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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안이 점점 밝아지는 야곱 (창 4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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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이 점점 밝아지는 야곱 (창 48:12-20)

창세기에는 이스라엘의 건국시조로 여겨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마지막 모습이 매우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면서 그려져 있다. 인간은 생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그의 진정한 인생을 드러내어 주므로, 이 세 족장들의 마지막 모습을 살펴 보고자 한다.

1. 아브라함

먼저 아브라함의 노년을 살펴 보면, “그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주님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고 한다 (창24:1). 여기에서 “범사에”라는 말은 “모든 것”을 뜻한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음 삼중적이다. (1) 그는 많은 부를 쌓았으며, (2) 많은 후손을 낳았고 (25:1-2), (3) 모든 영적인 축복을 갖고 있었다. 마치 순복음 교회에서 즐겨 사용하는 축복 형식이 그의 삶에 그대로 구현된 것 같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아브라함의 임종 장면을 묘사하는 창세기 25:8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는 참으로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임종을 맞이하였다 (25:8). 아브라함은 충분히 살았다. 기운이 다할 때까지 살았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당했다. 평화로운 임종이었다. 새 번역에서는 “아브라함은 백발이 되도록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공동).

아브라함의 두 중심 후손을 이루었던 “이삭과 이스마엘”은 마치 “가화만사성”을 이루는 것처럼 부모의 임종을 슬퍼하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루었고 (25:9),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평생의 반려자였던 사라와 함께 막벨라 굴에 묻힐 수 있었다 (25:10).

아브라함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그는 주님의 명령과 약속을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왔다. 그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롬1:17) 한 평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다. 그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져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호를 얻었다 (대하 20:7). 그의 아들 이삭도 장가를 잘 보내었다. 그는 참으로 싹싹하고 유능한 자부를 얻었다.

아브라함은 영적인 후손과 계통도 제대로 만들었다. 조그만 땅이지만, 막벨라 굴을 히위 사람들에게 사서, 사라와 자신의 매장지를 준비하였다. 그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보였다. 그는 하나님의 품에 평안히 안겼다. 그의 임종 만큼 부러운 임종의 모습을 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2. 이삭

이삭의 마지막 노년생활에 대해 창세기 27:1은, “그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고 한다. 그는 맏아들 에서를 불러, “내가 이제 늙어 어느날 죽을는지 알지 못한다”며 (27:2), 에서에게 “나를 위하여 들로 나가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고 말한다(3-4절). 이와 같은 이삭의 모습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 이삭은 지금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는가? 에서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을만한 사람됨을 갖추었는가? 에서를 축복하려는 이삭의 판단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1)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신탁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에서와 야곱이 잉태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일 것이다.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라는 말씀을 주셨다. 이삭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지만, 이 말씀을 끝까지 붙잡지 못한 것 같다.

(2) 성경 저자가 본 에서는 본질적으로 짐승과 같은 인간이었다 (25:29-34). 에서는 태어날 때,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았으며,” “온몸이 털 투성이”였다. 에서의 육신적인 모습은 에서의 사람됨에 대한 상징이다. 그는 거의 짐승에 가깝다. 그는 본능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3) 에서는 어린 시절에 장자권을 팔아버렸다 (창25:29-34).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야곱이 팥죽을 보고, “나로 빨리 먹게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짐승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장면을 묘사한다. 배고픈 짐승처럼 먹을 것을 찾고 있다. 그는 감각적이다. 비이성적이다. 육적이다. 그는 배로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는 즉각적인 만족을 구하는 자이다. 신체적 욕망을 즉각적으로 이루고자 한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 가정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것이 그의 성격이었고, 인물됨이었다. 그는 원시적 인간이며, 특권과 신분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의 말을 보라. “배고파 죽겠는데 무슨 장자권이냐?” 이 말도 가볍고 천하다. 그는 영적인 가치관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4) 에서는 이방여인과 결혼하였다 (26:34-35). 에서는 헷 족속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26:34-35). 그것도 둘이나 취하였다. 이삭과 리브가는 깊은 근심에 빠졌다.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상했다 (26:34-35).

그런데도 이삭은 왜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는가? 두 가지 이유가 성경에 제시되고 있다.

(1) 에서는 ‘맏아들’이었다 (27:1). 이삭은 육신적인 순서를 중요시하고 있다. 맏아들은 당연히 장자로서 우대를 받아야 한다. 그는 장자 우대론, 선임자 우대론을 신봉한다.

