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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그릿 시냇가 (왕상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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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그릿 시냇가 (왕상 17:1-7)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 선생은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꽤 살 만한 곳이라 생각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찌무라 간조 선생의 표현이 얼마나 적절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하고 난 다음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래, 이 땅을 거쳐 갔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 흙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밟고 다닌 길이 이미 수천 년 전에 이 땅을 살다가 죽은 자의 시신일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보금자리라고 생각하는 집터가 수천 년 전의 공동묘지였는지도 모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죽고 나면, 우리의 육체가 천 년 후에 길바닥 흙이 되어서 누군가의 발아래 밟힐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누군가의 집터가 되어서 주춧돌을 이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은 시체를 묻는 곳입니다. 인간의 육체를 묻는 곳입니다. 따라서 새 것도 생명도 진리도 절대로 밑에서부터는 오지 않습니다. 위에서부터 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위를 보아야만 합니다. 모든 것은 위에서부터 옵니다.

  여호와 신앙의 투사 엘리야가 예고도 없이 홀연 나타나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에게 가뭄을 예언한 후 그릿 시냇가로 피신하는 장면입니다. 엘리야의 가뭄 예언은 가히 돈키호테적입니다. 당시의 상황은 당대의 권력자 아합을 필두로 온 백성이 이방의 우상 숭배 도입에 열을 올리던 시기입니다. 이러한 대세를 거슬러 ‘여호와의 이름’으로 재앙을 선포하는 엘리야의 용기는 당돌하다 못해 무모해 보입니다. 그들은 엘리야를 불순한 촌놈의 계란으로 바위치기 쯤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가장 어렵고 어두운 시대에 엘리야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처럼 오늘 이 시대에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계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한 행운과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한 것 같이 인생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면서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최고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

  본문 1절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디셉은 엘리야의 고향으로 성경에 여섯 번이나 언급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디셉에서 출생하여 길르앗에 정착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엘리야의 생애는 그 같은 이름의 뜻을 구현하는 데 바쳤습니다. 엘리야는 모세에 버금가는 인물로서 유대인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그가 엘리야인지 물어 볼 정도였습니다. 엘리야는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라고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은 새삼스러운 것 같지만 실상은 바알 숭배가 만연한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강한 거부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참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지 바알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말입니다. 바알을 섬기는 무리가 다수인 당시의 형편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적인 현주소와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신앙 고백인 동시에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대사(大使)의 자격임을 밝히는 말입니다. 또한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때를 따라서 적절히 내리는 단비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결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수년 간 비가 없으리라는 가뭄 예언 역시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입니다. 더욱이 여호와의 말씀이 없는 한 가뭄이 가시지 않으리라는 엘리야의 선언은 바알 숭배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바알은 땅에 비를 내리는 농사를 주관하는 신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부시맨>이라는 영화에는 아프리카의 부시맨이 나옵니다. 그 부시맨이 콜라병 하나를 줍고서 분란이 생깁니다. 서양 사람들이 경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콜라를 마시고 무심코 병을 하나 던졌습니다. 이것이 부시맨 동네에 툭 떨어졌습니다. 부시맨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신이 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이 준 이 병은 정말 요술방망이었습니다. 밀가루 반죽을 이것으로 미니 기가 막혔습니다. 열매를 놓고 탁탁 찧으니 즙이 됩니다. 장난감도 되고 별의별 용도가 되 됩니다. 그 용도가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다양합니다. 실상 이 콜라병이 돈으로는 한 오 원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콜라병 때문에 온 부족이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족장이 콜라병을 가지고 자기가 아는 세상 끝까지 걸어가서 버리고 옵니다. 그리고 부족은 평화를 되찾습니다.

  콜라병과 같은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우상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느끼지도, 움직이지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다만 저주와 멸망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모든 우상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향하여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만 섬기라고 강력하게 외쳐야 합니다. 엘리야도 얼마든지 쉽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사명에는 고난과 희생이 따릅니다. 박수치고 갈채를 보내는 사람보다는 아합과 이세벨처럼 잡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직분, 은사, 생명, 물질, 모든 것은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신 도구입니다. 계급이나 특혜나 명예가 결코 아닙니다.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며 엘리야처럼 순종함으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말씀하시는 하나님

