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마 13:31-33)

  • 잡초 잡초
  • 751
  • 0

첨부 1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마 13:31-33)

(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겨자씨와 누룩 같은 사람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형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12제자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다니셨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은 엘리트나 능력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제자들의 구성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가 그렇습니다. 빌립은 이들의 친구이니 그도 어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태는 민족 반역자로 낙인 찍혔던 세리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민족주의 운동의 하나였던 열심당 운동을 따라 다녔던 가나안 인 시몬과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예수님을 팔아 버렸습니다. 도마는 의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그 출신성분을 잘 알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 출신이나 그곳에 기반을 두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갈릴리 시골 출신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력했던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또 어떠했습니까? 어떤 뜻 있는 사람이나 지식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불렸던 만큼 그들은 대부분 이런 부류에 속했을 것입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삭개오나 마태와 같은 세리들은 민족 반역자들입니다. 혈루병 앓는 여인, 문둥병자, 소경, 손 마른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운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백부장,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자들 또한 많았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도 있고(막달라 마리아), 군대 귀신 들린 자도 있습니다(데가볼리). 유력한 사람이라고 해보았자 니고데모 정도인데 그도 사람들 눈을 피해 밤중에 예수님을 방문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비전이나 전략이 탁월했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군대를 모으지도 않았고 자꾸 십자가에서 죽겠다고만 하셨습니다. 오죽 답답했던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소개했던 세례 요한도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가 맞습니까?”(눅7:20) 하고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과 그 주변에 모인 자들은 겨자씨와 누룩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겨자씨는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그 크기가 거의 1mm에 지나지 않습니다. 볼펜 똥만한 크기이고, 바늘 귀 정도의 크기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씨가 있지만 겨자씨를 비유로 드신 이유는 씨앗중 가장 작은 씨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운동의 모습과 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정말 겨자씨와 같이 작고 힘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누룩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누룩은 빵의 맛을 내는 데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죄나 오염된 종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집안에 있는 누룩들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한 일들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누룩과 같이 세상에서 버림받았고 천하게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며 제자들은 실망했을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은 바로 이처럼 실망한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단지 위로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 하나님나라 역사이기도 합니다. 천국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말은 천국은 마치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큰 나무를 이루는 것과 같은 양태로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겨자씨가 그렇습니다.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이것이 자라면 큰 나무 정도의 크기가 됩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3m 정도 크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중에 새들이 날아와 깃들일 정도가 됩니다. 누룩도 그렇습니다. 누룩은 정말 한줌도 안 되는 분량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밀가루 반죽 위에 뿌려지면 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합니다. 가루 서 말은 100명분의 빵 분량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입니다. 조그만 누룩이 엄청난 양의 밀가루의 성분을 바꾸고 맛을 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는 주님의 말씀대로 성취되어 가는 역사였습니다. 처음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운동은 12명이 되고(막3:14), 70명이 되고(눅10:17), 120명이 되고(행1:15), 3천 명이 되고(행2:41), 5천 명이 되고(행4:4), 수만 명이 되고(행21:20), 결국은 온 로마 사회가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나무와 큰 산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은 작고 연약한 무리들을 보고 있지만 결코 실망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겨자씨 한 알을 보며 새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겨자 씨 한 알이 땅에 심겨 그것이 자라 큰 나무가 되고 그 나무에 새가 깃들고 둥지를 틀면서 노래하는 새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공동체가 마치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바라볼 때 인생의 막차를 탄 인생처럼 비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거대한 흐름에서 자기는 비껴 서있는 것 같고 초라해 보이고 무능력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내 안에 생명의 성령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때와 계획을 기다리며 생명의 씨앗이 꽃피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아이들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여전히 준비만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랍게 사용하시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함께 설교를 듣고 있는 우리 아이들 안에서 어떤 씨앗이 자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코흘리개들처럼 보이고 유치해보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성장하여 큰 나무와 같은 위대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아니 이는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작고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 눈에 보이는 크기나 수에 현혹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양으로 따지면 가루 서 말과 한 줌의 누룩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힘은 누룩에 있습니다. 누룩이 온 밀가루를 바꾸어 버리고 맙니다. 겨자씨와 같은 크기의 다이아몬드는 그 값어치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겨자씨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천 년이 흘러도 그대로 이지만 겨자씨는 나무를 이루고 산을 이루고 온 땅을 덮을 수 있습니다. 바닷물은 엄청 짭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소금의 양은 3%밖에 되지 않습니다. 3%의 소금이 바닷물의 부패를 막습니다. 이처럼 많은 세상 사람들이 있지만 그중에 제대로 하나님 말씀을 담고 있는 3%가 더 소중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우리가 그 3%가 되기를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느냐 하나님의 비전이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미래는 그들의 것입니다. 

