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 (히 10:19 - 25)

  • 잡초 잡초
  • 341
  • 0

첨부 1


성 경 : 히 10 : 19 - 25   
제 목 :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

사자가, 나귀와 또 여우가 함께 사냥을 했습니다.  사냥을 해서 얻은 것들을  늘어놓고서는, 사자가 나귀에게 사냥한 고기의 분배를 맡겼습니다.
“나귀야, 네가 좀 공평하게 분배해 보거라”  나귀는 사자의 말을 듣고서 똑같이 세 등분으로 공평하게 나누었습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똑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보고 있던 사자가 화를 버럭 내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냥할 때 내가 제일 많이 애를 썼는데 이게 뭐냐?” 화를 내면서 나귀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이제 사자하고 여우만 남았습니다. 또 다시 사자가 여우에게 임무를 주었습니다. “여우야, 이번엔 네가 한번 공평하게 분배해 보아라.”
여러분, 여우가 어떻게 분배를 했을까요?  역시 여우는 지혜로웠습니다.
사냥해서 얻은 것 중에, 90%는 사자에게 돌리고, 나머지 10%만 자신이 차지  했습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아주 만족스러워 하면서 말했습니다.
“여우야, 너는 어디서 이렇게 지혜로운 생각이 떠올랐니?”
그 때 여우가 대답을 합니다.  “네, 나귀가 죽는 것을 보고 생각해냈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불공평한 분배처럼 보이지만, 여우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 생명을 건지기 위해, 가장 값진 지혜를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도, 바로 이런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 90 : 12절에 보면, 인생의 종국을 앞둔 모세가 이런 기도를 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의 남은 날을 세어볼 줄 아는,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모세와 같이, 오늘 우리도 인생의 종말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다 설 때가 있을 텐데, 그때에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가? 

참으로 중요한 질문 아닙니까?  우리의 삶에 있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신을 향해 꼭 던져 보아야 될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별로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 우리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해마다 반복되어지는 계절과 같이, 겨울을 아무런 대비 없이  보내도, 세월이 흐르면 또 다시 봄이 오는, 그런 여유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모든 인류의 종착역이 가까워가는, 말세를 살아가는 인생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가 보아도, 어려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단 개인의 종말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이 시대를 가리켜서 뭐라고 말씀을 합니까?
“이제 말세가 되었다.” “이제 종말의 때가 가까웠다.” 그래서 기도 중에도  “말세지말” 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말세를 당한 성도들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했어요.  우리가 속한 이 시대 속에서, 지금이 곧 깨어서 기도해야 될 시기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이 시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이미 말세에 대한 징조, 종말에 대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종말에 대한 증거를 열거하고 있는데요,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악담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조급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임박한 말세의 징조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방금 살펴본 딤후 3장의 말씀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부정하고 불신하고, 거역하는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완악함을 통해, 말세가 가까웠다는 것을 느끼라는 것이예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딤후 3장에 나타난 말세의 징조에 대한 결론에 해당하는, 5절의 말씀을 보세요. 뭐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라고 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 사람,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성도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성도들이 어떻게 되어진다고 했습니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도무지 능력이 나타나질 않고, 오히려 신앙 감정이 더 메말라가며,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더 좋아하는  가운데 점차 세속화되어 가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면, 그 때가 곧 말세의 때인 줄 알라고 하는, 경고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세의 징조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모습을 보세요.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이, 가장 비난을 받고 있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기주의적인 신앙입니다.  성도들이 자기 밖에 몰라요.  그리고 너무너무 돈을 좋아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축복은 곧 물질의 부요함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또 부모에게도 거역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이제 더 이상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 성도들의 성격도 점차 사나워져 가고 있어요.  뭐 조금만 건드리면, 그냥  벌컥 화를 냅니다.  그리고 너무 조급합니다.  인내할 줄을 몰라요.
또 세상을 좇아 쾌락을 사랑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동화되어져서,
이제는 자신이 크리스챤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성도들의 삶, 이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에 영적 종말을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성도들이, 이런 무책임하고, 불신앙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오늘날 이 시대가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세에는  모두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보세요.  뉴스라고는 온통 우리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내용들이지 않습니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도무지 소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오늘의 경제적인 침체와 정치적 혼란은, 우리 모두에게 불안감을 주고 있습니다. 

