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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눅 6: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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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눅 6:17-26)

학생들이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게 될 때마다 의례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받게 됩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에는 선생님을 만났을 때 인사드리는 법과 '앞으로 나란히'를 어떻게 하는지부터 배웠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는 머리카락을 일 센티미터 이상 기르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가장 인상 깊은 주의사항이었습니다.
  고등학교는 기본적으로 중학교와 큰 차이는 없었지만 교련이라는 과목이 첨가되어 있었고, 그 첫 시간에 무서운 교관 선생님으로부터 한 시간 내내 군기를 바짝 잡혔었는데 평생 그렇게 긴장하면서 겁을 집어먹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입학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에는 마치 전혀 딴 나라에 온 기분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갑자기 완전히 자유로워졌고, '대학생의 학교생활이란 더 이상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고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생 자신이 자기 일을 알아서 하는 것'이 그날 들었던 유일한 주의사항이었습니다.
  '아, 대학생이 된다는 것이 이래서 좋은 것이구나.'라는 행복감을 그 첫 오리엔테이션 시간에서부터 실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본격화되어 갈 즈음에 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17절부터 19절의 내용이 그와 같은 분위기를 잘 반영해 주고 있는데, 거기에 기록하기를 "17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19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열두 제자를 임명하신 직후 예수님께서는 또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많은 백성"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습니다.
  전자는 '열두 제자' 외에 또한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던 '일반 제자'의 무리였고, 후자는 그저 예수님 소문에 대한 호기심이나 혹은 병 고침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찾아온 대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단 그 후자들을 상대로 병을 고쳐주시는 사역부터 행하신 후에, 이제 20절부터는 '제자의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20절로부터 6장의 마지막 절까지 이어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평지"(17절)에서 가르치신 것이라 해서 일명 '평지설교'라고도 불립니다.
  내용 자체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저 유명한 '산상보훈'과 비슷한 것이 있지만, '같은 설교'가 '달리 기록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대중들 앞에서 설교하신 경우는 수없이 많았을 것이며, 그러니 다른 장소에서 다른 청중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실 때에는 이전에 하셨던 설교 내용을 비슷하게 반복하시면서 또한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식으로 설교하시게 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공통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산상보훈이나 이 평지설교나 둘 다 "제자들"이 그 주요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산상보훈도 "제자들이 나아왔을 때"에 시작되었고(마5:1), 이 본문 역시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20절) 가르치신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앞에는 "많은 백성"들도 함께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당신을 본격적으로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을 염두에 두시고 바로 이들을 위한 특별교육을 시작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천국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앞으로 누리게 될 행복한 신앙생활에 대하여 영적 오리엔테이션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교육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바로 그 말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입생 제자들에게 베풀어주셨던 첫 교훈을 함께 상고함으로써, 오늘날 역시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들이 깨달아야 하고 누릴 줄 알아야 하는 '천국학교 학생들의 복과 특권'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제자가 받는 복은 '자기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인한 기쁨'입니다.

  우선 본문 20절과 21절에 "20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결코 가난 그 자체를 축복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질적으로만 따지면 분명히 가난보다는 부가 복이라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해석해야 할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기가 가진 것이 없음을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다' 함은, 바로 자신이 영적으로 너무나도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자각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바로 이런 마음 자세를 하나님 앞에서 지켜 나가는 것이야말로 그 영혼이 축복받기 위한 필수적 요건이 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다윗도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시 40:17)고 노래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함을 인식하는 것이 곧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고, 바로 그런 심령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생각해 주시고 도움과 구원을 베풀어 주시게 되는 까닭에, 본문에서도 '가난한 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라는 말씀 역시 물질적으로 가난해서 배고픈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산상보훈에서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굶주려 있다 함은 그것을 채워 줄 수 있는 어떤 '필요'가 극단적으로 강조되는 상황입니다.
