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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담대한 사람들 (히 10: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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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담대한 사람들 (히 10:35~39)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굉장한 결단이며 용기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 왔던 나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고백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의 주인이 나 자신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것을 고백을 하게 될 때에는 마음에 엄청난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누가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않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삶의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때로 사회적인 명사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신앙을 가지는 것이 큰 명예를 얻는 것과 같은 자부심과 자존감을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100여 년 전만 되돌아 봐도 이 땅의 믿음을 가졌던 신앙의 선배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건 모험과 도전이라고 말해도 틀림없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가 속해 있던 가정에서 소외되는 것이고 사회적인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갖는 것은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는 도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덕주 교수가 쓴 「새로 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개종이야기」라는 책에서 한국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어떠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한국 초대 교회 성도들은 순교를 각오한 신앙을 지녔습니다. 지난 삼일 저녁에 잠깐 예를 들었지만 한국인의 첫 목사였던 김창식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서양 선교사를 처음 보면서 호기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나는 서양 사람을 처음 만날 때에 그 모양이 우리 조선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보고 야만인으로 생각하고, 또 서양 사람들이 조선 사람의 아해들을 잡아먹는다는 풍설을 듣고 그 말이 참으로 풍설인지 사실인지를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선교사 올링거(F.Ohlinger)라는 분에 의해서 감화를 받았게 되어 예수를 믿고 성경책을 열심히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평양에서 조선 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일어났을 때 그도 잡혀 들어가 고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술회합니다. 

“래방비장인 신락균씨가 분부하되 너희들을 죽일 터이로되 내 용서하고 물어볼 말이 있노라. 너희가 이제라도 나아가서 도를 배반하고, (여기서 도란 기독교의 진리인 기독교 신앙입니다.) 하느님을 욕하면 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하고 하나씩 하나씩 물을세, 차례로 내게까지 왔는데 내 마음이 대단히 분하고 원통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욕할 수 없다하니 그놈들이 좌우에서 대단 때리며 욕하라 하며 무수히 난타함에 신덕균씨가 내 보내라 하니, 문밖으로 끌고 나오매, 마침 교우의 도움으로 도망하여 왔소.” 

이런 김창식의 모습을 보면서 선교사였던 셔우드 홀이 조선 백성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 불쌍한 친구 김창식은 백번이상 죽는 듯한 큰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나는 창식이가 석방되기 전에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닥터 홀은 그를 면회 갈 때마다 운다. 정말로 소름끼치는 일이다. 창식이가 오씨나 한씨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고 있는 이유는 관리들이 그에게 석방시켜주면 또 예수를 전도하겠는가 물었을 때, 그는 ‘석방 되어도 계속 예수를 전도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조선의 바울, 하나님께 영광을!” 

조선 청년의 모습 속에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았던 바울의 모습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선교사는 매질과 위협을 당하고 죽음에 처해져도 결코 굽히지 않는 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사도들이 굽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한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 속에 이처럼 담대한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의 기쁨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한 사람들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한국 초대 기독교 교회의 모습과 성도들의 모습은 신분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극복한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100여년 전만해도 조선 사회는 일종의 신분사회, 계급사회였습니다. 그때 가장 낮은 계급으로 알려진 직업은 백정이었습니다. 백정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조롱 받았습니다. 그런데 백정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어떻게 교회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고, 조선 사회까지 변화시키는 축복의 역사가 있었는지 다시 한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정이었다가 나중에 목사가 된 박성춘이라는 인물과 교회에 대해서 1895년 4월 21일 북장로교 선교사 무어(S.F.Moore)가 1895년 4월 21일 본국에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우리 작은 교회도 커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4명이 세례를 받아 어제로 교인수가 20명이나 되었습니다. 어제도 한명이 새로 들어왔습니다. 최근 세례 받은 사람들 가운데 박씨라고 하는 백정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백정이 가장 낮은 계층입니다. 거지보다도 더 낮은 계층이라고 누가 설명해 주더군요. 어제 그런데 잘나오던 교인 6명이 결석을 했습니다. 3명은 정식 교인이 아니고, 3명은 정식 교인입니다. 결석한 정식 교인 셋 중에 한사람은 최근 정부에서 임명받은 관리입니다.” 

무어 선교사는 왜 잘나오던 교인들이 나오지 않았는지 조사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양반교인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백정이 나오는 교회에 안 나온다고 한 것입니다. 양반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너무 오랜 세월 지켜온 것이기에 한순간에 그 관습을 깨뜨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로는 그들은 백정과 같은 교회에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 양반들이 어떻게 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자기들끼리 예배당을 짓거나 그들 중 한사람 집에서 예배를 드리겠지요.” 

