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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눅 9: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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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눅 9:37-45) 

◈ 영국의 비평가이자 사회사상가 "러스킨" -- "지구상의 산들은 천연의 대 자원이다.
참된 종교는 거의 이 산 속에서 이루워졌다" 말했습니다.
기독교도 산과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마련해 주신 곳이 에덴 동산이었습니다.
② 그 후 극도로 타락한 세상을 물로 심판 하셨을 때 제 2의 인류의 시조로 남기신 노아와 그의 가족이 첫발을 디딘 곳은 아라랏 산이었습니다.
③ 믿음의 시조인 아브라함이 그의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친 곳은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④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시려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곳은 호렙 산이었습니다.
⑤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곳은
갈멜 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자주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산에서 가르치셨고. 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밤에 기도하셨던 곳은 겟세마네 동산이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곳은 갈보리 동산이었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신 곳은 감람 산이었습니다.

◈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마태와 마가 복음에는 그 목적이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 산에 오른 목적과 변화될 때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실 때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변화의 기적을 기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산 위에서의 변화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나의 택한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주시는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 기도를 통해 십자가 고난의 길을 담대하게 갈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시자 마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을 하십니다.
눅 9:51『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님의 기도는 메시야로서 사명의 길을 더 확고부동하게 걸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기도하셨고 기도를 통해서 힘과 능력을 얻으셨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방법입니다.
기도가 힘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담대한 믿음의 능력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신비한 경험을 하고 난 제자들은 그 산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복잡한 일상생활로 돌아가기 싫었습니다. 평범한 현실로 돌아가기 싫었습니다.
죄 많고 삭막한 세상 속으로 다시는 내려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그 산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광의 광채 속에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경험을 마음에 간직한 채 예수님을 따라 산을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그 다음의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던 다음 날, 예수님의 일행이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산 아래에서는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산 아래의 세계는 영광스러웠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 대신 귀신의 세력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영광의 광채 대신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던 무리 중에 한사람이 소리를 지르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산 아래 사람들의 모습은 참담합니다.
귀신에게 정복당해 무섭게 날뛰는 아이,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그의 아버지.
그리고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던 무능력한 예수님의 제자들.
무감각한 눈으로 쳐다만 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
이 모든 모습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그리고는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여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시고 아이를 낫게 하시고는 그 아버지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 산 아래 사람들의 모습 - 허무, 정욕, 파괴적
아이는 귀신들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질병이나 정신적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고백한대로 더러운 귀신이 그 아이의 영혼과 육체를 완전히 장악한 채
그에게 고통을 가해왔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막 9장에 보면 이 아이는 귀신들린 이 후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귀신이
고통을 가해오면 어디서든지 거꾸러져서 이를 갈며 거품을 흘리며 파리하여 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불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물 속을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귀신은 그 아이에게 들어온 날부터 아이의 육체는 물론 영혼과 인격과 이상까지도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그 아이는 이젠 완전히 귀신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의 의지는 전혀 없는 노리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날 사단은 우리의 자녀들을 정욕과 폭력과 방탕과 허무의 노예로 만들어 영혼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컴퓨터, 영화, 게임, 인터넷등 여러 매체를 통해서 무섭게 침투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예배는 시시하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놀림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나중에 목회를 하게 될 대상들이 이런 모습이어서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의 자녀에 대해서 안심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자녀를 책임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귀신은 아이에게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역사합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절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가정의 꿈과 행복은 다 깨졌습니다. 의술을 의지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종교의 힘을 빌려 보려했지만 그들도 무기력했습니다. 거기다가 동네 사람들의 눈빛이 예전같지 않았습니다.
귀신의 세력은 아이에게는 인생의 허무함을, 이웃과 사회에는 실망을, 종교에는 회의를 안겨주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돈도 벌고 자가용도 굴리고 좋은 집에서 각종 문화혜택을 누리면서 편안하게 살면서도
삶의 허무와 권태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무를 채우기 위해 여행도 해보고 술도 마셔보고 오락실도 출입해 보지만 별다른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보다도 더욱 쓸쓸하고 불안하고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산아래 사람들의 문제- 무기력, 무자비, 무관심
산아래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아이는 귀신들려 날뛰고, 아이의 아버지는 절망에 사로잡혀 극도로 지친 상태였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쓸데없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사역을 행하던 제자들도 무기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무원인 서기관들이 달려왔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이 일을 기회로 예수님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더 절망합니다. 고통받는 외아들을 위해서 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무능함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무능력하단 말인가! 도대체 이 애비가 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 뿐만 아니라 세상사람 모두가 다 이렇게 무능력하단 말인가! 어느 누구도 우리 아이를 구원해 줄 수 없단 말인가!"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인간의 무력함을 한탄하였을 것입니다.

▶ 인간은 모두 무력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이란 너무나 보잘 것 없습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계속 불치의 병이 늘어가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지식이 아무리 발달해도 지식은 모르는 것을 더 많이 만들어 냅니다.
옛날에는 책 몇 권 읽으면 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이론도 금방 옛날 것이 됩니다.
갈수록 더 무능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 제자들이 성의를 가지고 이 아이를 고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관심했습니다.
그냥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거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비판하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무자비하고 냉정한 모습입니까?
지금은 그 때보다 더 냉혹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일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무자비하고 무관심한 시대입니다.

◈ 산아래 사람들의 기쁨 - 예수 그리스도
아주 복잡한 문제들이 예수님께서 내려오심으로 깨끗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타나시자 군중들의 혼란과 갈등이 진정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당황됨은 사라졌습니다. 서기관의 비판도 쑥 들어가버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에게 들어갔던 사악한 귀신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고 아이는 오랜 세월만에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정상이 된 아이를 품안에 끌어안은 아버지의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온 가정에는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
이 가정 뿐 아니라 산 아래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장난을 제거하시며 귀신을 쫓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영혼을 되찾아주신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가정에 행복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십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가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감격이 넘쳤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 가셨지만 속시원한 해결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해결하시지 못하시거나 피한 문제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왔노라"(눅5:31.32).
예수님은 병든 인생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제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에 처해있는 인생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죽을 인생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인류의 희망이시고 생명이 되십니다.

세계적인 부흥사인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자신을 믿어 보라. 반드시 실망할 때가 올 것이다. 친구를 믿어 보라.
어느 날 죽거나 이별할 때가 있을 것이다. 명예나 돈을 믿어 보라.
어느 날 사라질 때가 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라. 후회없는 삶을 살것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영원토록 믿을 만한 분입니다.
죽도록 믿어서 결코 후회함이 없는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에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와 목사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전도대회 기간동안 이 일에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의지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영혼 구원의 일에 동참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함께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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