(2) 이삭은 미식가였다. 그는 에서가 사냥해온 고기 요리를 좋아하였다. 그는 에서의 고기 맛에 중독되었다.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라. 죽기 전에 너를 마음껏 축복하리라” (27:4). 나이든 이삭이 이렇게 아들에게서 맛있는 고기 요리나 얻어먹고 그를 축복하려고 한다. 무슨 아버지 사랑이 이런가? 고기 대접하는 아들이 더 사랑스러운가? 그는 자신의 기분과 비위를 잘 맞추는 에서가 너무 좋았다. 아들의 겉 모습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는 아들들의 내면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

이삭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거칠고 야성적이지만 자신에게 맹신적이고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에서에게 모든 사랑을 쏟으며, 고집스럽게 족장의 축복을 넘기려고 한다. 그는 눈멀었고, 영적인 계통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다. 그의 “육신적인 어두움”은 “영적인 어두움”을 암시하고 있다. 이삭이 에서를 선택한 것은 심각한 영적 오해와 무지의 소치였다. 그는 영적인 분별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결국 그의 아내 리브가는 저주를 자청하면서까지 야곱에게 복을 주려고 하며, 야곱은 멀리 밧단아람까지 도망치게 되었다. 이삭의 노년생활을 보면, 그의 가정은 풍지박산이 난 것 같다. 젊은 날, 리브가를 맞이할 때 “광야에서 묵상하던 이삭”의 옛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24:63). 그는 나이는 많아졌지만, 인격은 무르익지 못한 듯 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신앙의 연조가 깊어진다고 우리의 믿음이 자연스럽게 다져지고, 자동적으로 깊어져 가는 것은 아니다. 이삭은 젊은 날에 매우 탄탄한 신앙을 보여주었지만, 완성해 나가지 못한다. 더 높은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 앉은 안타까운 모습을 남겨 주었다.

3. 야곱

창세기 48장은 야곱의 생애 마지막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있다. 신체적으로 보면, “그는 병들었고”(1절) “나이가 많았으므로 눈이 어두워서 앞을 볼 수 없었다” (10절).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은 그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찾아온다(1절). 야곱의 병은 깊었고, 기력이 없었기 때문에 침상에 누워 있다 (2절). 그러나 그는 요셉이 두 손자와 함께 왔다는 소식을 듣고 “힘을 내어 침상에 앉는다” (2절). 사랑하는 아들을 떠날 시간이 되었다. 이것이 아들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힘을 낸다. 이 모습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들이 누구냐?”고 묻는다(8절). 물론 그의 “눈이 어둡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은 확인을 하고 싶었다. 야곱은 힘이 없고, 지성도 흐릿해지는 때이지만, 정확하게 확인을 해간다.
“요셉이 그 아비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비가 가로되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겠다” (9절).

10절을 보면,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았다”고 한다 (개역). 여기에서 “안았다”는 포옹이다. 할아버지 야곱이 손을 내밀고, 아이들을 “끌어안는다” (표준). 할아버지와 손자들 사이에 접촉이 있다. 세대의 차이가 깊지만, 서로 이어진다.
11절을 보면, 야곱은 감동에 젖어 있다.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아들까지 보이셨도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안다.

12절을 보면,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개역). 아마 야곱이 두 아들을 무릎 위에 앉혔던 것 같다. “무릎 위에 앉히다”는 것은 그 당시 법으로 양자를 삼는 의식으로 알려져 있다. 야곱은 단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이며 아들로서 기업을 주려고 한다 (6절).
야곱은 두 손자를 축복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부른다. 그는 삼중적으로 부른다.

(1)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은 신앙의 정통성을 강조해준다. 그는 부모의 신앙을 이어 받았다. 그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느날 갑자기 길거리에서 만난 신이 아니라, 조상대대로 섬겨온 하나님이다.

(2)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혹은 ‘나의 목자되신 하나님’)은 신앙의 인격성을 말해준다.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모든 과정에서 끊임 없이 나를 인도하셨다.

(3)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신 사자께서”는 신앙의 체험성을 강조해준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자신을 건져주신 주님을 바라본다. 그 때는 그의 인생 최고의 위기였다. 에서의 분노와 복수가 폭발하는 시간이었다.

이어서 야곱은 삼중적인 축복을 한다.
“(1)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며, (2)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며 , (3)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세번째 축복에 나오는 “번식”이란 단어는 “물고기가 바다와 강에 우글거리는 모습”을 반영해준다 (창1:22).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좋았다. 요셉은 너무나 기뻤다. 이집트에서 낳은 두 아들이 완전히 야곱의 집안으로 들어 왔을 뿐 아니라, 항열까지 한 단계 올라가는 복을 받았다. 즉, 요셉은 야곱의 위치에 앉게 되며, 그의 아들들은 그의 형제들과 같은 반열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야곱은 축복의 우선 순위를 바꾸어 버린다.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개역, 14절).

야곱의 손이 “엇갈렸다”는 것은 “손을 뒤바꾼 것”이었다. 이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장자에게 오른 손, 차자에게 왼손을 얹는 것이 오래된 관례였기 때문이다. 요셉은 깜짝 놀랐다. 앞에서 요셉은 야곱이 실수하지 않게 두 아들의 위치를 잡았다. 13절에 보면, 그는 장자인 므낫세를 오른쪽에, 차자인 에브라임을 왼쪽에 두었다.