말씀의 겨자씨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힘입니다. 말씀은 처음 떨어질 때는 그 위력이 느껴지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새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비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3년 내내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 말씀이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위대한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위대한 문필가들이 나와서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네가 크니 내가 크니 자리다툼만 하던 그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위한 충성된 증인이 되어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

역사 기록이나 전설들을 보면 12제자들은 하나같이 지도자와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는 로마 교회의 수장이 되어 가톨릭의 1대 교황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 때에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안드레는 헬라 아가야 지역에서 전도하였고 마지막은 X 자형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X 자형 십자가를 안드레의 십자가라 부르기도 합니다. 세리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했고 에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다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다 나중에 에베소 지역에 활동하며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기름 가마에 던져졌으나 살아났으며 밧모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요한계시록 등을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의 제자였던 마가는 마가복음을 썼으며 이집트에서 콥틱 교를 일으켰습니다. 콥틱 교는 회교권의 핍박 가운데서도 2천 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그 수가 10%, 약 700-1000만에 이릅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으며 그곳에서 기도하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지금도 인도의 남부 첸나이란 곳에 가면 도마의 유적지가 있습니다. 저도 인도 의료 선교차 갔다가 그곳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도마가 숨어 지내던 동굴이 있는데 거기에는 도마가 기도하던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팔을 대고 기도하던 곳인데 하도 많이 기도하여 11자로 홈이 날 정도였습니다.  모두 하나 같이 겨자씨와 같은 존재였으나 신앙의 거목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정도의 신앙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말씀에서 나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내 안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을 축복의 삶으로 인도하는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샘곁에 심겨진 나무가 담을 넘어 지경을 넘고 번성하는 요셉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 소유가 땅끝 까지 이르는 사람들로,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되는 사람들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바랄 때 그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이 꿈의 씨앗을 말려버리고 맙니다. 세상 염려나, 재물의 욕심이나, 이 세상의 즐거움 때문에 이 말씀의 성장을 막고 맙니다. 결국 우리 싸움은 누가 이 믿음을 끝까지 붙잡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며 주셨던 말씀, 또 새해 첫날에 주셨던 말씀은 에스겔서 47장 9절 말씀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봅니다. 성전이 완성되자 그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스며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 물이 동쪽을 향하여 흘러가는데 약 1천 척을 가니 발목까지 찹니다. 다시 1천 척을 가니 무릅까지 찹니다. 이렇게 해서 허리까지 차고 나중엔 능히 헤엄쳐서도 건너기 힘든 강이 됩니다. 강이 되어 이 물이 흘러가는데 사해 바다에 흘러 죽었던 바다를 살립니다. 고기가 풍성하고, 그 주변에는 온각 약초와 과일이 자랍니다.

우리가 이 약속의 말씀을 받았지만 이 말씀의 꽃을 피게 만드는 것은 믿음입니다. 물이 항상 불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는 무릎까지 찼던 물이 다시 발목으로, 아니면 바닥까지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실망하고 말씀을 포기해 버립니다. 아닙니다. 굳건히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말씀을 붙잡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말씀의 힘이 저절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땅입니다. 씨앗을 움트게 하고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 씨앗을 품고 있으면 됩니다. 그 씨앗이 잘 자라도록 땅을 일구어 부드럽게 하고 자갈만 제거해 주면 됩니다.