한 방송사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다수의 국민이 경제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단계를 뛰어넘어서, 실망과 분노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도 말을 합니다.  살림살이에 관련해서 62%가 어렵다고 응답을  했습니다.  경제위기와 관련해서 64%는, IMF보다도 더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고, 응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이들이 소망을 잃고, 한숨과 탄식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오늘날 성도들은 이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남의 일로 여기며,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시대의 아픔을 안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자신을 희생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너무나도 적습니다.  저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보다는, 자기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잘못된 줄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예요.  마치 어리석은 나귀와 같습니다.  똑같이 나누었지 않습니까? 
내 몫을 당연히 챙겼을 뿐인데 무엇이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내가 수고한 대로 얻은 것, 내가 소유라고 누리며 살아가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오히려 잘못을 지적하는 하나님을 향해 불만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들의 결국이 어찌 되겠습니까?  화가 난 사자로 인해 나귀가 죽임을 당했듯이, 이러한 성도들의 결국도, 하나님의 진노하심 가운데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은, 이런 어리석은 인생 살아가서는 안 될 줄로 압니다.  여우와 같이, 모든 것이 그저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우리 인생의 90%를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이것이 매우 불공평하게 보여 질 수 있겠으나, 바로 이러한 성도들의 삶이, 자신을 살리고, 더 나아가 민족  전체를 살리게 하는 신앙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성경을 보게 되면,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쌓이게 되고, 또 극에 달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욘 1 : 2절에 보세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악독이 하나님 앞에 극에 차서 상달되게 되면,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되는데,  그 때가 바로 말세의 때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불순종하고, 패역을 행하게 될 때, 하나님은 인간 지으셨음을 후회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참고 참고 또 참으시면서 그들이 돌이키기를 소원하셨지만, 끝내 돌이키지 아니하였기에,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그들을 물로 쓸어버리셨습니다. 

바벨 탑 사건도 그렇지요?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하나님께 도전을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그들의 계획을 꺾으시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해서 온 지면에 흩어 버리셨습니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 성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그 죄악이 극에 차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떨어져서, 그 성과 그 백성들이  다 멸망당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면서, 우리  자신의 신앙에 대한 경각심을, 새롭게 불러 일으켜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적 사실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수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말세의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극에 달한 불신앙의 모습을 통해 바로 멸하지 아니하시고, 오늘날도 요나와 같은 깨어 있는 성도들을 통해, 이 시대의 패역함을 돌이키시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니느웨 성이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셨는데, 그 기회를 누구를 통해 주셨습니까?  선지자 요나를 통해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욘 1 : 1절 이하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했습니다. 
요나의 외치는 복음을 듣고서, 그 백성들이 돌이킬 것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 이 시대의 니느웨 성이 어디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가, 니느웨 성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인 교회가 타락되어진 곳이 있다면, 그 곳이 바로 니느웨 성이라는 것이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날도 요나와 같은 목사들을 통해서,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며, 성도들이 신앙으로 돌이킬 것을 원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은, 강단에서 전파되어지는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마음에 새기며, 현재의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잘못된 신앙에서, 속히 돌이켜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매년 12월이 되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을, 우리가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떻습니까?  예수 없이 산타만 있는 크리스  마스를 즐기며, 연말연시와 맞물려 어지럽게 돌아갑니다. 
그러면 이런 때일수록, 교회의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세상의 타락한 문화를 거부하고, 성탄의 의미를 바로세우며, 신앙으로 한 해를 돌아보며 결산할 줄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문화에 동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도 이런 성도들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에 전하는 말씀이 복음인 줄 알고, 자신을 살리는 복음인 줄 알고, 회개하는 가운데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으로 바로 세워진 여러분들이, 또한 이 시대의 요나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에게, 그것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시금 요나가 되어져서, 이 땅의 패역함을 지적하고, 죄악에 빠져 있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이 울산 도성을 구원하고, 더 나아가  이 나라를 전체를 구원받게 만드는, 이 시대의 귀한 선지자적인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이, 바로 이런 요나와 같은 사명을 이 시대에 감당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그렇다면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과연 어떤 신앙을 갖추어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세 가지를,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는, 열심히 모여서 예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보세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라고 했습니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이라고 했는데, 그 날이 언제입니까? 
바로 종말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가 가까이 올수록, 더 열심히  모여서 예배하는 성도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결국 세상을 이기고, 또 세상을 구원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지요.  비로소 경건의 능력을 갖춘 성도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다른 종교인들과 다른 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우리 기독교인들의 특징은, 열심히 모이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인들보다 더 열심히 모이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입니다. 