이것을 보고 요셉은 “기뻐하지 않았다” (17절). 그는 아버지가 큰 실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버지 손을 붙잡고 옮기려고 한다.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그는 아버지의 오른 손을 므낫세의 머리 위에 두려고 하였다. 그는 힘을 쓴다. 완력을 쓴다. 나이든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옮기고자 한다. 요셉은 일차적으로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 잘 못 본다고 생각하였다. 혹은 아버지가 또 옛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이 중요한 순간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또 아버지가 평지풍파를 일으키신다. 장자와 차자의 순서를 바꾸어 버림으로써,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요셉은 여전히 자연적인 우선 순위를 따르고자 한다. 왜 요셉은 자연적인 순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편애하였기 때문에, 거의 죽을 뻔한 악몽을 기억하였을 것이다. 장자는 장자의 복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장유유서”의 원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가정과 사회와 교회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야곱이 거부한다. 온건하지만 단호하게 거부한다. 화내지 않는다. 그는 요셉의 행동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조바심도 없다. 그러나 단호하고, 위엄이 있고, 확신이 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고 대답한다 (19절). 야곱은 자신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자연적인 순서가 있지만, 더 중요한 순서가 있다. 하나님의 복을 계승하는 데 있어서는, 자연권이 전부가 아니다. 야곱 자신도 이것이 자연스럽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더 큰 원리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눈이 어두운 야곱이 어떻게 손을 엇갈리게 뻗으면서, 에브라임이 므낫세 보다 더 큰 복을 받아야 함을 알았는지 잘 모른다. 아마 야곱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더 큰 영적 권위가 그를 압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내 멋대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순종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주도적으로 나의 손을 움직이고 계신다.

그래서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손이 신비롭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또한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있다. 그는 앞도 보지 못하지만 요셉의 두 아들 중 에브라임이 므낫세 보다 더 큰 복을 받아야 함을 알고 있다. 그만큼 야곱의 영안이 밝았다. 그는 맑고 깊은 영성을 갖고 있다. 사람이 늙어지면, 어린 아이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순간 야곱은 완전히 성숙하였고, 그가 체득한 신앙의 큰 원리를 전하고 있다. 그는 “아우가 형보다 더 크게 되는 원리”를 말한다.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룰 것이다” (19절).

야곱은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리브가가 받은 신탁에서 이것을 받았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 (25:23). 야곱은 신앙의 큰 원리를 제시한다. 이것이 신구약성서의 원리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요3:6).

야곱은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자연권 보다 더 높이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나의 권리 주장 위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반발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기력해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계산이나 전통이나 관습 보다 더욱 높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합리성이 결여되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유는 나의 합리성 위에 있다.

야곱도 축복의 우선순위가 바뀔 때 발생하는 여러 고통들을 개인적으로 깊이 경험하였다. 그는 에서와의 갈등 때문에, 부모 품을 떠나, 먼 밧단 아람까지 피난가고, 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모든 뜻 보다 더 위에 있음을 한평생 살면서 배웠다. 그는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어 축복한다. 야곱은 요셉의 뜻 뿐 아니라, 자신의 육신적인 뜻도 거부한다. 요셉은 더 이상 항의하지 않고, 아버지 말씀을 따른다.
야곱의 축복도 공정하다. 그는 므낫세의 복을 빼앗아 에브라임에게 주고 있지 않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19절).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20절).

야곱과 이삭의 노년을 비교해 볼 때, 야곱의 노년이 모범이 된다. 그의 노년의 모습은 젊은 시절과 비교해 볼 때, 비할 수 없을 만큼 성숙된 인격을 갖는다. 야곱은 요셉을 잃고, 시므온도 잃고,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까지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43:14)는 놀라운 고백을 한다. 이후, 그는 요셉을 만나러 이집트에 와서, 이집트의 대왕 바로 앞에 나아가 바로를 축복한다(47:9-10). 일개 가나안의 촌부가 이집트의 대왕을 축복하는 장면은 숭엄하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12아들의 미래에 대해 족장의 권위로 예언하며, 각자의 그릇에 따라 적합한 축복을 내려주며 창세기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야곱의 신앙역정을 보면, 예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보여준 첫 기적처럼, “나중에 나온 술이 먼저 나온 술 보다 더 좋은 모습”과 같다. 야곱의 믿음이 아름다운 것은 나이가 들면서,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 들면서 젊은 날의 잘못을 바로잡아간다. 그는 자신 속에 있는 고질적인 야비함과 속임수를 극복한다. 갈수록 더욱 성숙하고, 미래를 향한 통찰력을 가지며, 족장으로서의 책임을 바르게 수행하고 있다. 더 큰 영안이 열리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고,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몸으로, 삶으로 실현한다.

나이든 야곱의 모습은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다. 축복의 계통을 바로 보고, 알고, 하나님의 주권을 따르며,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이다. 이런 야곱의 모습을 우리도 닮아가기를 원한다. 그 동안 열심히 살아 왔지만, 더 큰 영적 세계를 향해 열려지고, 하나님의 뜻을 참으로 알고, 더 깊이 알며, 온전히 이루고,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가는 성도들이 되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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