  마찬가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어떤 '의'를 간절히 사모하고 절실히 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영적 굶주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치 배고픈 사람이 음식 냄새만 맡아도 정신이 번쩍 들듯이, 자신의 영혼 구원 문제로 인하여 굶주려 있는 사람은 바로 이 십자가 보혈의 냄새만 맡아도 그 앞으로 나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라는 말씀처럼, 죄로 인하여 죽어가던 자를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칭의'라는 이 엄청나게 좋은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역시 구원의 축복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복을 받게 될 울음이란 두말할 것 없이, 그 가난하고 주린 심령이 자기 죄를 자복하며 회개하는 가운데 애통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시 51:17)이라고 하실 정도로, 그런 울음은 하나님께서 실로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로 그런 회개의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만, '죄 사함'이라는 최고의 기쁨과 감격으로 인하여 진정 활짝 웃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자들은 이처럼 영적으로 가난함을 스스로 인식하고 사죄의 의를 갈망하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됨으로써 그 결과 십자가의 의를 입고 천당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정반대 현상만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24절과 25절에 기록하기를 "24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 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화 있을진저"라는 말은 어떤 위협의 말이 아니라 장차 받게 될 저주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생들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시는 말씀입니다.
  한 눈에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여기 "부요한 자"와 "배부른 자"와 "웃는 자"란 바로 앞에 나왔던 "가난한 자"와 "주린 자"와 "우는 자"와 정확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위로를 이미 받았다"고 경고하시는 말씀 역시 예수님께서 부 그 자체를 저주하시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물질적인 부요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력에만 의존함으로써 자기가 영적으로 얼마나 가난한 상태에 있는지를 전혀 모르게 되기 쉬운 것입니다.
  여기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라는 말은 '너희가 받을 것은 이미 다 받았다.'라는 뜻으로서, 물질만 가지고서 스스로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제 배부른 자" 역시 바로 이런 "부요한 자"의 내적 자기만족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영육 간에, 그리고 금세와 내세에 걸쳐서 온전히 풍족해질 수 있는 길을 전혀 알지도 맛보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의 재물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을 만족하는 인생으로 끝나 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요한 자'는 세상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졌는지는 몰라도 영적으로는 극히 결핍된 자, 하나님이야말로 자기가 살기 위해서 꼭 의지해야 할 구원주이심을 모르는 지극히 빈곤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물질만 가지고 자기 인생에 완전한 만족을 누리려 하는 사람은 결코 복 받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영혼이 완전히 굶어 죽어가고 있는 실로 극빈하기 짝이 없는 인생일 뿐이라고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 이제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리로다"는 말씀 역시 무슨 의미인지는 자명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은 웃지 말고 항상 근엄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런 말씀 하신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께서 책망하고 계시는 웃음은 바로 자신의 물질적 부요와 인생 향락에만 만족하여 웃는 웃음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울 줄 아는 예수님의 제자는 '최후에 웃는 자'가 될 수 있지만, 돈만 가지고 사는 재미에 웃고 있는 사람은 나중에 가서는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날'을 스스로 예약하는 것과 다름없는, 자기는 모르는 가운데 실로 비극적인 웃음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슨 복을 말할 때에는 항상 '그 무언가가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돈이 있어야 하고 명예가 있어야 하고 훌륭한 자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그 사람 복도 많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전혀 색다른 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물질적, 현실적으로 무엇을 넘치고 가지고서 이 현세에서의 삶에 만족스러워 하는 상태가 아니라, 영적으로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모자람을 자각하고 채워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우리의 스승이시면서 친구가 되어 주시고 구세주이시면서 또한 영원한 신랑이 되어 주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금세의 은혜와 내세의 구원을 통하여 완전한 만족과 넘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굳이 교회중심으로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않아도 내 인생 즐기면서 사는 데에는 아무 지장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 혹시 있습니까?
  예수님 없어도 내 인생 행복 위해서 다 내가 알아서 자수성가했다고 자화자찬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천당 구원의 기쁨이란 것이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꼭꼭 아껴 모아 두었던 돈 마음대로 쓰면서 내 여생을 즐기며 사는 재미에야 비길 수 있으랴 싶은 생각이 드는 때는 혹 없습니까?
