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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축제] 세상을 바꾼 말 한 마디 (요 1: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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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말 한 마디(요1:35~42)

  여러분, 혹시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말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본래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Norton Lorenz : 1917~  )가 연구 발표한 이론인데, 그가 발표한 논문 제목만 봐도 어떤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 주에 발생한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입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멀리 떨어진 곳에 영향을 끼쳐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런 원리는 기상 분야뿐 아니라, 경제 등 여러 분야에 적용됩니다. 그래서 어떤 작은 행동이나 사건 하나가 엄청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가리킬 때 두루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도 나비효과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처음에는 아주 미미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인생을 크게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나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내 가정과 직장,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 온 세상까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케이스는 실제로 역사 가운데 무수히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활동하셨던 공생애 초기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둘 모여든 과정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어떻게 예수님으로부터 확산되었는지 그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1] 복음의 릴레이 : ‘예수님’으로부터 ‘나’에게까지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인데,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게 되느냐 하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냥 믿어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롬10:13~14 보십시오. “13 누구든지 주(=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무슨 말씀입니까? 누군가 복음을 전해줘야 그것을 듣고, 들은 그때 비로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적으로 말하면 이런 겁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대속의 피를 흘렸어도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므로, 전도하지 않으면 믿음도 구원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전1:21에서 바울 사도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the foolishness, NIV)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가 미련한 방법 같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 구원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정말 그렇죠. 저나 여러분이나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지금은 당연히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됐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전도를 받고 복음을 들음으로써 믿게 된 겁니다.
  어떤 경우는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주 특수한 경우이죠. 복음이 전파되기 힘든 상황에서 그런 일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공산권이나 이슬람권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 특별한 일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터키 선교사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터키는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스스로 찾아오는 터키인들이 더러 있다는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이렇게 간증한다는 사실입니다. 꿈속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교회에 가라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어물어 교회를 찾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의 어머니 경우도 특별한 체험을 통해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새벽 3~4시경 잠을 자다 갑자기 교회 종소리를 들으셨다는 겁니다. 그 시간은 종이 울리는 시간이 아닌데 희한한 일이죠. 어쨌든 종소리에 이끌려 정신없이 교회로 찾아갔고,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경우들도 그 이전에 간접적으로라도 복음이 전파되었을 겁니다. 교회나 예수님에 관해 어렴풋이나마 들은 적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의 어머니의 경우에도 그 전에 같은 동네 사는 권사님이 몇 번 전도했지만 거부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그런 특별한 체험과 연결되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무엇입니까? 전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보편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 사람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믿음으로 구원받고 ... 이런 식으로 죽 이어지는 겁니다. 마치 릴레이와 같습니다. 

  본문을 보면 복음의 릴레이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35절~37절. “35 또 이튿날 요한(=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세례 요한이 먼저 활동했는데, 그에게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두 사람과 있을 때 마침 예수님이 지나가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구약 시대에는 속죄제물로 짐승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이 마치 어린 양처럼 속죄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할 것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들 중 하나는 안드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마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 교제하였고, 마침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41절. “그(=안드레)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안드레가 자기 형 시몬(베드로)에게 전도합니다. “형! 우리가 메시야 만났어. 가 보자!” 아마 이랬을 겁니다. 메시야는 히브리어,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같은 말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구세주를 가리킵니다. 그 말 한 마디가 시몬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 믿게 만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됩니까? 요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무엇을 암시합니까? 아마 베드로가 빌립에게 전도했을 겁니다. 요1:45~46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빌립은 다음으로 나다나엘에게 전도합니다. 그이를 만났다는 것은 메시야를 만났다, 그리스도를 만났다 ... 이겁니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퉁명스럽게 대꾸합니다. “무슨 나사렛에서 인물이 나오느냐? 그 시골구석에서 ... ” 그러자 답답해진 빌립이 한 마디로 “와 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만났고 마침내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마치 릴레이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세례요한으로부터 나다나엘까지 바통을 계속 이어주는 모습입니다. 세례 요한 →  안드레 → 시몬(베드로) → 빌립 → 나다나엘(바돌로매) → ... 이렇게 죽 이어집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결국 복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진 겁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도표로 만들어 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계속 가지를 치는 모양입니다. 그 중 한 가지가 계속 이어지고 이어져서 나에게까지 온 겁니다. 예수님 → 사도들 → ( ... ) → 선교사 → ( ... ) → 전도자 → 나 → ... 예수님에게서 사도들을 거쳐 복음의 릴레이가 죽 이어져 오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을 통해 또 이어지고 이어지다가 나에게 전도한 사람, 그리고 마침내 나에게 복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면 계속 이어져서 예수님이 재림하는 종말의 날까지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무서운 상상이지만, 만일 나에게서 그치면 어떻게 될까요? 2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복음의 릴레이가 나에게서 뚝 그치는 겁니다. 신앙의 대가 끊기는 겁니다. 이건 엄청난 손실입니다. 아니, 큰 죄악이라고 표현해야 될 겁니다. 반대로 내가 한 사람 이상에게 전도하면 어떻게 되나요? 2천년 동안 내려온 복음의 릴레이가 계속 되는 겁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전도하면 여러 개의 가지로 뻗어 나아가는 겁니다. 엄청난 일이죠.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난 10월 3일 교회 운동회가 있었습니다. 운동회를 하면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줄다리기와 릴레이를 합니다. 그 중에서도 릴레이가 스릴이 있고 재미있습니다. 제가 한때는 마지막 주자로 테이프를 멋지게 끊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간에 뛰게 되었습니다. 바통을 이어받아서 열심히 뛰다가 코너를 돌면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창피한지! 하지만 순간 다음 주자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벌떡 일어나서 달렸습니다. 결국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제가 혼자 뛰는 것이었다면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을 겁니다.

