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회창립]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 (출 25:21~22, 엡 5:25~27)

  • 잡초 잡초
  • 451
  • 0

첨부 1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 (출 25:21~22, 엡 5:25~27)

우리교회가 창립 113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주일입니다. 먼저 좋은 역사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를 세우고 이끄신 믿음의 선조들의 수고와 땀 그리고 우리의 정성이 이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연동교회의 성도가 된 것을 감사하고 성도의 의무를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113’이란 숫자의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뒤져도 특별한 의미가 없는 숫자였습니다. 성경에도 숫자의 큰 의미는 없고, 찾다보니 딱 한 가지를 찾았습니다. 간첩신고는 ‘113’입니다. 그것도 요즘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간첩도 없다고 하고, 신고해도 잡지도 않고 해서 최근에는 ‘113’ 번호가 거는 사람이 없어 놀고 있을 것 같습니다.

  간첩신고란 안보를 해치는 적을 신고하여 없이하는 일입니다. 국가의 정체성을 흔드는 원수를 멸하는 일입니다. 간첩을 신고하여 없이하는 일이 국민의 사명입니다. 국가의 근간을 든든히 하는 국민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을 뿌리 채 뽑아 버리는 일입니다. 사탄의 손길을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들을 찾아 제거해야 합니다. 사회악, 부조리, 범죄, 사상과 사조 등 사회를 좀먹게 하는 것들을 뿌리부터 제거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특히 113주년을 교회인 우리교회가 이 일을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수도원의 영성의 핵심은 수도사들이 영성적 훈련을 통하여 수도원의 영성을 교회에 흘려보내는 일을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맑은 물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세상이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이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때문에 지역이 맑아지고, 서울이 좋아지고, 한국에 희망이 있고, 세계가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성막을 세우실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25장 이하의 말씀은 성막을 세우신 뜻과 율례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라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기 위한 것이 성막을 세우신 뜻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십니까? 교회에서 만나십니다. 둘째는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한 모든 일을 이르리라”고 하신 것으로 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를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인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교회에 오신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많은 교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시대에 하나님이 만나시고, 시대에 필요한 말씀을 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를 113년 전에 연못골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새기고 교회의 사명을 잘 수행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26절에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부부에 대한 말씀이지만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물과 말씀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물로 씻는다는 말은 한 번의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누구나 한번의 물로 씻음은 필요합니다. 교회에 올 때에 처음부터 말씀에 은혜를 받고 감동이 되어 온 사람은 없습니다.

  한 번의 물세례가 필요하지만 계속되는 말씀의 세례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한 번 거듭남을 체험하고 나서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시는 정결한 삶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하신 말씀처럼 목욕한 자라도 발을 씻어야 합니다.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됩니다. 두 번의 세례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계속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한 번의 세례와 계속적인 성찬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합니다. 한 번의 구원과 계속적인 성결의 삶이 필요합니다. 한 번의 결단과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이 일을 잘 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일상생활에서의 성화를 맛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변화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각성으로 삶의 현상이 달라지게 보여야 합니다.

  인도의 펀잡 지방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 ‘시크’ 교도를 아시지요? 머리에 터번을 쓰고 칼을 차고 다닙니다. 얼마 전에는 비행기를 탈 때도 칼을 차고 다닐 수 있도록 인도해서 허용했습니다. ‘시크’의 총본부인 암리차르 사원에는 황금사원이란 사원이 있습니다. 영국 BBC 방송은 죽기 전에 꼭 가보아야 할 50곳 가운데 6위로 선정한 곳입니다. 이곳은 완전히 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시크교도들을 ‘펀자비’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사원 안의 물 속에 들어가 줄을 잡고 몸을 담그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자신을 씻는 예식을 하는 것입니다. 사원에는 몸을 씻는 물도 따로 있습니다. 이 거룩한 물 속에서 나와 다시 물로 씻으면 이전에 물에 잠근 것이 무효가 될 것 같은데도 이들은 이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간지스강은 인도인들에게는 거룩한 강입니다. 이들은 이 물을 성수라고 생각합니다. 물에 몸을 잠금으로 자신이 거룩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최근에는 강이 심하게 오염되어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이곳을 거룩한 곳이라고 하는 이유는 부처님이 목욕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곳에서 무엇을 씻습니까? 인간의 번뇌를 씻습니다. 죄를 씻지 않으면 번뇌가 씻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는 일은 계속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성결의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이런 일을 하기 위하여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물로 씻음을 받았습니까? 구원 감격과 거듭남의 체험이 있습니까?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 성화의 체험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를 통하여 죄를 씻음 받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삶을 거룩하게 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성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입니다. 영성적 기능이란 구원의 기능입니다. 예언자적 기능이란 사회정화의 기능입니다. 교회가 사회와 믿지 않는 자를 구원하고 있습니까? 구원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아서 그렇지는 않습니까? 전도의 능력도 상실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의 감격과 체험을 가지고 사회를 구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영적전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7월 미국 뉴욕타임즈은 한국을 IT 강국에서 미신 강국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 무속신앙이 부활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서울과 인근도시에는 무속 사당이 300여개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무당이 80만 명이나 됩니다. 압구정동에 점쟁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 고객이 20대 청년들입니다. 옛날에는 점쟁이를 찾아갈 때 몰래 갔었는데 이제는 버젓이 갑니다. 무속인들이 수입이 일년에 1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30%는 기독교인들이 갖다 주는 돈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가 귀신의 손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조상의 묘를 명당으로 이장하면 선거에 이길 수 있을지 문의하는 정치인들이 무속인들의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용하다는 무속인들은 예약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첨단 IT 사회인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바쁜 일상을 가지고 가장 호황을 누리는 직업이 무속인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이런 일이 미신이 아니라 전통 한국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인정한다고 합니다. 이게 한국교회의 영적 수준입니다. 이게 한국교회의 현상입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가장 잘 생긴 얼짱, 몸짱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귀신 때문에 죽었습니다. 역대상 10:13-14에는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었더라”고 합니다. 귀신에게 물어보는 사울을 하나님은 죽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귀신에게 물어보면 하나님은 여지없이 죽이십니다.

