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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신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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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신명기 9:1-8)

오늘 아침에는 지난 주일에 읽은 똑 같은 본문 신명기 9장을 오늘 다시 택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도 드리는 말씀의 중심은 지난 주에 이어 다시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말씀을 따라 살자는 것입니다.  들어도 금방 잊거나 또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여기고 지나쳐버리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고 말씀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부족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들으라, 너는 알라, 기억하라’ 하면서 자기 백성들을 향해 같은 말씀을 또 전하고 다시 전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기억나게 하고 지켜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행을 마치고 가나안을 정복한 후 그 땅에 정착하여 배부르고 평안하게 살게 되면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의 미래를 염려하였습니다.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 배부르고 평안하게 되면 하나님을 잊고 자기 자신의 의로움과 능력에 도취되어 마치 자기 스스로 성공한 것처럼 여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생스러울 때는 그래도 하나님을 찾고 급하면 부르짖기도 했지만 이제 안정된 삶을 시작하면 평안함에 빠져 지난 날 나그네로 살던 시절을 까맣게 잊고 세상의 풍요와 안락에 젖어 하나님을 잊고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영국에 발을 디딜 때에는 히드로 공항 이민국 관리들의 사무적인 딱딱한 태도와 언어의 장벽 때문에 영국 땅 첫 시작부터 주눅이 들었던 적이 있던 우리들입니다.  낯선 땅에서 생소한 문화와 환경에 적응하느라 긴장하고 답답하고 때로는 속상했던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던 우리들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교우들은 그 시절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진한 어린이와 같은 믿음으로 기도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여 이제 불편함이 많이 해소되고 그럭저럭 살만 하게 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느슨해진 나의 신앙상태와 긴장이 풀린 경건생활에 흠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 

광야 40년간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입구까지 동행한 모세는 그 사이에 겪었던 자기 동족들의 신앙성향과 삶의 습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지도자였습니다.  이제 그 곳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땅에서 평안하게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산업이 잘되어 소유가 풍부하게 될 때에 순식간에 하나님을 잊고 이방인들이 사는 방식을 따라 살 것을 예측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땅에 들어왔다고 인정하겠지만 그것도 온전히 100%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기 보다는 자신들의 의로움과 정직함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상급이라고 여기며 받을 것 받은 것처럼 당연시 할 것을 염려한 모세였습니다. 

이런 백성들을 향해 모세는 어떻게 경고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가 너보다 강한 나라들로 들어가 그것을 얻을 것이니 그 성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을 만큼 강한 나라들이다.  너희도 아는 것처럼 너희는 그 땅의 원주민들이 거대한 족속이라고 두려워하며 떨었던 연약한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너는 알라, 그들의 강력한 군사력과 철통 같은 성을 무너뜨리고 승리하는 것은 너희들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앞서 싸워주심으로 너희가 얻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마음으로 ‘우리가 의롭고 정직한 백성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상을 주셨다고 생각할 것이니 제발 착각하지 말라’고 미리 경고합니다.  너희가 의롭고 정직한 민족이라 그 땅을 주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의 죄악이 너무 크고 중하여 죄악을 쓸어내기 위하여 그들을 쫓아내신 것뿐이다.  그리고 너희의 의로움과 정직 때문이라기 보다는 너희 조상들과 맺은 약속을 성실하게 이루시기 위하여 너희를 그 땅으로 인도하셨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너희는 다만 그 죄악을 몰아내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선택되어 부름을 받은 백성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 읽은 본문의 중심 구절을 다시 봅니다.  9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모세는 40년 광야 생활 가운데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실망시킨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 그들의 실패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너희들이 스스로 자신을 의롭고 정직하다고 하느냐?  착각으로부터 깨어나 겸손하게 자신을 인정하라고 깨우칩니다.  ‘이 곧은 백성’라는 말은 언제라도 하나님을 배신하고 등을 돌릴 가능성이 있는 고집 세고 완악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곧은 목은 이미 광야생활에서 여러 차례 입증되었던 고질적인 습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민의식은 하나님께로부터 만민 중에 택함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었습니다.  그 많은 민족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으로 보면 얼마든지 자랑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의 참 목적이 어디에 있음을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비뚤어진 선민의식으로 다른 민족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며 무시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염려했던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의롭고 정직한 백성이라는 착각과 자만심으로 가득 찬 백성들이었습니다. 