여러분! 복음의 릴레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전해 받은 복음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전해줘야 합니다. 더욱이 복음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래야 됩니다. 복음에는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2] 복음의 능력 : 온 세상을 바꾸는 힘

  정말 그렇습니다!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얼핏 생각하면 별게 아닌 것 같지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지난 2천년 세계 역사와 교회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갈릴리 촌구석에서, 한 젊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복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12 제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닷가의 어부 출신, 그리고 로마 제국의 작은 식민지 이스라엘 중에서도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전도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켰고, 마침내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이 오히려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그 후에 유럽을 변화시키고, 신대륙 북미와 남미를 변화시키고, 그 복음의 물결이 우리 한국에까지 당도했습니다. 지금은 선교사들을 통해 온 세계 구석구석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이 가는 데마다 개인이 구원받고, 축복의 인생으로 바뀌고, 민족과 국가가 변화되고, ... 이런 예들은 온 세계에 흘러넘칩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무엇입니까? 서두에서 말씀드린 ‘나비효과’입니다! 복음의 나비효과! 이러한 복음의 능력에 관해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  복음(福音, Gospel)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eujaggevlion)인데 ‘좋은 소식’ ‘기쁜 소식’(Good News)이란 뜻입니다. 능력(能力, Power)은 헬라어로 ‘뒤나미스’(duvnami")인데, 이 단어에서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쓰면 큰 산도 일시에 무너뜨립니다. 대단한 폭발력이 있습니다. 마치 그것처럼 복음 안에 영적인 능력이 있어서 복음을 믿고 굳게 의지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인류 역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연대를 표시할 때 옛날에는 왕의 이름을 따서 ‘△△ XX 년’ 이렇게 표시했지만, 예수님 이후에는 어떻게 표시합니까? B.C. 와 A.D.입니다. 만국 공통입니다. 공산 국가에서도, 이슬람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B.C.는 ‘Before Christ’(그리스도 이전)의 약자이고, A.D.는 라틴어 ‘Anno Domini’(주님의 해에, in the year of our Lord)의 약자입니다. 흔히 B.C.는 서력기원전 혹은 기원전이라 번역하고, A.D.는 서력기원후 혹은 서기라고 번역합니다. 그래서 서기 XXXX년으로 표시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정확하게 하면 주전(主前)과 주후(主後)입니다.
  B.C.와 A.D.는 비단 인류 역사만 구분하는 게 아닙니다. 개인 인생의 역사도 B.C.와 A.D.로 갈라집니다. 예수 믿기 전과 그 후가 다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 사회와 국가도,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친구 중에 충북대에서 최연소 학장을 지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바쁜 와중에도 방송을 통해 혹은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강연과 간증을 하는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학창 시절에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장남이라 자기 혼자 공부하기도 버거운데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까지 돌봐야 했습니다. 지금은 어머니와 온 가족이 예수 잘 믿는 가정으로 축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또 남동생은 목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이 본래부터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 불교총학생회 부회장으로 몇 개월 후면 회장이 될 즈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가 C,C.C. 엑스플로 74 교재(빌리 그래함 목사 여의도 집회 당시 리더용으로 사용하던 교재)를 던져 주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무엇으로 보나 싶어 화가 났지만, 책을 읽는 것 자체야 무슨 문제이랴 싶어 들쳐보았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책을 읽다 마음이 끌려 당시 유명했던 ‘미루나무 수련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극적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후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정말 신기할 정도입니다. 

