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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묶인 사랑 (미 6:6-8, 요일 3:21-24, 마 18: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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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인 사랑 (미 6:6-8, 요일 3:21-24, 마 18:15-20)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러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찬송으로 만나고 기도로 만나고 말씀으로 만납니다. 혹시 명절 때 어른들 찾아가서 만나 뵐 때 여러분 뭘 가지고 가십니까?

과일도 사가지고 가고 선물도 사가지고 가시지요. 그래야 인사가 되는 거구요. 만나 뵙는 분이나 찾아가는 분이나 작은 선물이 굉장한 만남의 고리가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물이 없어도 마음을 가지고 가도 됩니다.

어쨌든 만남에는 계기와 고리가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뵈러 여러분이 오셨고 하나님은 여러분 만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둘 사이 만남인데 만날 때 여러분이 하나님을 조금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이 있으시면 뭔가 가져 오셨어야 되는데 제가 묻지 않겠습니다.

각자 뭘 가져 오셨는지 하나님께 한번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근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만나러 올 때 꼭 가지고 온 선물이 있었습니다. 그 선물은 주로 짐승의 첫 새끼를 잡아서 번제물로 성전에 바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오늘 미가서 말씀 보면 제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바쳐야 되겠는데 하나님 뭘 바치면 좋겠습니까?

1년 된 송아지 바치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수천마리 양을 가지고 와서 바치면 저를 만나 주시겠습니까? 강물 가득 채울 올리브기름을 가지고 오면 하나님 좋아하시겠습니까?

여기까지는 짐승을 바치는 이야기. 우리가 만든 생산품을 바쳐서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을 만날 때 아주 혹독한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이삭을 바쳐라. 그래야 만나준다.

그렇게 요구해서 믿음의 조상이라 이름 하는 아브라함이 자기 맏아들을 바치려고 갔습니다. 가서 칼을 들어서 바치려다가 하나님이 맏아들 대신 다른 양을 옆에 준비해놓고 바치라고 했던 기록을 우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뭘 바쳐야 좋아하시고 만나주실까. 미가서가 마지막 하는 얘기입니다. 맏아들도 아니고 제 몸의 일부를 뭘 때든지 갖다 바치면 당신 나를 만나주시겠습니까? 이 전반의 얘기 가운데 어떻게 하면 제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을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헌금을 많이 들고 가면 됩니까? 뭘 들고 가면 됩니까? 미가서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공식적인 답변입니다. 다 좋은데 그것에다가 꼭 담아야 될게 있다. 하나님의 공의를 그 속에 담아 가지고 와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담아가지고 와라. 그리고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 살아왔다는 증거를 담아가지고 와라. 빈 껍질로 오지 말라. 그 뜻입니다.

물론 들고 온다고 그 물건에다가 사랑도 안 담고 가지고 오면 내가 좋아할 리가 없다. 하시는 말씀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말속에 진정이 담아져 있는지 주시는 분의 진심이 담아져있는지 그냥 흘러가는 말 같지만 다 압니다.

하나님은 왜 모르시겠습니까? 사람들도 아는데요, 다 압니다. 하나님 말씀이 물건으로 때오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실 된 공의와 사랑과 함께 하신다는 치성을 담아 와라. 이 얘기를 보면 하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날 때 반드시 중간 매개가 필요했습니다.

번제물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번제물이 하나님과 만나는 고리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느냐 하면요 하나님은 이 땅에 직접 몸으로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좀 높이 계셨습니다.

좀 전문 용어로 해서 하나님은 초월하시는 방식으로 계셨지 인간의 몸속에 제 정신 속에 인간의 역사 속에 내제하는 방식으로는 계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위에 계셨습니다. 천둥으로 말씀하시고 자연 재해로 말씀하시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라고 하는 걸로 하나님은 만났습니다.

높은데 계셔서 절대 타자로 초월하신 분으로 권위 있으신 분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계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으로 지금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계십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이 왜 미가를 통해서 공의를 시켜라. 사랑을 해라.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해라. 그걸 가지고 오라 말씀하셨느냐 하면 수많은 송아지를 가지고 오지만 올리브기름을 가지고 오지만 하나님의 지성적인 정신이 담겨있지 않을 때 하나님은 외로워한다. 너무 높아서 너무 낮은 인간과 동행할 수 없고 만날 수 없었습니다.

종교란 뭐냐? 신앙이 뭐냐고 구약성경을 가지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종교란, 신앙이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끌어당기든지 우리가 올라가든지 하나님과 만나고 싶어 하는 열정.