그래서 어떤 군목 출신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군대에서 사병들을 점검하다 보면, 종교 란에 누구는 불교라고 쓰고, 누구는 카톨릭, 누구는 기독교 이렇게  쓰는데, 불교라고 쓴 친구들은, 절에 전혀 한번도 안 나가본 친구들이 대부분이랍니다.  자기 이름이 절에 있다고 해서 불교인이라 그러고, 또 자기 부모가 절에 나가니까, 자기도 그저 불교인이라고 쓴다는 겁니다. 

카톨릭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라고 쓴 사병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겁니다.
열심히 믿고 헌신적이고 신실하고,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가만히 보니까, 군대 오지 전까지도, 열심히 교회 다니다 온 사병들이 대부분이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독교의 특징이  지금은 많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흥하는 초대교회 특징이 무엇이었습니까? 
열심히 모였다는 겁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  했습니다.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예요.  어떤 능력입니까?  예루살렘과 로마 전체를 복음으로 뒤 흔들며 구원케 하는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며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어떤 목사님이 전도 주간에, 교인들에게 열심히 전도하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난 후에 인사를 하는데, 어떤 교인이 나오면서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목사님, 저도 간신히 주일날 교회 나오는데, 어떡해 남을 전도합니까?”  참 기가 막히지요. 
그 사람은 하여튼 주일날만 되면, 아침에 고민이랍니다.  어떤 고민입니까?
“오늘 교회를 갈까? 말까?”  “오늘 빠지면 두 주째 빠지게 되는데, 그러면 삼주 째는 체면 때문이라도 꼭 가야 되는데, 그 때 혹시 교회 못 갈 사정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맨 날 이런 고민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이렇게 교회 나온 사람이 무슨 전도를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능력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삶 속에서 능력이 나타나질 않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하고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나타나질 않는다는 것이예요.  여기에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또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가려면, 적어도 일주일에 다섯 번은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더 나아가  열 번은 교회에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아멘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일주일에 다섯 번에서, 열 번 교회에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새벽기도만 다 나와도 벌써 일곱 번입니다.  거기에다 주일예배, 주일저녁 예배, 수요예배, 이렇게만 해도 열 번입니다. 더 나아가 금요기도회나 구역예배까지 참석하면 몇 번입니까?  열 두 번입니다.
“아이구 목사님, 그렇게 교회 나오다간 몸살 나 죽습니다.”  여러분 안 죽습니다.  그렇게 교회 나오는 사람 있잖아요.  지금도 살아서 지금 여러분 앞에 설교하지 않습니까?  매 주일마다 열 두 번을 설교하는 저도 멀쩡히 살아있는데, 가만히 앉아서 설교 듣는 여러분이 죽겠습니까? 
오히려 교회에 나오는 숫자가 줄어들어 가니까 죽는 겁니다.  누가 죽습니까? 내 영이 죽는 겁니다.  육신은 편안해도, 내 속에 있는 영은 죽어가는 겁니다. 요 6 : 63절에 보세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과 같이 강단에서 전파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며, 하나님 말씀을 자주 자주 들을 때, 내 영혼이 살고,  내 삶이 생명력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적어도 여러분이 다섯 번 이상은 교회에 나올 때,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교회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고작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오면서, 아주 대단한 것처럼 뽐내고 다닌다는 것이지요.
“목사님, 저는요 한 주도 안 빠졌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성도가 주일성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기본 중에 기본인데, 그 신앙이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예전에 여러분 선배들의 신앙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주일성수는 그야말로 성도로서의 기본입니다.  집사쯤 되면, 공 예배 빠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권사나 장로가 되어지면, 새벽이고, 저녁이고, 철야고 아주 교회에 사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신앙에 비교할 때 오늘 우리의 신앙이 자랑할 만한 신앙입니까?
너무 부끄러운 신앙인 줄 압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주님이 보실 때 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롬 12 : 11절에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했습니다.  부지런히 예배함으로 주를 열심히 섬기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삶이 바쁘고 어려워도, 예배만큼은 소홀히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오직 권하여 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벧엘 교회 성도들은, 말세지말과 같은 이 시대에, 스스로가 하나님을 찾아 예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고, 또 주변의 신앙이 연약한 성도들을 권하고 독려해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힘쓰시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어떤 신앙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까?  믿음으로 소망을 굳게 잡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 말씀을 보세요.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가 누구이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그 약속하신 분은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미쁘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미쁘시다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미쁘시다는 말은 “신실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신실은 또 무슨 뜻입니까?  신실이란 말을 한문으로 풀이하면, 믿을 신자에, 열매 실자를 씁니다.  다시 말해, “믿는 대로 열매를 맺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그대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삼상 15 : 29절에 보세요.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을, 믿음으로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약속을 하셨습니까?  먼저 우리 영혼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또 죽음 뒤에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또 영생의 천국의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내 가정이 평안하고, 내 경영하는 모든 사업이 복을 받고, 내 자녀들이 복을 받아 장차 위대한 신앙의 가문을 이루어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해 주셨다는 겁니다. 

