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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의 특권 (눅17: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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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종의 특권
성경 : 눅17:7-10

앞으로 2주 동안 주님을 섬기는 사역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한다. 다음 주에 우리는 사역 축제를 열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의 수많은 사역이 소개될 것이고 우리들이 이 사역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축제가 될 것이다. 이 행사의 이름에 축제라고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체면이나 형식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기뻐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한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이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섬기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잘 섬기기 어렵다. 예를 들면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같은 분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 분은 정말로 하나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가장 널리 알리신 분으로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분이었다. 그러나 그 분은 끝까지 겸손하셨고 낮은 자리에 머물러 계셨다. 이제는 몸이 많이 약해지셨는데, 만약 내게 그 분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아무리 사랑하고 존경하여 섬기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 대상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 분의 몸된 교회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은 특권 중에 특권이며 큰 기쁨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때에,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고, 거부 당할 걱정없이 나아갈 수 있으며, 엄청난 특권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다. 소위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 말씀은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을 섬기는 내용이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다름 아닌 그 분을 섬기게 되니 이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오늘의 말씀을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보자.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비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삶의 자세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우리의 신분이 바뀐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에게 자유의 특권이 생긴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오직 주님과 형제들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종으로서 밖에서 할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주인이 시킬 다른 일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나서도 ‘무익한 종이 내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 말씀의 내용은, 종들이 힘들지만 죽기 싫어서 억지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종들의 마땅한 의무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섬기는 것인가? 물론 후자이다. 이것이 참된 종의 가슴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영적인 자세를 볼 수 있다.

(1)종으로서 섬기는 것은 특권이다.

눅17:7-10이후, 11절 부터는 또 하나의 기적이 소개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 우리를 교훈하시는 말씀이니 우리는 항상 서로의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한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앞 뒤의 문맥이 서로 edit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말씀의 은혜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비유의 말씀 다음에는 열 명의 문둥병자들의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 이같이 두 가지의 다른 문맥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둥병은 사형선고와 같은 병이다. 그리고 이 병은 전염병이기 때문에 병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사람답게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을 가장 부정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사람으로서의 dignity가 허용되지 않았다. 어느 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접하고 그 분께서 그들을 지날 때에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열 명의 문둥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신다.  사회에서는 그들을 부정하다고 하며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제외시키지 않았고 그들을 고치셨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고 민망한 마음으로 그들을 고치셨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칠 때에, 대개는 touch하시며 고치셨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문둥병자를 만지는 자 마다 함께 부정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병을 고치시고 그들에게 dignity를 회복시켜 주셨다.

아이가 잠든 후에도 계속 책을 읽어주는 부모의 사랑이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주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성경에서는 우리들이 심령에 문둥병 걸린 자들이라고 말씀하였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하였는데, 심령이 문둥병 걸린 자들은 그 심령이 열리지 않는다. 감동이 있고 눈물도 있지만 얄팍한 모습과 얄팍한 감동으로 인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열리지 않는 법이다. 이것은 오직 우리들의 심령에 문둥병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돌 같은 마음과 문둥병 걸린 심령을 녹여 주셨던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에 우리들이 응답할 수 있는 마음으로 우리를 치유하셨다. 우리들 모두가 죄 안에서 완전히 죽었지만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다.

Jam을 빨아 먹는 꿀벌의 이야기가 있다. Jam을 발견한 꿀벌은 Jam을 빨아먹기 시작하다가 그 맛에 완전히 심취되어 간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날카로운 칼로 그 꿀벌의 몸을 잘라내어도 그는 느끼지 못하고 Jam을 먹는 일을 계속한다. 그러나 자신이 먹은 꿀이 잘려진 자신의 몸을 통해서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조차 없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몸통이 잘려나간 꿀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죄가 자신을 통해서 자신의 잘려진 몸통을 통해서 빠져나가는 것 조차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었다. 성경은 우리들이 우리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슬프거나 부정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의 보혈을 흘리시고 그 보혈과 사랑의 손길로 우리를 touch하셔서 우리를 고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은혜이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 아홉 명은 제 갈 길로 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회복된 것에 몰두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 한 명은 회복된 것에만 집중하지 않았고 고쳐주신 주님께 집중했다. 그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경배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님 만을 섬길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면 무익한 종의 비유와 이 사건을 연결시킨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회복되어서 다시 주님께로 돌아온 한 명의 사마리아인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고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치신 주님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100번이라도 엎드려 경배해야하고 감사해야하며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없는 섬김이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감사와 감격 속에서 주님을 섬기자.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특권이며 감사라고 고백하자. 우리는 육체적인 문둥병자보다 훨씬 더 끔찍한 심령의 문둥병자들이다. 이러한 우리들을 주님이 touch해 주심을 감사하며 예배하자. 예배는 worship service이다. 이것은 의무이며 책임일 뿐 아니라 우리의 특권이다.

(2)종으로서 섬기며 살 때에 영적인 power를 알게 된다.

이제는 이 비유의 앞 부분을 보자. 이 비유의 동기와 배경을 알 수 있다. 5절에서 제자들은 더 큰 믿음을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주님이 6절에서 하시는 말씀을 보자.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주님의 대답은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어도 뽕나무를 바다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저들의 마음 안에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진실한 믿음이라면 엄청난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하늘의 능력을 행할 수 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이 믿음을 가지고 정말로 능력을 발휘하려면 우리는 종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두 가지의 말씀을 이어 놓은 의미이며 배경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섬기는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 믿음의 power가 없는가?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을 올바로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개신교 자료를 보면 믿는 자의 수는 늘어 나지만 교회의 성도 수는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호감과 믿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내 마음과 뜻대로 믿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의 모습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어떤가? 지난 번에 아프카니스탄 인질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교회는 사랑받지 못했고 존경받지 못했다. 숫자적으로는 많이 부흥하였지만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종의 자리까지 내려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에 power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종하는 자리인 십자가까지 내려가셨다. 하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우리에게는 왜 능력이 없고 power가 없으며 기적도 없는가? 하나님의 능력은 낮은 자리를 통해서만 흐른다. 그래야 영광이 하나님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능력이 나타나질 않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섬김이다. 우리 모두 종의 모습으로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자.

다음 주에는 사역축제를 열고 여러분들을 초청할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섬기는 자리까지 내려갈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이민 생활로 인해서 바쁘지만 그래도 내가 (주님을 위해서)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반듯이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중요한 일을 반드시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사역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교회의 한 지체가 function을 멈추면 교회는 궁극적으로 멈추게 된다.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부르신 사역자들이다. 섬길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찬양이 있다. 참으로 오래 전부터 불러온 찬양이다. 이 찬양은 출애굽기21장1-6절의 내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니라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 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자녀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히브리 종들은 보통 7년이 지나면 자유를 갖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7년이 지나서도 그들이 자유인의 특권을 거부하며 영원히 자신의 주인을 섬기기를 원한다면 문설주에 대고 그 귀를 뚫게 되어 있었다. 이 찬양을 한번 불러보고 싶다.

'Pierce my ear, O Lord, my God
Take me to your door this day
I will serve no other gods
Lord I’m here to stay
For you have paid the price for me
With Your blood You ransomed me
I will serve you eternally
A free man I’ll never be’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가 워낙 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자신을 위해서 사용할 수 없다. 더우기 우리의 정욕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위해서 이 자유권을 포기하고 영적인 귀를 뚫어야 한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일생을 살겠다는 믿음의 고백을 하며 나아가는 자들이 되자.
(김승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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