  여러분, 백낙준 박사(白樂濬, 1895~1985) 아시죠? 연세대 초대총장을 지내고, 우리나라 개화기에 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입니다. 그 시절에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대학 총장을 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면 집안이 그만큼 대단해서 그럴 수 있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정말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무당이었습니다. 어느 날 푸닥거리를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동네 집사님이 이러더래요. “당신은 그렇다 치고, 당신 자식들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화를 벌컥 냈지만, 밤에 잠이 안 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정말 자식들까지 자기처럼 무당을 하거나 미신 섬기고 살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결단했고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아들이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이래서 백낙준 박사가 된 겁니다.   

  민족과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 여러 민족을 보십시오! 믿지 않는 분들은 동의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복음을 일찍 받아들인 민족과 나라일수록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보십시오! 복음을 받아들인 후 얼마나 놀랍게 변화 되었습니까? 지금도 남북한의 차이를 보면 이런 이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반도 땅인데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북한 쪽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자연 재해는 왜 그렇게 심한지, 산은 민둥산이고, 농사도 잘 안되고, ... 남한 사람들은 살 빼느라 야단인데, 북한 사람들은 수백만 명씩 굶주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정치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겠죠. 남한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북한은 독재정치와 공산주의라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영적인 면입니다. 6.25 전후에 월남하신 어르신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제 치하에, 그리고 해방 당시에는 북한이 남한보다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심지어 더 나은 면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분단 이후 북한에는 교회 문을 닫아버리고, 기독교인의 씨를 말렸습니다. 남한에는 복음이 확산되고 곳곳에 교회가 섰습니다. 이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좋으면 흥하고, 그 관계가 어그러지면 망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복음은 위대한 것입니다! 개인의 인생을 위에서도 가정에서도 위해서도, 가정을 위해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도, 세계 인류를 위해서도! 그러므로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3] 복음전도 : 크리스천의 의무 & 특권

  ① 가장 좋은 일 : 복음전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행 가운데 가장 좋은 일입니다. 개인의 영혼을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육신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해 주는 일입니다. 돈 몇 푼 도와주는 것과 비교할 수없는 선행입니다.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겁니다.

  ② 가장 큰 일 : 복음전도는 가장 큰 일입니다. 나는 평범하고 역량이 부족하지만, 복음을 전하면 그  능력이 세상을 바꿉니다. 사람들을 바꾸고, 가정들을 바꾸고, 나라와 민족을 바꾸고, 세계를 바꿉니다. 이웃 사랑 ... 애국하는 길, 인류에 공헌하는 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일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안드레를 보세요.. 12제자 중에서 업적이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형 베드로를 전도한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가 베드로를 변화시켰고, 베드로를 통해 온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이기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면서 마지막으로 복음 전도, 세계 선교를 명령하신 겁니다. 그래서 가장 큰 명령이란 뜻으로 지상명령(至上命令 Great Commission, 마28:19~20)이라 부릅니다.

  ③ 가장 복된 일 : 복음전도는 가장 복된 일입니다. 전도 받는 사람도 구원받고 복을 받지만, 전도하는 나 자신도 복을 받는 일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이 내 일을 해 주신다!” 어느 쪽이 더 이익입니까? 당연히 내가 이익입니다! 이게 성경적 축복의 원리입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큰 상을 받게 됩니다. 단12:3의 약속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노방전도(路傍傳道)와 관계전도가 있습니다. 노방전도는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전도지를 나눠주고, 예수님에 관해 설명해 해 줍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교회에 월요전도팀, 화요전도팀, 병원전도팀 등이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 참여하는 귀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되는 전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관계전도입니다. 생활 속에서 나와 관계있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 그들 중에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있습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에게나 전해야 합니다. 마치 보물찾기와 같습니다. 보물이 있는 게 분명한데,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여기저거 다 뒤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다 보면 반응하고 믿는 자들이 생깁니다. 성경도 이를 증거합니다. 행13:48 “ ...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그러므로 다가오는 새생명축제와 전도주일에 즈음하여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자세히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와 보라!” “가 보자!”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도 한 사람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 인도하는 말 한 마디는 세상을 바꾸는 힘입니다! 부디 이런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우리 자신도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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