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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뉘시오니까? (행 9:1-9) (성령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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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뉘시오니까? (행 9:1-9) (성령님!! 사랑합니다.)

사람이 가지고있는 가장 진한 열망, 가장 뜨거운 열망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되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싶다'라는 그런 열망일 것입니다. 제가 20대 초였습니다. 조금씩 철이 들고, 인생이 진지해지기 시작하면서, 제 마음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그런 질문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정말 변할 수가 있나? 내가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내 약점을 발견할 때마다 이 질문은 늘 절 다시 괴롭힙니다. 나는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때로 다짐도하고 결심도 하지만 작심삼일이라는 속담을 입증이라도 하듯 작정한 결심이 다시 물거품처럼 꺼져버리고, 옛날의 내 모습으로 다시 내 삶이 돌아올 때마다 이 질문은 다시 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할 수가 있나? 나는 정말 변할 수가 있을까? 바로 그 무렵 겨울 산에 올라가 마른 잎사귀에 뒹굴며 목놓아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여러분, 변화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아마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무언가 변화를 위한 갈망이 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 지금보다는 좀더 나아져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정말 위대한 인생을 살 것인가?' 변화 받고 싶고 변화되고 싶지만 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이 변화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오늘 사도 바울처럼, 사울이 바울이 됨으로 이 세계사를 바꾼 것처럼 우리도 변화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 주제에 대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몇 가지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먼저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를 향한 집요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고 본문은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집요하게 쫓고 계심을, 하나님이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금도 나를 찾아 헤매고 다니심을 깨닫는 자만이 참 인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실, 성경은 '영혼의 추적자'에 관한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을 영혼의 추적자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포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탕자처럼 멀리 떠나 그분을 잊고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고멜과 같이 세상에 짝하여 방탕할 때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쾌락에 묻혀 살 때도 그분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두려워 숨어있을 때에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 나서 다니면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가 숨어있는 장소를 몰라서 부르셨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또한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이고 전혀 회개할 마음이 없을 그 때에도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를 역시 부르셨습니다. "가인아,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이라는 한 청년이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칙령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이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240km나 되는, 그 당시에는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해 길을 떠난 것입니다. 1절에 보면 그가 칙령을 받으러 들어갈 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위협과 살기의 마음이 등등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살기가 있었습니다. 미움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야 되겠다 라는 미움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러나 그렇게 살기 등등한 마음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할 그 때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다메섹 도상에 찾아가셔서 예수님은 사울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 주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무슨 얘기입니까? 자기에게 등돌리고 핍박하는 그를 그것도 한번이 아닌 두 번씩이나 부르신 것은 사랑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 지은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 살인한 가인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살기 등등해서 찾아가는 사울을 부르셨던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번에 추석에 노숙자를 위해 세원 진 등대 교회에 가서 이런 예화를 전했습니다. 프란시스 탐슨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역시 노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일찍이 목사로 만들려고 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공부를 중도에서 그만두고 맙니다. 그러자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가 다시 그를 설득해서 의대를 지원하게 했습니다. 의사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중단해 버립니다. 결국 그는 런던 시내 한가운데 노숙자가 되어 버리는데, 거기서 마약을 하고 성냥과 신문을 팔며 하루하루 살아가다가 급기야는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생활을 하며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순간 순간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그의 재능을 윌프레드 메이넬이라는 한 출판사 사장이 발견하고 그를 돕기 시작합니다. 병원에 데리고 가서 마약을 끊게 만들고, 사랑으로 용납하고 품어주며, 인내하며 그를 결국 문학가의 한 사람으로 올려놓습니다. 그가 훗날 유명한 시집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집의 제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천국의 추적', 재미있는 제목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하나님을 사냥꾼으로 묘사합니다. 그가 왜 그 시집에서 하나님을 사냥꾼으로 묘사 했는 줄 아십니까? 탐슨은 새사람이 되어 어느 날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집요하게 추적하셔서 기어코 자기를 변화시킨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자신이 잘나서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의 자기를 만든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음을 깨닫고 그 은혜를 자신의 책에 썼으며, 그 제목을 '천국의 추적, 이 얼마나 멋있는 제목입니까?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한번 택한 자를 결코 포기하기도, 놓치지도 않습니다. 나하나를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값비싼 희생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돌아가셨습니까? 내가 그 자리에 달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에 박힌 그 못은 바로 내 손에 찔려야 합니다. 내가 받아야 할 창을 그가 대신 옆구리에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불러도 불러도 우리가 대답하지 않으니까 우리를 업어서라도 천국에 데려가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이 한마디를 남기셨습니다. I love you! 얘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마침내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면서 자기 목숨을 나를 위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며 스데반을 죽이고도 모자라 살기 등등하던 사울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메섹으로 찾아가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오늘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분은 과연 듣고 계십니까? 오늘 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신앙생활을 오래하고도 우리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을 수없이 읽으면서도 이 애타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우리가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는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울을 찾으셨던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의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우리가 변화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집요하신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분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본문에서 사울이 회심한 이유를 얘기하는데,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깨달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아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믿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가? 또 예수를 믿고 나서도 왜 신앙생활을 잘하지 않는가? 신앙생활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신앙생활 하는데 가장 원수가 자신입니다. 본문의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모든 판단의 주인이 자신이었어요. 자신의 견해로 볼 때 예수님은 가짜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을 과감하게 죽였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예수 믿는 사람, 저 240km 밖에 있는 사람까지 전부 잡아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불교신자라도 이렇게 못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이렇게 악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유는, 그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자신을 믿는 사람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워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말의 상처를 입힙니다. 여러분, 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이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났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발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을 믿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때가 정오라고 얘기합니다. 