  반면에 다윗을 보세요. 그는 하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일도 일일이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불레셋을 치러 올라갈까요?” “언제 치러갈까요?” “어디로 올라갈까요?” “어떻게 갈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답을 보세요.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느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던데”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귀찮게 할수록 좋아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물어보세요! 틀림없이 답하십니다. 여러분, 알아서 하세요! 틀림없이 죽습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구원하게 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구원받은 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 티나 주름 잡힌 것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27절은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역할은 티나 주름을 없애는 일입니다. 거룩하게 하는 일, 흠이 없게 하는 일은 도덕적 삶을 살게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도덕적 규범과 삶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찬송가 55장 4절을 보세요. “우리들이 거듭나서 흠이 없게 하시고 주의 크신 구원받아 온전하게 합소서”. 흠이 없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램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거듭나야 흠이 없게 되고, 온전하게 됩니다. 구원이란 영적 기능입니다. 흠이 없고 온전하게 하는 것은 도덕적 기능입니다. 영적 기능이 있어야 도덕적 기능이 따라옵니다.

  제가 군대 생활할 때에 헌병이어서 다림질을 잘 했습니다. 헌병들이 잘 하는 것이 다림질과 구두 닦는 일입니다. 구두도 얼마나 잘 닦았는지 제게 군화 한번만 닦아달라고 줄을 섰습니다. 다림질도 아주 잘 했습니다. 군복 바지 말에 손을 벤다고 할 정도로 칼날 같이 선 바지를 세웠습니다. 다림질을 보세요. 결국은 물과 열로 날을 세웁니다. 티는 물로 닦고 주름 잡힌 것은 물을 살짝 뿌려서 열로 누르는 것입니다. 물과 불은 티나 주름을 없애는 도구입니다.

  다리미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옛날 냄비 같은 다리미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숯불을 냄비 같은 다리미에 넣어서 다렸습니다. 조금 발전한 것이 숯불 다리미입니다. 그 때는 물을 입안에 잔뜩 넣어서 ‘푸우’라고 뿌려서 다리미로 다렸습니다. 그러다가 물이 나오지 않는 다리미가 나왔습니다.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 다리미로 다렸습니다. 그 다음에 증기가 나오는 다리미가 나왔습니다.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요즘 다리미 같은 다리미가 있었으면 제가 졸병 시절에 조금은 편했을 것입니다.