하나님을 만나서 뭔가 새롭게 이루려 하는 정성. 그게 신앙이고 신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계시시가 분명히 외로웠을 겁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기는 하나, 하나님 혼자 존재해서 무슨 재미가 있을지 제 인간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하나님은 함께 계시고 싶어 하시는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창조한 거 아닙니까? 창조 없이도 계신데 뭐 하러 창조 하십니까?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역사를 만드시고 그 속에 고난도 주시고 기쁨도 주시고 이 모든 생 속에 왜 하나님은 창조주이실까.

홀로 계시고 싶지 않다. 하나님의 존재란 함께 계시고 싶은 분이 하나님이고 그래서 창조주 피조물이 생겼습니다. 어차피 이것이 하나님이 스스로 택하신 하나님의 신적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계시는 하나님이 높은데 계셔서 낮은 곳에 계신 인간을 보고 명령도 내리고 가슴도 아파하고 힘들어도 하고. 그러나 그 하나님을 만날 때는 재물이 필요했습니다. 선물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수많은 송아지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양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올리브기름에도 불구하고 맏아들까지 바치는 헌신에도 불구하고 멀어져 가는 인간. 어떻게 인간과 함께 살까. 하나님의 결단입니다.

내가 다시는 높은데 있는 방식으로 같이 있고 싶어서는 안 되겠다. 내가 가자. 인간의 세계를 다 끌어올려서 하늘로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역사는 없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고 차라리 내가 내려가자. 가서 몸을 비비고 살고 싶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내가 직접 몸을 비비고 생각을 나누고 대화하면서 함께 살고 싶다.

신의 결단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결단해서 오신 것이 크리스마스요, 그분이 예수그리스도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하나님이 직접 몸 비비고 싶어서 인간 속에 오신 하나님. 그분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전문용어로 유대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은 초월하신 분으로 능력자로 계셨지만 오늘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 입으로는 하나님은 우리 속에, 제 가슴속에, 우리 인간 역사 속에 내재하는 방식으로 오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초월하시는 분 내재하시는 분. 두 분 같은 분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이 오늘 예수를 통해서 우리 역사 속에 함께 계십니다. 근데 늘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대들을 만나고 얘기하고 싶은데 어떤 방식으로 만나시느냐 하면 땅에서 요청이 있어야 만난다.

땅에서 연결고리를 메면 하늘도 메고 땅에서 풀면 하늘도 푼다. 구약성경에서 전혀 들어볼 수 없는 얘기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라. 하늘이 열리면 땅이 축복 받는 거고 하늘이 닫히면 땅 저주 받는 겁니다.

신약성경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말씀은 전혀 반대입니다. 땅에서 메면 하늘도 메고 땅에서 풀면 하늘도 푼다. 땅 멋대로 해라. 이건 엄청난 사고의 변화이며 하나님의 통치방식의 변화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몸 비비고 내려왔는데 이 땅은 인간이 사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공생, 공존, 상생 하는 땅입니다. 땅에서 멘다는 말은 지가 멘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이 맘대로 하늘을 주장하란 말이 아니라 인간 속에 오셔서 함께 몸을 비비는 예수 이름으로 메라. 그 말은 신의 이름으로 메라.

그러면 초월해 계신 하나님도 들으신다. 우리가 푸는데 내가 푸는 게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풀어라. 그러면 하늘도 풀린다. 여러분 기도하실 때 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십니까? 우리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내가 소원하는 거 다 들어주신다고 했지만 단, 조건이 있습니다. 몸 비비러온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야 내가 하늘이 열린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고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면 반듯이 들어주겠고 두 세 사람이 모여 있는 자리에 나는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기도의 형식이긴 합니다만 예수 이름으로 이 말은 하나님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름으로 호소하더라도 인간이 되신 하나님 이름으로 호소해야 내가 항상 같이 있겠다. 근데 이제는 내 자신 하나님 이름으로 그 이름은 예수.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같이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 만나러 올 때 무슨 선물을 가지고 오면 됩니까. 송아지가 필요합니까. 아니지요 이분이 하나님이 같이 오실 때 이 하나님은 송아지 번제물을 폐기했습니다.