시 128편에 보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믿고, 소망 중에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 믿는 자들은 슬퍼하면  안 됩니다.  절망하면 안 됩니다.  왜입니까?  우리에게는 이 약속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약속하심에 대한 믿음이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너무 조급해 합니다.  그래서 당장의 응답을 구합니다. 
자기의 때에 응답이 없으면 쉽게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니 맨 날 무응답으로 살아가지요.  하나님의 응답이 없이 살아가는데 무슨 삶에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축복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소망 중에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지만, 우리 주변의 믿음이 연약하고, 신앙이 부족한 성도들을 위해, 더 나아가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신앙의 본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심을 믿고,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소망 중에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신앙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그 약속하심이, 여러분의 장래에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이런 귀한 은혜, 놀라운 축복 다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종말이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나타내야 할 신앙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세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라고 했습니다.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 믿음이 가장 필요하다면,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생은 어차피 나그네 길을 걸어가는 인생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영원한 저 천국인 줄 믿습니다.  힘들고 고달픈 나그네 길에서, 같이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며 돌봐주며 살아간다면,  이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외국에서 한국사람 만나기만 해도 반갑고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생면부지의 사람들입니다.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웃에서 같이 산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좋습니까?  같은 동포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진정 본향을 바라보며, 본향을 사모하는 신앙을 가졌다면,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결코 무관심하게 지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 천국에서 만날 사람들 아닙니까?  부모로부터 한 피를 물려받은  형제보다 더 끈끈한 사랑으로 맺어진 성도들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보혈의 공로로 하나 되어진 거룩한 공동체라는 겁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이 없고, 서로를 돌아봄이 없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나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 4 : 1 - 3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연구를 했는데,  얼음을 넣은 아주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게 했습니다.  한 방에는 한사람만 발을 담그고 시간을 재고, 또 다른 방에는 다섯 명을 함께 집어넣어 놓고 견디는 시간을 쟀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한사람이 발을 담근 데는 얼마 못 견디고 뛰쳐나왔습니다. 그런데 다섯 명이 함께 있던 곳에서는 훨씬 더 오래 견디더라는 겁니다.  서로 붙들고 격려하면서 그 얼음물에서 견뎌내는데, 꼭 두 배  이상을 견뎌내더라는 겁니다.  사람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서로 격려를 하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한사람이 어려움을 당해도, 다른 가족이 격려해주고 싸매 주고 붙들어 줄 때 힘이 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여러분 곁에 있는 분들은 이제 조금 있으면 다 천국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사 한번 나눕시다.  “당신은 나의 형제입니다.  천국 가는 그 날까지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서로 용납하며 이해하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신앙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삶에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서로 사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이 성천 교회를 세웠습니까?  모두가 어려운 중에 힘에 지나도록 헌신하며 이 교회를 세운 줄 믿습니다.  모두가 역전의 용사 아닙니까?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사랑의 용사가 되어서, 현재 성도들뿐만 아니라, 이후로 교회에 등록하게 되는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가운데, 이 금천구에서 가장 아름답게 성장하고 부흥하는 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