  그처럼 자기 딴에 '부요한 자'는 실제로는 빈털터리 인생이며 그렇게 지금 스스로 '위로를 받고 웃고 있는 자'야말로 나중에 영벌의 지옥에서 이를 갈며 울게 될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경고해 주시는 말씀을 지금 새겨듣고 제발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런 '자기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함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기대하고 교회에 다니는 것은 아직 예수님 제자로서 입문도 제대로 못한 수준입니다.
  원로목사님께서 그토록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자기 인생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만족함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오는 '무리'가 아니라, 오직 자기 영혼의 가난과 주림을 인하여 애통할 줄 아는 '제자'에게만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확신과 그 기쁨부터 꼭 맛보고 누릴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제자가 누리는 특권은 '세상으로부터의 칭찬'이 아니라 '전도자로서 당하는 핍박'입니다.

  이것 또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자들에게 아예 처음부터 분명히 일러 주신 아주 특이한 오리엔테이션이었습니다.
  22절과 23절에 기록하기를 "22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당신의 제자가 됨으로써 본인이 받게 되는 가장 큰 복인데 비하여, 이제부터는 그런 구원의 확신을 가진 제자가 발휘해야만 할 사명 수행에 따른 특권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고 할 때에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사람의 일반적인 상식에는 전혀 맞지 않는 복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온갖 미움과 멸시와 냉대를 당하는 것은 삼척동자가 보아도 대표적인 저주이지 그것이 어떻게 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의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 "인자를 인하여"란 말에 유의해야만 합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라면 정말 당해서 싼 일이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일 것이지만, 이처럼 '인자' 즉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과 배척과 욕을 당하게 되는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자가 스승 때문에 욕을 듣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스승을 존경하고 있는 제자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스승의 제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듣지 않았을 욕이니, 진짜 제자로서는 오히려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당신의 이름으로 전도한다고 귀찮아하고 지옥 소리 한다고 싫어하고 예수쟁이라고 자기를 멀리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순간이야말로 "기뻐하고 뛰어 놀" 때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거부반응이야말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짜 제자가 되었다고 불신자들이 공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참된 선지자들이라면 예외 없이 당했던 일이었으니, 신약 시대 역시 예수님의 진짜 제자라면 또한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겪게 될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자들은 그와 정반대의 반응을 받게 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26절에서 "26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신자라고 하면서도 한 번도 냉대나 미움은 당해 보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만 받으면 이것은 결코 복이 아니라 위험의 적신호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물론 신자들은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딤전 3:7)를 얻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으로부터 '항상' 칭찬만 듣는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진짜 예수님의 제자처럼 살면 절대로 그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 때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기에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이 어떤 신자를 가리켜 '그 사람 된 사람이야, 앞뒤 탁 트인 사람이야, 우리하고도 화끈하게 통하는 사람이야.'라는 말들을 하게 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그 신자라는 사람이 불신자들의 말과 행실에 완전히 장단을 맞추고 있을 때에만 그런 반응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듣게 되는 칭찬이란 결코 '선한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가짜 신자가 되고 있다는 빨간색 불이나 다름없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구약 시대에 모든 '거짓 선지자'들이 들었던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레미야 5장 31절에서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라고 말씀한 대로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선포하지 아니하고 그저 사람들 생각에 맞장구쳐주는 말, 그들의 구미에 맞는 말만 해주니 그 불신앙의 백성들이 그런 가짜 선지자들을 칭찬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짜 제자에게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정반대로 냉대와 핍박을 반드시 당하게 된다고 미리 일러주시면서 단단히 각오를 다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매달 마지막 주일에 모이는 심방장 사역보고 때에 이런 주님의 '진짜 제자'들이 겪게 되는 간증들이 자주 나옵니다.
  우리 교회의 심방장들이 아파트에 교회 주보를 돌리다가 관리인들로부터 잡상인 취급을 당하고 내쫓기는 일은 아주 보통입니다.
  가가호호 방문전도를 하기 위하여 벨을 눌렀을 때 안에 분명히 사람이 있는 데도 문도 열어 주지 않는 찬바람을 맞게 되기도 일쑤입니다.
