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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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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 설교본문 : 갈라디아서 6장 9절

어느 날 사단이 물건을 세일하고 있었습니다. 상품은 ‘걱정’, ‘두려움’, ‘욕망’, ‘슬픔’ 그리고 ‘자만심’ 등입니다. 그런데 상품진열대 한쪽 편에 ‘이것은 세일하지 않음’이라는 낡아빠진 꼬리표를 단 물건이 있었습니다. 손님이 사단에게 “왜 그 물건을 세일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단은 “다른 물건은 아직도 여분이 충분히 있는데 이 물건은 여분이 없습니다. 이 물건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유용하면서도 아주 쓸모 있는 물건입니다. 이 물건이 없이는 나는 일할 수 없습니다. 이 물건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야 내가 일하게 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님이 다시 “그게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사단은 “이 물건의 이름은 낙심입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낙심이 들어오면 마귀는 일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낙심이 들어오면 아름다운 꿈과 비전이 사라져 버립니다. 의욕이 상실됩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도 늘 기쁨이 충만한 삶만 산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심한 영적 침체에 빠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엘리야 선지자도 이세벨에 의해 피해 로뎀나무 아래 있을 때 자신의 상황 만을 바라보고 낙심하여 차라리 죽기를 간구했습니다.

엘리야도 낙심했다면 우리도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낙심은 우리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가하게 됩니다. 민 32:7에 보면 모세는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하게 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하느냐고 책망합니다. 9절에 보면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을 다녀온 후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꾼들을 예로 들면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하게 해서 낙심한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낙심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습니다. 낙심하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게 되고 결국 그 약속이 성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낙심이라는 주제입니다.

1. 낙심하는 이유

낙심은 이유 없이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선을 행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기대했던 결과를 얻을 수 없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 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름대로 믿음으로 살았는데 결과를 보면 차라리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나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신앙으로 산다고 열심히 살았는데 되는 일은 없고 고난의 연속인데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낙심이 됩니다.