낮이 얼마나 밝습니까? 태양이 얼마나 밝은가요? 그러나 놀랍게도 태양보다도 몇 백 배 더 환한 빛이 사울에게 쏟아졌고 그 빛을 받은 사울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 자리에서 시력을 잃어버리고 땅에 고꾸라집니다. 그리고 사울이 가장 먼저 한 말이 무엇인가 하면 "주여! 뉘시오니까?"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건을 이 다메섹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하늘에서 들려오는 빛과 음성을 체험한 사울이 놀라서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다시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는 음성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얼마나 놀라운 음성입니까? 이 음성은 사실 사울을 전율케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지금 사울에게 나타나서 말하고 계시는 분이 예수라는 사실, 이것은 사울의 모든 생각과 인생관과 가치관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교만한 줄 아십니까? 자신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못 보는 이유는 하나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사울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교만해서 내 지식에 미쳐서 살았던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며 살았던가를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울의 회심 사건의 핵심은 사실 하늘의 빛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도 아닙니다. 사울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은 그의 회심사건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9절에 보면 이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사흘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사흘동안 보지 못한 것, 그리고 식음을 전폐한 것은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말하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예수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금 나에게 나타난 예수가 바로 메시야란 말인가?"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나에게 나타난 그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마 수많은 생각들과 물음들이 그의 삶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구원자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중에 우리가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다메섹에서부터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는 전도자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만나면 어디서든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는 바로 예수님이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은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였다. 그 분이 부활하셨다. 그리고 나를 만나주셨다"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핍박자가 전도자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카피라이터로서 뒤늦은 나이에 예수를 만난 후 '막 쩌낸 찐빵'이라든지 '예수 안 믿으면 손해보는 77가지 이유'라는 책으로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만재라는 분이 거듭나고 나서 쓴 글이 있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그는 성경말씀이 하나도 믿어지지 않답니다. 자기의 상식이나 철학으로 예수 믿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결혼할 때 교회에 나가겠다는 조건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끌려서 교회에 다녔지만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순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 뻥도 심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물위를 걷는 기적에 대해서 들으면서 "목사 양반이 멀쩡한 것 같은데 참 거짓말도 잘하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를 향해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이 가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 먹이는 것이야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그 순간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그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자기 인생의 구원자로 만난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마음속에서부터 한 찬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50여 년이 다 되도록 자신이 한 것은 세상에 속해서 세상 방법대로 세상에 취해서 살아온 것뿐인데 자기가 어디가 예쁜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은혜를 주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때는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자기가 이제는 자신의 인생 송두리째로 다 하나님께 드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기모습이 너무나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목사로서 가장 큰 기쁨이 있다면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싶어서 애를 쓰는데도 결국 믿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에 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소리를 어떻게 했습니까?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울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만 이해했는가? 그것은 사울의 귀에만 이해되어졌습니다. 소리는 다같이 들었는데 이해는 사울만 했어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22장에 보니까 사도 바울이 한마디를 더 합니다. 9장에서는 얘기하지 않던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랬더니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것이 무슨 얘기입니까? 당신이 시키는 대로하겠습니다. 당신이 말씀하는 대로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사울은 그 순간 자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 그리고 자신을 올바로 하나님 앞에서 발견한 자는 하나님의 손에 나를 맡깁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여전히 모든 것이 다 내겁니다. 시간도, 건강도, 인생의 주인이 모두 나입니다. 내가 관리합니다. 나에게 책임이 있고 권리가 있습니다. 내 물질도 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 자기를 바라본 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맡기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의 회심 사건은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어떤 학자는 사도행전의 두 가지 큰 사건이 있다면 하나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사울이 예수님 만나 회심한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오순절 사건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 땅을 복음으로 흔들어 놓은 사건이라면 사울의 회심은 이방세계, 저 로마 세계를 복음으로 변화시킨 놀라운 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한 신학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바울로 바꾸셨다! 그리고 바울은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한때 자신을 알지 못했을 때는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무서운 핍박자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나아가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잔인하고 추악한 과거를 지닌 사람으로 도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구제 불능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복음 전도자가 되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의 순교 직전에 쓴 딤전1:12절에 보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이는 엄청난 은혜입니다. 쓸모 없는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역사 하셨다는 이 사실 앞에 자신의 삶을 몽땅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제 존재와 삶이 바뀌어졌습니다. 사역이 바뀌어졌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을 충성 되이 여기신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한 생을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1장 23절과 12장 10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라고 실토합니다. 주님을 위해 이 정도의 헌신을 한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자기 공로를 내세울 만도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전15:10절에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자기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부노의 감정을 가지고 갔던 그의 발걸음이 이 다메섹에서 섬김의 발걸음으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기업인이나 예술가가 아닌 군인이 필요하고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건축가가 필요하듯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할 일은 너무 많고 일손이 달릴 때 우리는 종종 탐탁하지 않은 사람을 불러다가 일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뛰고 달릴 일꾼들이 많이 필요한데 마땅한 사람들이 부족하여 아마 우리까지 쓰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말 황송하고 죄송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교회가 힘쓰고 있는 한 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는 무엇보다 나를 다시 믿음의 자리에 앉히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의 성도들의 새벽 문화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새벽에 나와 바울이 경험했던 다메섹처럼 우리의 다메섹이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구원의 확신이 없다던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깊이 들어가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더 나아가 정말 변화를 체험하고 싶다면 예수를 만나야합니다. 성령의 체험은 바로 예수를 만나는 체험입니다. 이제 우리 역시 주님 앞에서 바울의 피맺힌 절규처럼 "주여!, 뉘시오니까?" 내가 도대체 누군데 이처럼 사랑하십니까? 내가 도대체 누군데 나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십니까? 이 고백 앞에 성령이 부어주시는 새 은혜를 입는 놀라운 영적 변화의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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