그 자신만만한 선민의식이 그들을 순결한 백성으로 구별되어 살게 하는 장점도 있었지만 대부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들은 그 교만한 선민의식 때문에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는 백성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로움으로 가득 찬 영적 교만함은 자신들을 죄로부터 구하러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결정적인 실패로 드러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자만심은 오늘날 유태인들에게서도 변함이 없이 보이는 민족주의 우월의식이기도 합니다.

대한적십자사 한완상 총재가 지난 5월에 이스라엘 적십자사와 팔레스틴 적신월사를 방문하고 돌아와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설교한 내용 가운데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에서 나온 안내자를 따라 예루살렘의 웅장한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전시물을 둘러보면서 한기를 느꼈답니다.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만큼 외롭고 괴로운 삶을 살았던 민족은 드물지요.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 기독교가 강행한 십자군전쟁에 의해 무슬림도 아닌데 억울하게 학살당한 유대인들, 20세기에는 히틀러에 의해 끔찍하게 죽어간 유대인들, 그들의 후손들이 이 박물관에 와서 느낄 전율을 그분도 느낄 수 있었답니다.

그 전시물들을 보면서 문득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저지른 만행이 떠올라 그 시절에 신음하면서 죽어갔던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래서 그 안내자에게 ‘우리도 일제하에 비슷한 고통을 받았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그 안내자로부터 ‘ 아, 그랬군요.  당신들도 당해보셨군요’라는 반응을 기대했는데 그 안내자는
그의 이야기를 아예 무시하더랍니다.  ‘너희들이 겪은 고통을 어디 우리 유대인들의 고통에 감히 비교하느냐’ 라고 무시하는 듯 하면서 계속 자기들의 고난만을 열정적으로 해설하더랍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고통을 상기시키고 확산시키는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남의 고통과 다른 민족의 억울한 지난날의 고통, 그리고 오늘의 분노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무관심한 것이 오늘 그 선민들의 문제임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지금 자기들이 팔레스틴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해자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짐짓 모르는 척하는 태도가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틴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땅을 강점 당하고, 소수 유대인 정착민들을 위해 설치한 위압적인 콘크리트 장벽 때문에 이동의 자유를 빼앗긴 팔레스틴 사람들의 설움과 증오와 분노의 고통이 불길이 훨훨 타오르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답니다.

오직 자신들만 의롭고 경건하며 피해자라는 태도, 다른 민족의 아픔과 고난은 자기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의 태도와 지금 지구상에 일어나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그들의 태도가 왜곡된 선민의식에서 나온 교만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기야 일본사람들도 자기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저지른 비인도적인 만행에 대해서는 함구하면서 자신들이 원폭피해자라는 점을 강조하여 세계 민족들에게 자신들의 아픔을 호소하는 파렴치함이 있습니다. 

벌써 10년 전 일입니다만 이스라엘을 방문하였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서 받은 인상은 한마디로 거만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국경 검문소에서 이스라엘 경비원들이 관광객들에게 보이는 태도는 마치 죄인들을 다루듯이 거칠고 딱딱한 무례함입니다.  물론 철저한 보안 때문이라는 점은 남북한의 긴장 관계로 항상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우리 나라 환경에서 늘 경험하던 비슷한 일이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지나치다는 불쾌함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역시 출국하는 공항 로비에서도 무장한 경찰들이 관광객들을 감시하며 보이는 거친 태도, 그리고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의 거만스런 태도는 마치 관광객들이 귀찮다는 식의 태도로 보이기만 합니다.  우리는 성지순례라는 감동된 마음으로 그 땅을 방문했지만 그들은 너희들이 오거나 말거나 우리는 아쉬울 것이 없다는 투의 사무적인 태도를 보일 뿐입니다.  그뿐인가요?  호텔 식당에서 정통 유대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불쾌한 태도로 지배인을 불러 우리 일행이 식탁에 꺼내놓은 고추장을 당장 치우라고 요청하며 자기는 멀찍이 떨어져 앉아 앞뒤로 몸을 흔들며 열심히 기도서를 읽는 모습을 볼 때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기에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보이는 극단적인 폭력과 차별은 자신들이 과거에 당한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당연히 그럴만하다고 여기는 교만함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나의 고난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이해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불쌍히 여기는 역지사지의 능력이 부족한 오만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는 것이 한 총재의 말이었습니다.  많은 부분에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자신들만 의롭고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교만한 선민의식입니다. 