시 73:2에 보면 시편의 저자인 아삽은 “나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의 신앙이 낙심하여 무너질 뻔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3절 이하에 보면 악인들이 형통하다가 심지어 죽을 때에도 고통도 없습니다. 평상시 악하게 살았으면 형통하면 안 되고 불통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평생 형통했으면 죽을 때라도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죽을 때도 고통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당하는 고통도 없이 살았습니다. 악하게 살았는데도 잘 먹어서 살찌고 그들의 소득은 마음에 소원하는 것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믿음으로 사는 나는 뭐야?’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열심히 삽니다. 그런데 나의 현실은 하나님이 전혀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부르짖었으면 응답하셔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게 열심히 믿었으면 큰 복은 아니어도 생활의 염려는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다면 인정은 못 받는다 하더라도 오해는 받지 말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거짓된 자들 때문에 오해를 받고 억울한 지경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낙심시키는 사람과 교제하면 낙심이 전염됩니다.
신명기 20장에서는 전쟁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 20:8에 보면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두려워서 떠는 자들 때문에 다른 병사들도 마음이 낙심이 되니까 그런 사람은 차라리 전쟁터에 있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느 6장에 보면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건축하는데 방해하는 세력들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아라비야 사람 게셈입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시키고 성벽 재건을 방해하기 위하여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네 번이나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만나주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는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고 합니다. 편지의 내용은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사실을 왕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만나서 의논하자는 내용입니다. 이 편지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시키고 느헤미야를 헤치려하는 악한 꾀인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들을 만나지 않습니다. 그들을 만나게 되면 분명히 백성들이 낙심할 일이 발생하고 자기 자신도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서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특히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신 1:28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꾼들 때문에 마음이 낙심이 되어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믿음을 갖게 만들고 잘못된 믿음은 결국 자신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게 됩니다. 언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연구소에서 사람의 피를 몇 그램이나 뽑으면 죽는가를 알기 위해 관계 기관의 허락을 받아 사형수 두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한 사람의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그 사람의 피를 뽑아 양동이에 주루룩 주루룩 부었습니다. 한 번, 두 번, 여섯 번째에 그 사형수가 죽었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다른 사형수의 눈을 가리고 하나, 둘……, 헤아리면서 양동이에 피가 아닌 물을 주루룩 주루룩 부었습니다. 그런데 “여섯!”할 때 그 사형수가 죽었습니다. 놀란 사람들은 의사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피를 뽑지 않고 주사기를 꽂았다가 피를 뽑는 척만 하고 양동이에 물을 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섯 번째 물을 부을 때 죽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앞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양동이에 피를 여섯 번 부으면 죽는다는 부정적인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여섯’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믿음대로 죽고 만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불신앙적인 말을 많이 듣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불신앙에 물들고 낙심의 병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반대로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적극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교제를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신앙에 불이 붙고 낙심을 극복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믿음이 좋고 긍정적이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만사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3) 죄가 발목을 잡으면 낙심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지 자신의 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부족해도 온갖 죄로 가득해도 주님을 찾으면 다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탕자를 보십시오. 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도 유산을 요구하고 돈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가진 것을 다 허비한 후에야 후회하며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결국 거지꼴로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아버지가 그를 받아줍니다. 여기서 탕자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아버지는 우리들을 받아주시는 사랑 많으신 하나님의 모습니다. 출 34:6에 보면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넓은 가슴으로 우리들을 다 받아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악이 지나치게 되면 신앙생활에 낙심이 찾아와서 하나님을 찾기가 힘들어집니다. 시 40:12에 보면 다윗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부끄러운 죄악을 범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복적으로 죄악을 범할 때가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찾는 것이 뻔뻔하고 죄송스러워서 하나님 앞에 나오기도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모습까지도 받아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입니다.
시 40:12만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윗의 생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죄악을 범한 후에도 하나님을 찾았고 결국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죄의 은총을 받았고 더 풍성한 은혜 속에서 승리생활을 했습니다.
죄악이 나의 발목을 잡아서 낙심하게 만들어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크고 넘칩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4) 현실만 보면 낙심하게 됩니다.
욥 5:7에 보면 인생은 고생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불꽃이 위로 나르는 것처럼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을 합니다.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 현실만 보면 낙심합니다.
사람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현실을 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장흠 목사님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0대 목사님들이 기도할 때에 “이 세상을 내가 한번 변화시켜 보겠나이다.”라고 구한답니다. 그러다가 40대가 되면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자기 주변조차 바꾸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기도가 바꾸어진답니다. “주여. 내 주위 사람들만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그러다가 70대가 되면 주위를 보아도 전혀 달라진 게 없답니다. 그제야 기도하기를 “주여. 내가 먼저 변해야 되겠나이다. 주여.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러다가 나중에는 실망 가운데서 인생은 무능하고 세상은 허무하구나 이것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애 3:19,20에 보면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고난당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에 낙심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5) 피로가 겹치면 낙심하게 됩니다.
히 12:3에 보면 피곤하면 낙심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의 사자였던 엘리야, 850:1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영적 전쟁을 했던 엘리야, 기도로 하늘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했던 엘리야도 과로로 지쳐있는 상태에서 이세벨의 공갈을 듣게 되고 너무나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낙심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피곤함입니다.

의사들은 조울증에 걸린 사람이 자살을 기도하다가 응급실에 실려오면 어떻게 대처할까요?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에게 음식을 주는 일입니다. 대체로 고기를 먹입니다. 그들은 몸에 축적된 단백질의 양이 낮은 상태입니다. 그들은 대게 2-3일을 제대로 먹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들은 단백질의 양이 낮기 때문에 에너지 레벨이 낮고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이 높아진 것입니다.
적당한 휴식과 영양공급이 되지 않으면 사람은 낙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은 정신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낙심을 이기는 방법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이유 외에도 낙심이 찾아오는 방법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는 우리들이 어떻게 낙심을 극복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시 73편을 기록한 시인은 자신은 믿음으로 사는데 죽도록 고생하는 것 같고 악인들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죄악을 밥 먹듯이 하며 교만함에도 불구하고 하는 일들이 잘 되고 심지어 죽을 때에도 고생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는 그만 낙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시 73:17에 보니 그가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인의 종말을 깨닫게 되고 낙심에서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 42편에도 보면 시인이 낙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영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낙심된 자신에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가난한 과부를 통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낙심을 극복하라는 의미로 비유를 주십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 과부가 억울함을 풀길이 없어서 불의한 재판장을 찾아갑니다. 물론 여인은 재판장에게 거절을 당합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여인은 계속해서 재판장을 찾아가게 되고 결국 재판장이 여인의 청을 들어주게 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하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이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 즉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낙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22편 26절을 보면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하나님을 찾고 경배하면 그 마음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해도 우리 마음이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용기백배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낙심하지 않고 희망차게 사는 길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2)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현실만 보면 악인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고생을 몰라도 결국은 영원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성소에 들어가서 악인들의 종말을 깨달았는데 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셨고 파멸에 던지신다고 고백합니다(시 73:17-19).