아까 미가서의 말씀대로 송아지를 폐기하고 양 바치는 것도 폐기하고, 올리브기름도 필요 없고, 아들 바치는 것도 필요 없고, 몸을 찢어서 바치는 것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럼 뭘 필요했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라는 곳에서 자기 자신이 예수 이름으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번제물을 일회에 다 완성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게 고맙습니다. 번제물 바치지 마라. 남는 건 뭐냐 예수 이름으로 바쳤으므로 십자가에서 내가 직접 번제물을 바쳤으므로 이제는 그대들이 가져올 것은 수송아지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가져와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랑을 가져와라. 하나님과 겸손히 산다고 하는 삶의 모습을 가지고 와라. 그래야 나를 만난다. 여러분 가져올게 분명해 졌습니다. 물건 가져오라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가져오랍니다. 진실을 가져오랍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오셨는데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 만난 감격과 지성과 진실을 가져오셨으면 하나님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내재하시는 하나님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진실로 예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위에서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공의로 통치하신다. 우리 가운데 몸을 비비러 오신 하나님은 공의라고 하지 말고 이제는 사랑이라고 하여라. 사랑은 몸을 비비는 것이다. 공의는 위해서 통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통치하되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서로 섞여 살면서 나가는 것이 사랑이지 그 외에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가지고 오십시오. 혹시 여러분 옛날에 이런 얘기 들으셨습니까? 히말라야 산중에서 있었던 한 성자의 이야기.

인도의 썬다씽 이란 성자이야기 아십니까. 많이 아실 거예요. 두 사람이 히말라야 겨울 언덕 산길을 걷습니다. 걷다가 너무 추워서 눈 속에 빠져있는 한 환자를 봅니다. 한 사람은 그냥 지나쳐갑니다.

나 혼자 걷기도 힘든데 또 한 사람은 눈 속에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히말라야 산길을 걷습니다. 한참 걷다가 보니 또 한 사람이 눈 속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봤더니 아까 힘들다고 먼저 간 사람이 눈 속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고 간사람 등에 지고 간사람 그런 사람을 성자가 이름 하는데 그 이름이 썬다씽이고 훌륭한 인도의 성자입니다. 히말라야에서 일어났던 이야기. 비슷한 예로 우리 성경말씀에 있습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강도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는데 레위사람도 그냥가고 제사장도 그냥 하는데 사마리아 사람이 와서 여관에 같다주고 자기 돈까지 내서 고쳐주었습니다.

근데 이이야기를 통해서 제가 오늘 여러분과 꼭 나누고 싶은 초월해 계시다가 우리 가운데 내재하시는 하나님 이야기를 좀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웃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갔을 때 이런 고백을 했을 겁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약해서 그냥 갔습니다. 결론은 너무 추워서입니다. 가볍게 갔는데 그냥 죽었습니다. 둘째 사람은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해야 되겠고 하고 싶어서 어깨에 지고 갔더니 어깨 걸머진 이웃도 살고 저도 살았습니다. 그러나 땀을 흘렸습니다. 힘들었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통속적인 얘기입니다. 눈길에 쓰러진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십니까? 저는 가끔 살다가 제가 알거나 모르거나 이런 일을 제가 합니다.

정신없이 살다보니까 제가 잘못한 게 많습니다. 제가 정신 빼놓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정신 있게 살아갑니까? 매번이요? 저는 얼빠진 식으로 살아갈 때가 너무 많습니다. 넋 나간 사람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압니다.

저 자신 속에 넋이 있고 몸도 있고 정신도 있고 육체도 있고. 그리고 혼도 있고 몸도 있고. 제가 압니다. 살아가다가 혼을 빼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신 다 빼고 살고 넋을 다 버리고도 살고 그래도 살아갑니다. 제가 살아간걸 압니다.

히말라야 산중에 있는 눈 속에 묻힌 사람이 육체를 나간 정신. 저는 몸만 남아 있고 제 정신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웃이라고만 생각지 마십시오. 저는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통전적인 인간인데 저도 제 속에 있는 나와 겉에 있는 나가 둘이 분열하면 저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환자지요. 예수님 말씀이 뭔지 아십니까? 히말라야 산에서 사람을 엎는 것은 잃어버린 너를 찾아가는 것이다. 네가 떼버린 도망간 너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이 되어라. 그게 첫 번째 메시지라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몸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비비고 계십니다. 그 사람이 또 누굴까요? 그 사람은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몸을 비비겠다고 약속하고 오신 예수의 모습입니다.

그냥 쓰러지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몸 비비러 오실 때 그냥 하늘에 천군 천사처럼 오시는 게 아니라 눈길에 쓰러진 사람으로 오십니다. 그 사람이 비록 말은 안했지만 내가 예수다 하고 말했으면 다 엎었을 겁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다. 강도 만난 사람이다. 여리고 길에서. 나를 끌어안으면 예수를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끌어안는 방식이다. 끌어안으면 힘들다 땀을 흘려야한다. 고달프다. 그러나 산다. 성경말씀 전체에 보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고통 주셨지요. 힘도 주셨지요.

살려고 살리려고 땀 흘리려고 외롭지만 힘들게 하지만 그러나 생명 주시려고 여러분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우리가 감동으로 받아서 선한이웃 클리닉이 생겼습니다. 왜 생긴 지 아십니까?