스스로 노력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율법을 잘 지켜 의롭게 되고 구제와 선을 행하여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면 그들은 그렇게 할 것이고 또 그것을 더 좋아할 사람들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사람들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라는 말에 언짢아 하고 자존심 상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의로움과 정직함을 드러내어 그 대가로 구원을 얻었다고 자랑하고픈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가서 내가 무엇인가를 잘 해서 왔다고 자랑할 것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자신만만한 사람들입니다.  조금만 더 선행을 하고 조금만 더 기도하면 만사가 잘 될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저 주시는 구원을 선물로 받지 못하고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탐탁하게 여지기 않고 뭔가 내가 남보다 의롭고 정직함을 보여 하나님께 점수를 얻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며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여 그래도 내가 누구보다는 더 의롭고 정직하다는 비교의식에서 우월감을 가지고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를 가벼운 것으로 여겨 거절하고 내가 무엇인가 노력하여 하나님을 거들어 나의 구원을 이룬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나의 힘과 노력과 지혜로 내가 당연히 얻을 만한 것을 상급으로 얻고 있다고 당당하게 여기며 자기 의로움에 젖어 살고 있는 교만함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시시한 것으로 여기고 감사치 못하게 만듭니다.  참으로 목이 곧은 백성의 태도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죄를 지음으로써 구원이 필요하도록 만드는 일뿐이다’라는 말이 참으로 적절합니다. 

목이 곧다는 것은 고집이 세고 완악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음이 곧거나 허리가 곧으면 사람답고 건강에 유익하지만 목이 곧아서는 좋을 일이 없습니다.  지난 번에 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장수 국방장관이 김정일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악수를 나누었다고 하여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적국의 수장 앞에서 고개를 숙이면 안 된다는 선배들의 충고를 따른 것이라 하기도 하고, 다만 교범에 나온 대로 군인으로서 몸에 밴 자세를 취했을 뿐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김 장관의 속 마음은 모르지만 그의 곧은 태도가 우리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칭찬 쪽이 많은 듯 합니다. 

굽힐 때는 굽히고 곧아야 할 때는 곧은 것이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히 굽히고 죄의 세력 앞에서는 곧아야 했는데 거꾸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상 앞에서는 굽히고 자신들의 영혼을 쉽게 팔았습니다.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할 줄 몰랐고 참고 견뎌야 할 때 믿음이 없는 자들처럼 가볍게 하나님을 배신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때에는 자신들이 그 자리에 차고 들어가 앉았습니다.  스스로 의로운 줄 알고 정직한 줄 아는 착각하는 백성들입니다.  그들을 가리켜 모세는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가장 지혜롭고 능력 있었던 인물 두 사람을 성경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구약에서 솔로몬 왕과 신약에서 사도 바울을 꼽을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 솔로몬은 인생 중기에 하나님을 떠나 오만 방자한 삶을 살다가 말년에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으나 나라가 부강해지고 그의 지혜가 세상에 알려진 후에 이방 나라 공주들과 정략결혼을 하면서 그들이 가져온 우상들을 성전으로 끌어들이며 우상숭배를 묵인했던 타락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록했다고 알려지는 전도서에서 그의 말년에 고백한 인생의 지혜는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이룬 모든 것들은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요,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에 걸 맞는 솔로몬의 시 한편이 시편 127편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하나님께서 성을 지키시지 않으면 지키는 자의 수고가 헛되도다.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그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하는 시입니다.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수고는 결국 헛된 것이었다는 솔로몬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자랑할 만한 것들이 있을 겁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할만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옥스포드에서 공부하게 된 것도 자랑할만한 조건입니다.  결코 쉽게 얻은 영광이 아닙니다.  잠을 줄이며 고생하면서 공부한 보람도 있고 앞날에 대한 소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육체적으로 자랑할만한 것이 너무도 많았던 바울이었지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에 그에게 있어서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였습니다.  그의 학문과 혈통, 종교적 열정과 고결한 삶 등 누구보다도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런 자부심으로 젊은 시절을 지냈던 장래가 유망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에 나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모든 것이 결코 아무 쓸모 없는 배설물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얻은 그것으로 그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었고 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유익한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와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생명보다 더 자랑할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고백입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의 여러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던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모세가 신명기 10장12절 이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행복을 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니 지켜 행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여호와께서 오직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그 후손들을 만민 중에 택하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만민 중에 택하여 거룩한 백성을 삼으셨고 이 땅에서 평안하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여 겸손함으로 그를 경외하고 섬기는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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