악인들 때문에 낙심하기 쉬운데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적들이 엄청나게 강한 것 같고 우리에게는 두려운 존재처럼 다가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영원이라는 차원에서 악인들을 보면 그들은 아주 우스운 존재들인 것입니다. 사 7:4에 보면 그 당시 유다를 힘들게 했던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에 대해서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지깽이가 무엇입니까? 불을 땔 때에 쓰는 가느스름한 막대기를 말합니다. 잠시 도구로 쓰이고 나면 아궁이에 들어가야 할 나무를 말합니다. 우리의 적들도 보기에는 대단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곧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야 하는 부지깽이에 불과합니다.

고후 4:16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갈수록 늙어서 볼품없어집니다. 그래서 육신만 바라보면 낙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거두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심으면 바로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싹이 나려면 10-20일은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꽃이 피고 열매를 따려면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심은 씨앗에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때가 되면 열매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수고와 사역 그리고 우리가 행한 선한 일들도 당장은 열매가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풍성하게 일하셨구나”라고 말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현실로 보이는 것만 보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천국천사들이 일합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지만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을 생각하라.
히12:3에 보면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자기에게 거역했지만 참으셨습니다. 왜 주님이 죄인들이 거역하는 것을 참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히12:2에 보면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은 무슨 기쁨일까요? 그 기쁨은 부활의 영광을 말하기도 하고 또 우리의 구원을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갖고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주님이 완벽하게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낙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면 조금만 어려운 일이 발생해도 낙심하게 됩니다. “그분이 하신다. 그분이 해주신다.”라고 믿는다면 좀 어려워도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물농장에 사는 수탉 한 마리가 자신이 태양을 뜨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아침 이 수탉은 일찍 일어나서 사명을 가지고 축사 지붕 꼭대기에 날아 올라가서 “꼬기오 꼬끼” 하면서 몇 번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면 곧 태양이 솟아오르는 게 아닙니까? 수탉은 가끔 ‘만일 내가 병이라도 걸리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어떡하지? 그러면 누가 태양을 다시 떠오르게 한단 말인가? 만일 아무도 태양을 다시 뜨게 하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만일 태양이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그렇게 되면 온 세상이 캄캄해지고 추워질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된 후에는 풀도 다 죽고 나무도 다 죽게 될 것이 아닌가? 그것뿐이겠는가! 곧 농장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죽고 말겠지?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매일 아침 축사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울어야 돼!' 수탉은 이렇게 혼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탉이 늦잠을 들었습니다. 수탉은 그 전날 밤에 파티에 갔다가 너무 늦게까지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수탉이 늦잠을 잤는데에도 불구하고 태양이 솟아올랐습니다. 흔히 우리는 어리석은 수탉처럼 내가 마치 우주를 운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하고 내가 잘못되면 천지개벽이라도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업도 다 내가 하고, 다 내가 먹여 살리고 자식들도 내가 다 만들고... 아닙니다. 모두 주님이 하십니다. 그것을 미쳐 깨닫지 못했을 때 작은 일에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내가 하는 것 아닙니다.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절대 절망에 처한 상황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바위가 깨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계란이 박살이 나지.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데 바위가 깨어지는 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면 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도 바위가 깨질 수 있습니다. 나는 안 되지만 주님이 하시면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비록 계란 같고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바위 같아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하십니다. 주님이 하시면 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씨를 뿌리면 때가 되면 열매로 돌려주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그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수고에 대해서 풍성한 열매로 돌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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