  본문 2-3절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한 시대의 다수를 홀로 상대해야 할 신앙의 용사 엘리야에게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수시로 말씀을 통해 일거수일투족을 지시하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소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이 있는 사마리아를 떠나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신 요단 앞 그릿 시냇가로 갔습니다. 그릿 시냇가는 요단 동편 길르앗의 동굴 지대에 있는 시내 중 하나입니다. 엘리야의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는 경고성 심판 예언이 있은 후 아합과 이세벨의 즉각적인 위협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합의 입장에서는 엘리야의 황당한 선포는 민심을 교란하는 유언비어요 반정부적인 도전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봉자와 이방신 숭배자 간의 정면 대결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에 때가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몸을 숨기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때와 기한을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아무 때나 나오고 들어가고, 말하고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숨어서 기다리라고 하시면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합니다. ‘나오라’하시면 고난과 역경을 뚫고 나와서 당당하게 외쳐야 합니다. 기도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하고 싶어도 참아야 할 때가 있고 침묵하고 싶어도 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과 내용에 모든 것을 맞추어야 합니다. 채널과 코드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일치시켜야 합니다. 잡음이나 딴 방송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100% 순종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나 의지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인간적인 모든 것을 깨끗이 걸러내고 제련해야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히 들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복음의 나팔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행동하는 예수님의 손과 발입니다. 우리가 모델이 된다거나 쇼윈도가 된다는 것이 총론이라면 손과 발이 된다는 것은 각론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영이셔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손과 발이 없습니다. 그분은 결국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2차 대전 때 독일이 연합군으로부터 심한 폭격을 받아서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어느 도시의 교회도 폭격을 맞았습니다. 교회를 폭격한 것은 아니고 도시를 폭격했는데 그 여파로 교회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상이 교회 마당에 서 있었는데 손이 부러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그 교회를 다시 복구하는데, 예수님의 상도 복구를 해야 했습니다. 그 상을 아예 없애고 새 상을 만들자는 등 손만 갈아 끼우자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의를 거친 그 교회 교인들은 최종적으로 그 예수님 상을 두 손이 없는 채로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대신 바로 그 좌대 밑에 ‘예수님은 당신의 손을 필요로 하십니다.’라고 적은 조그만 동판을 하나 붙였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손과 발이 되어 즉각적이고도 정확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인생의 그릿 시냇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기이며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내 마음과 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쉽게 실수하고 실망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귀를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입시다. 너무 세상과 사람의 소리에 익숙해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적으로 순종하는 이 시대의 엘리야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공급하시는 하나님

  본문 4-7절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엘리야가 예언 선포한 이후 이처럼 그릿 시냇가로 잠적해 버린 사실을 놓고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피신을 수치로 꺼리지 않고 즉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사람의 취향과 기질에 영합하여 영웅이 되기보다 자신을 잊은 듯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고 있습니다. 피신해 있는 동안 까마귀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습니다. 까마귀는 본래 매우 게걸스런 날짐승으로 시체와 썩은 것들을 즐겨 먹어치웁니다. 그런데 그런 까마귀들이 엘리야에게 음식을 고스란히 날라주었다는 데에서 기적적인 성격이 한층 더 강조됩니다. 한편 이처럼 까마귀도 순종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엘리야에게 깊은 감명과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즉 여호와 신앙의 열의가 대단한 엘리야의 눈에는 당시 우상 숭배에 열중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마치 부패한 시체를 탐하는 까마귀 떼처럼 불쌍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까마귀조차도 순종하는 도구로 하셨습니다. 따라서 까마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의 강권적인 은총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 하나님의 도구와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엘리야에게 은밀하고 안전하게 공급하시듯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믿음, 물질, 건강, 평안, 능력, 은사를 오늘도 공급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공급하신 것이며 앞으로도 풍성하게 공급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에벤에셀이며 여호와 이레인 것입니다. 우리는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면 됩니다.

  어느 만석꾼 집에 똑똑한 처녀가 시집을 갔습니다. 시집을 와서 보니 시어머니가 광 열쇠를 들고 경제권을 행사하시는데, 아무한테나 퍼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머슴도 없다고 하면 퍼 주고, 동네 사람도 오면 퍼 주고, 소작농도 오면 퍼 주고, 다 퍼 줍니다. 그래서 소위 교육을 받고 깨인 며느리가 그것을 보면서 ‘우리 어머니는 참 살림 못한다. 나중에 내가 살림을 하면 절대 저렇게 안 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며느리가 경제권을 이어 받았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정말 알뜰하게 살림을 꾸렸습니다. 가계부를 적어 가면서 가능한 한 아낄 것 아끼고 절약할 것 절약했는데, 중요한 것은 그때부터 만석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차이였겠습니까? 시어머니는 헤프게 쓰는 것 같았지만, 많은 사람을 위한 그늘이 되어 준 것입니다. 그 그늘 밑에서 모두가 신명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며느리가 가계부는 알뜰하게 꾸려 나갔을는지 모르지만, 함께 있는 사람들의 위로와 용기와 기쁨이 못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함께 곤궁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셔야 큰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끼고 인색하게 해서 되는 것 아닙니다. 십일조 아낀다고 부자 되겠습니까? 돈 나가는 구멍이 생깁니다. 그래서 언제나 모자랍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은혜 받기도 어렵습니다. 쉽게 시험에 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까마귀들을 통해서 채워 주십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그릿 시냇가에서 사명과 말씀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엘리야처럼 날마다 승리하시는 큰 일꾼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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