  '어린이 새소식반'에 어린이 한 명을 전도해서 데려와 놓으면 마치 자기 아이에게 나쁜 물들이는 나쁜 사람인 것처럼 인상을 쓰면서 찾아와서 그 아이는 분명히 있고 싶어 하는 눈치가 선한 데도 억지로 그 손을 붙잡고 끌어내어 갑니다.
  신참 심방장들은 처음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누구나 다 창피스럽고 낙심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면 (전도될 사람) 있고 안 나가면 없다.'는 모토를 따라서 용기를 내어 계속 전도하면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이들 모두가 다 '숙달된 제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미움과 거부와 냉대'야말로 바로 '나도 이제 예수님의 진짜 제자가 되었구나.'라는 감격과 기쁨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제 설교가 방송으로 나가는 날 주일 저녁이나 화요일 밤이 되면 선교회 사무실의 직원이나 숙직하는 교역자들이 애를 먹습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좀 민감한 주제에 대하여 설교한 날이면, 물론 격려해 주시는 전화도 있지만, 또한 온갖 비방의 전화들까지 이분들이 대신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는 더욱 심한 욕설까지 흔히 올라옵니다.
  하지만 저 역시 그 때문에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신자뿐 아니라 모든 불신자들까지도 칭찬하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설교요 그 목사는 분명히 '거짓 선지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 교인들도 불신이웃들로부터 온갖 '미움과 거부'를 당하면서도 부지런히 전도하고 있는데, 교회 목사가 불신사회로부터 '욕이나 악하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마땅히 해야 할 말씀전파의 사명에 약해져서야 하겠습니까?

  여러분께서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이웃이나 친구들로부터 미움 받아 보셨습니까?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는 이 열심 때문에 직장 상사의 눈에 거슬리게 된 적이 있으셨습니까?
  주일을 꼬박꼬박 지키고 헌금생활 잘 해보겠다는 노력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구박을 당하거나 아내로부터 싫은 소리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정말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하늘에서 큰 상"을 받는 우수한 제자 명단에 올라간 증거라고 우리에게 보증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따르고 섬기고 전파하다가 핍박당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인 줄로 깨닫고 그것을 오히려 진정으로 기뻐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 학교'를 중퇴하고 당신의 '천국 학교'에 입학한 자들에게 모름지기 당신의 제자 된 자들은 적어도 이 정도는 기초적으로 꼭 배우고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스스로 죄인의 부끄러움과 결핍을 느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복과, 세상으로부터 냉대와 핍박 받게 되어도 오직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명의 특권 - 바로 이것이 이전에 세상을 좇던 시절과는 달리 '이제부터 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자들이 누리게 되는 삶이라고 하셨습니다.

  실로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알고 경험해 왔던 기존의 가치관을 완전히 새로 바꾸어버리는 교육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 정말 좋고 귀한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워왔던 일반적인 상식과 이 사회에서 다 통하고 있는 선입관을 완전히 뒤엎는, 실로 획기적인 '새 학교의 오리엔테이션'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부터 배우지 못하고서는 그 '천국학교'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길은 시작도 될 수 없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나 여기 '평지설교'에서나 이것부터 제일 먼저 가르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현세의 행복에만 만족하는 사람이나 기독신자가 되는 것을 그런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은 애당초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꽤 오랜 신앙생활을 해 왔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예수님 때문에 어떤 냉대나 핍박을 당해 본 적이 없고 여전히 불신자들과 잘 통하고 잘 어울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진짜 제자'가 아니라 '위선적인 제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을 두고 당신의 '참된 제자'라고 속으실 만한 분이시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돈 많고 인기 있는 것'을 최고로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 '장망성 학교'에서 '사욕을 좇을 스승'을 두고 있는 학생들이 따르는 교훈입니다.
  하지만 세상 재물의 만족과 명예욕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는 큰 시험이며 올무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가 이제 천당구원의 부요에 만족하며,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거부와 욕을 당하는 것까지 오히려 기뻐함으로써, 진정 예수님의 제자 된 자들에게만 주어진 복과 특권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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