외국인 노동자 도와주려고요? 아니지요. 그들 속에 있는 저 자신의 모습을 좀 찾으려고요. 병든 저를 찾으려고요. 외국인도 돕지만 동시에 그들 속에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봉사하시는 분들 나는 예수를 만났다. 외국인 속에 있는 예수를 내가 만났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봉사하시면 하나님이 오늘 함께 하실 겁니다. 사실은 이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오늘 우리에게 오시는지 그런 하나님을 만날 때 오늘 뭘 가지고 와야 됩니까? 요한1서의 말씀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오면 되지 않냐. 사랑 가지고 가십시다. 마태복음 말씀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간구하면 내가 들어주겠다. 두 세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선 두 사람은 저와 얼빠진 나. 둘이 만나서 기도하면. 제가 몸으로 기도할 때 정신 나간 상태로 기도하면 누가 들어줍니까? 저는 제 겉에 있는 나와 속에 있는 나가 결합할 때 전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백하는 것이든 자랑하는 것이든 슬퍼하는 것이든 기뻐하는 것이든 제가 완전히 둘이 만나야 제 안과 밖의 옛사람 새사람이 만나서 진실로 통합 돼야 제가 진실의 언어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게 두 사람입니다.

또 한사람이 누구냐. 저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몸 비비러 오신 하나님 예수가 저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는 세 사람이다. 셋이 합해서 하나다. 두 세 사람이 간구하면. 그 말은 셋이 모여서 하나가 돼서 예수 이름으로 간구하면 내가 들어주마. 하늘이 열린다.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 나는 항상 함께 있겠다. 이 이야기를 오늘 예수께서 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만나자 같이 가자 그리고 하늘을 열자. 이 말은 사랑을 묶습니다. 우리를 묶어줍니다.

결혼이 뭐냐고 물으면 결혼이란 사랑의 묶음입니다. 묶음이 싫으면 안하면 되지요. 묶습니다. 왜 묶습니까? 둘이 합해야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가장 큰 문제가 제가 정신없이 삽니까. 정신 있게 삽니까. 똑바로 삽니까. 그냥 얼빠지게 삽니까? 아주 단순하지만 심각한 문제들입니다.

둘이 분열되면 자아가 분열되면 거기는 심각한 비극이 찾아오는걸 우리 다 압니다. 하늘과 땅도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제가 끈으로 묶었으니 이 끈 잡고 같이 갑시다.

세계가 허덕이고 세계가 아플 때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세계와 함께 하시고 가정과 함께 하시고 인간과 함께 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서 나오는 양심의 소리가 좋습니까?

아니면 불편하십니까? 매일매일 살아가시면서 각자 일하는 장속에서 내 속에서 나오는 양심의 소리 공의의 소리 사랑의 소리 불편하십니까? 그래서 잠깐 내쫒습니까? 하나님이 같이 살기를 원하신다면 예수가 살기를 원하신다면 예수와 함께 살면 선을 실천해야 됩니다.

거짓도 말하지 말아야 됩니다. 아름답게 살아야 됩니다. 불편 하십니까? 예수를 떠나시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나는 항상 함께 있겠다고 기원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마. 내가 불편하면 버려라.

그러나 마지막은 생명은 아니다. 예수가 불편하면 버리십시오. 떠나십시오. 여러분 자유입니다. 근데 그분을 모시고 살면 그분의 음성을 듣고 살면 나는 진실로 복되다. 그러시면 끌어안으십시오.

내 양심의 소리 속에서 일어나는 속사람 이야기가 싫으면 그냥 떠나시면 되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노력하십니까? 왜 붙이려고 하십니까? 그것이 진실 된 생명의 길이면 저는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십시다. 이 세계도 노력하십시다.

그리고 저 삶이 땅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땅에서 풀고 땅에서 메면 하늘도 풀리고 하늘도 묶인다는데 어쩔 수 없이 예수와 함께 살아야 된다고 하면 불편한 예수가 아니라 기분 좋은 예수. 눈물의 예수가 아니라 웃음의 예수 그 예수를 같이 모시고 살 결단이서면 오늘 신앙을 그렇게 고백합시다.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나는 항상 함께 있겠다. 그리고 내가 빌린 십자가의 보혈은 번제물로 항상 주겠다고 약속하마. 나를 버려도 나는 기다린다. 나를 떠나도 나는 기다리마. 신앙의 약속과 결단은 그대들의 몫이니라.

여러분 자유로 하십시오. 필요하시면 끌어안으세요. 그리고 맵시다.
사랑은 살립니다. 생명이 약속돼 있습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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