  티는 물로 닦아야 합니다. 주름은 열로 눌러야 합니다. 티나 주름 잡힌 것을 없이하는 비결은 물과 불입니다. 기독교는 불의 종교이고, 물의 종교입니다. 불로 태우고, 물로 씻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할이며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물과 불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도덕적 규범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두 번째 기능입니다.
  기독교의 예언자적 기능이 이런 기능입니다. 기독교의 대 사회적 기능입니다. 사회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경고하고, 개선하고, 지도하는 기능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첫 번째 기능과 더불어 두 번째 기능이 있어야 올바른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티와 주름을 보세요. 사회 전반에 티가 있습니다. 구겨지고 주름잡혀 바른 곳이 없습니다. 어디 하나 제대로 된 데가 없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어느 곳도 온전한 곳이 없습니다. 성한 데가 없습니다. 술집이 아무데나 어디에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규범이나 예의도 없습니다. 수없이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성도덕이 타락하고 있습니다. 웬 사기꾼이 그렇게 많은지 쑤시면 터지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사회가 온통 곪아 터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 가장 좋은 방법은 물과 불로 다림질해야 합니다. 물과 불로 다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서히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정부나 기관에 대한 정책 감사가 아니라 후보에 대한 감사를 국회 각 위원회에서 합니다. 국민들이 볼 때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데 자기네들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정치적 티와 주름은 물로 닦고, 열로 주름을 다려서 구김을 펴야 합니다. 이 일은 교회가 해야 합니다. 영적 능력으로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이번 12월의 대통령선거는 국민을 통합하고, 경제를 회생하고, 국가 정체성을 살리고, 교회와 대학 그리고 언론의 자유와 민주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대통령이 되게 교회가 밀어줘야 합니다. 교회가 정치에 가담할 수밖에 없고, 대학이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고, 언론이 정부와 투쟁하는 이런 일은 민주주의를 퇴보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세계화 시대에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누굴 찍든지 우리 교인들은 빠짐없이 다 선거에 참여해야 합니다.

  경제학자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일등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과 사회 자원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은 이미 과잉 상태라고 합니다. 남아도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회 자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회자원이란 신뢰와 협동과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회 자본이란 무형 자원인데 이것이 없이는 절대로 경제 대국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 자원을 충족시켜줘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국가발전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사회 자원이란 결국 영적 자원입니다. 신뢰와 협동과 사랑이란 것이 영적 자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회 자원이란 교회만이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남은 것은 교회의 몫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있고, 신뢰가 구축되고, 협동이 이루어져야 영적 자원, 사회 자원이 충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사회발전, 국가발전에 앞장서서 기여해야 합니다. 국가와 괴리되고, 동떨어진 교회는 필요 없는 교회입니다. 영적자원은 결국 영적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성경적 기초 위에서 기도하고, 말씀 보고, 묵상하는 신앙생활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지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게 샘물교회 청년들이 억류된 사건 이후에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합니다. 저는 분명히 그 때도 말씀드린 것처럼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선교 정책이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지혜롭게 탄력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뱀같이 슬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에 ‘방어적 선교’는 없습니다. 선교는 그 자체가 공격적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공격적으로 했습니까, 아니면 방어적으로 했습니까? 선교는 사탄을 죽이고,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일입니다. 악을 죽이고 선을 심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방어적으로 합니까? 기독교가 방어한다고 하는 것은 진리나 교리를 방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이것을 호교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옹호하고 변호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도덕적 결함이 없어야 하고, 선교가 무례하지 말아야 하고, 무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도 선교를 젊잖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무슬림이 이미 30만이 되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절대로 기독교를 전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들은 엄청난 물량공세로 포교하고 있습니다. 모스크가 이곳저곳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3천명의 한국말 잘 하는 무슬림 총각들이 와서 한국 여성과 결혼하는 정책적 포교를 하고 있습니다. 영국에는 이미 120만 명이 무슬림입니다. 뉴욕에만 70만 명의 무슬림이 있습니다. 2020년에는 한국을 이슬람 국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고 합니다. 2080년에는 전 세계를 이슬람 세계로 만들겠다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얼마 후에는 종로거리에 히잡을 쓴 한국 여인을 쉽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방어적 선교로, 적당한 마음 자세로 살 때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 도덕적으로 재무장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선 자신의 티와 주름을 없애고, 교회가 사회의 티와 주름을 없애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결론

  서울에 어느 유명한 캬바레가 있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의 패싸움으로 언론에서도 떠들썩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 캬바레의 사장이 잡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엄청난 재산을 두고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들도 그 엄청난 재산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족들까지도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어느 증권회사의 여직원이 이것을 알고 사장의 돈 2억원을 가로챘다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사장 명의의 은행 금고에서 열쇠 하나가 나왔습니다. 이 열쇠는 분명히 재산의 비밀을 알려줄 중요한 열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열쇠가 어디 열쇠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엄청난 재산을 주인에게 돌려줄 열쇠이지만 아직도 그 열쇠의 비밀을 풀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 자체가 천국으로 직행하는 곳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천국으로 가는 열쇠로 사용하십니다. 113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교회가 구원하는 영적 능력과 바르게 하는 예언자적 능력을 갖춘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 열쇠를 가진 교회가 되어 우리 교회의 성도와 모든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