백정을 거부하는 양반들에 대한 선교사의 마음은 아주 단호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반들의 신앙만이 특히 뛰어나 하늘나라에 자리를 보장 받을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정부 관리였던 이 주사는 답이 궁해지자 화를 내면서 마구 떠들었고 나는 그 말을 강제로 중단시켰습니다. 그러자 양반들이 모두 몰려 나갔고 두세 사람은 그냥 계속 남아 자기네 주장을 반복했습니다. 그때 나는 ‘예수 나를 사랑함’이란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자 거의 모두가 나가버렸습니다. 양반들은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가버렸습니다. 내 어학선생에게 다시 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나갔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선 시대의 양반이었다면 백정이 함께 와서 예배드릴 때 어떻게 했을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양반 중에 신씨 성을 가진 교인이 중재안을 가지고 왔습니다. 신씨 말로는 다음과 같이 해주기만 하면 양반들도 교회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당 안에 양반들을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고, 백정들에게 뒤편에 자리를 마련해 주어 조선의 전통 풍습을 해치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이것도 들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양반들이 교회를 떠나가서 따로 세운 교회가 홍문수골, 홍문동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박성춘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곤당골 교회였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선교사가 백정을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백정들은 다른 직업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자녀들도 백정이 되는 수밖에 없었고, 결혼도 백정들끼리 해야만 했습니다. 합법적인 권리라고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박성춘과 같은 백정으로서는 교회 공동체에 이처럼 자유로이 참여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하였습니다. 박성춘에게는 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백정들에게 있어서 교회를 나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대접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양반교회였고 다른 하나는 상놈교회였는데 기독교 복음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차별성,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신분사회를 극복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 놀랍게도 두 교회는 3년 후인 1898년 다시 통합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입니다. 

박성춘은 1911년 합해진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하게 됨으로써 백정 출신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 후인 1914년 왕손이었던 이재영이 교회에서 장로가 되어서 백정출신의 장로와 왕손출신 장로가 함께 시무하면서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음의 역사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신분, 인간의 차별, 인간이 만들어 놓은 비인격적인 것들을 다 무너뜨립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차별성을 끊어버리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진 자나 갖지 못 한자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2천년 후 조선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사랑과 복음의 역사로 신분상의 문제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참으로 쾌거 중의 쾌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교우들 안에 지역적인 차별성, 학벌의 차별성, 남녀의 차별성이 없습니까? 사람이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없어져야 합니다. 

초대 한국 교회가 갖고 있던 세 번째 특징은 하나님 말씀 중심의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개화파의 학자로서 양반 식자층을 대변하는 이수정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활동하며 미국의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인물입니다. 미국성서공회 일본지국 총무였던 루미스(H. Loomis)가 이수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수정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이수정의 최대 소망은 성경을 자기 민족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그는 미국성서공회가 다른 나라를 위해 한 일들을 알고 또 조선을 위해서도 기꺼이 성경반포 사업을 하려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기꺼이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리스도교 우선으로 한한(중국어-한국어) 성경번역 작업에 즉시 착수하였습니다. 그는 열심을 품고 일에 종사하고 있으며 어제 (1883년 5월 29일,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인천에 제물포항에 들어오기 바로 2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를 방문해 보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상당량이 이미 완성된 상태였습니다.” 

그가 번역한 것은 한문 성경 본문에 조선 식자층이 좋아했던 토를 단 형태의 것이었습니다. 1884년에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이 미국성서공회 발행으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어 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이것이 1884년인데, 1882년 만주 봉천에서 스코틀랜드성서공회 로스가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서 이미 한글로 번역하는 복음서가 있었습니다. 그때 함께 동참한 한국인이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한글로 번역되어서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오기 전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역을 이수정이 보았는데 평안도 사투리의 특성이 너무나 강하게 나타나서 중부 지역에서 쓰이는 말로 번역이 시급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식자층이 아니라 민중 백성 전체 계층을 향한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1885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 선교사로 나오면서 일본을 잠깐 들립니다. 그때 마가복음이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 복음서를 들고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합니다. 세계 선교 역사 속에 외국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먼저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은 백성은 한국밖에 없습니다. 한국 백성은 한국 사람이 번역한 한국말로 된 성경말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복음의 역사가 온 백성들에게 증거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한국말을 통해서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를 얻게 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조선의 역사였습니다. 한국 기독교에는 자신의 목숨을 건 담대한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복음이 심어졌습니다. 개인의 삶이 변화되었고 윤리적으로도 거룩한 삶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핍박과 억압 속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녔던 인물들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사회적 계급,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는 복음의 평등사상을 고취시켰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인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존중을 받아야 된다는 자유와 민주와 인권에 대한 사상을 이 땅에 심어 주셨습니다. 

또한 놀라운 것은 당시 많은 식자층에게만 알려졌던 한문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백성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억압받으며 자기 나라를 잃어버린 슬픔과 탄식 속에 있을 때 이 소식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백성들에게 미래의 갈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우리 민족, 곧 조선 민족도 하나님의 축복받는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안겨주었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보다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했던 신앙의 선배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틴 루터가 1517년 당시 종교적인 무능과 부패를 지적하면서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49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국 교회는 종교개혁, 새로운 변화의 사명을 위탁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과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질문 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기 변화의 능력을 갖고 있는가? 다르게 표현한다면 자정능력을 가진 교회인가? 교회는 현실에 부딪혀서 그것을 극복하고 해결하는 종교인가? 아니면 현실을 도피하는 종교인가를 질문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기독교 신앙의 핵심, 곧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구원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 앞에 모든 삶을 내걸었던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다시 서서 말씀을 읽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이 땅위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빛과 소금의 귀한 역사를 감당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하나님은 지금도 기대하십니다. 우리는 다시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살아있는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다는 사실을 선언하게 하옵소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성도가 되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히브리서 10:35)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요청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리와 생명과 사랑의 역사이기 때문에 담대함을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새롭게 서게 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다시 한번 교회와 사회와 민족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놀라운 믿음을 가진 선배들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되는 역사를 전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겠다는 고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내가 주인인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지 않았는지 다시 되돌아봅니다. 이제는 주님 말씀으로 다시 서게 하시고,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통해서 우리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민족과 교회가 변화되는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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