지 않기를 바랍니다.교제에서 낙오되고 고립되면 여지없이 좋아할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마귀입니다.. 그리고 마귀는 고립된 성도 교제에서 이탈된 성도를 공격하여 자기에게 종노릇하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람들과 교제할 때 힘도 얻지만 상처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 속에서 믿음의 길에서 제자의 길에 낙오하는 분들을 대할때가 있는데 상처를 받아서 낙오합니다. 심지어는 제자훈련을 하다가 중간에 낙오하시고 상처를 경험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주님은 완전하지만 우리는 미성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너무 사람을 주님처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서로 사랑할 때 힘이 되고 격려가 됩니다.

인간관계를 서로 맺으면서 함께 주님을 따를때 한 그리스도인 전문가는 생산적인 관계를 위한 인간관계의 5가지 원칙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1.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
2. 많이 동의하고 적게 논쟁하라
3. 많이 고백하고 적게 비판하라.
4. 많이 웃고 적게 걱정하라
5. 많이 주고자 하되 적게 받고자 하라.

저는 이것을 우리가 적용한다면 갈등의 관계를 줄일 수 있다고 봅니다.

나를 찾아오셔서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하시고 주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제자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 이제 하늘나라의 비젼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즉각적으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제자로 날마다 승리하시는 삶의 증거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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