주님께서 믿음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입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 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겨자씨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산이 옮겨지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예화를 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고사성어 중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태행산과 왕옥산 기슭에 우공(寓公)이라는 나이 90세 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노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을 위해 봉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을 가로 막고 있는 태행산과 왕옥산을 옮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두 산이 마을의 통행에 지장을 주고 마을의 발전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결심을 한 우공이 시작했던 일은 고작해야 그의 가족들과 함께 산에서 흙을 퍼다가 바다에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우공을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언제 저 태산 같이 큰 산을 다 옮길 수 있겠느냐는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때 우공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못 이루면 내 아들이 이룰 것이요, 내 아들이 못하면 그 손자가 이을 것이니, 그러다보면 산은 언젠가는 모두 없어질 것이요.” 이 말을 듣고 대경실색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두 산의 산신령들이었습니다. 산신령들은 곧 바로 하늘의 천제에게 가서 우공이 우리 산을 없애기 전에 먼저 옮겨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산이 원래의 자리에서 먼 곳으로 옮겨졌다는 고사입니다.

이것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입니다. 우공(寓公)이야 시간과 꾸준함의 힘을 믿었지만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권세를 가지신 분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며 비전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우리도 우공처럼 단순함을 가질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뜻하셨으니 언젠가는 이루시겠지’ 하며 단순하게 믿고 나갈 수는 없습니까? 단지 주님은 이 약속의 말씀만을 품고 있으라 말씀하십니다. 품고 있으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겠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무가 되매 새들이 깃들고

큰 나무가 되기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작고 볼품없는 것을 견뎌야 합니다. 겨자씨 얼마나 작습니까? 누룩은 보이지도 않고 얼마나 볼품없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는 너무 큰 것을 좋아하고 빠른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큰 대(大) 자를 좋아합니다. 오죽했으면 대한민국을 “대--한민국”하고 발음을 합니까? 다리를 만들어도 무슨 성수대교, 한강 대교 합니다. 거리도 대로입니다. 동작대로, 사당대로. 학교도 대학교, 대학원입니다. 대통령도 그렇고, 대사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빚대어 소통령 중통령이란 말도 나옵니다. 대사 말고 소사는 안 됩니까? 교회도 대형 교회가 있고, 소형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인데 대형이 어디 있고 소형이 어디 있습니까?

자꾸 큰 것만 좋아하니까? 작은 것의 소중함을 잃어버립니다. 아무리 큰 장강도 작은 개울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만큼의 시련과 연단을 거치고 세월이 흘러야 큰 강물이 됩니다. 어떤 분이 개척교회를 하면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이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빠른 게 아닙니다. 저를 위해서 저희 가정은 3대째 걸쳐 기도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십여 년 넘게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했습니다. 결코 빠른 게 아닙니다.” 작은 기도, 작은 믿음의 발걸음들이 쌓여 그것이 큰 산을 이룹니다. 쌓은 것도 없이 열매만 따려 하는 것은 날강도나 하는 짓입니다. 

지금 우리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은 존재입니다. 첫출발은 모두가 여기서부터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심긴 것은 부질없는 인간의 욕망이나 무력한 인간의 의지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큰 나무를 이루는 생명력을 가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무슨 영광이냐 하면 겨자씨와 같은 작은 존재가 큰 나무를 이루는 창조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시며, 볼품없는 것에서 기막힌 작품을 만드는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한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하나님께서 이처럼 겨자씨처럼 작고 누룩처럼 볼품없는 사람들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27절에서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제 자신이나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볼 때 정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고 장하고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간증거리가 되게 만드십니다. 나사렛의 보잘것없는 존재들을 통하여 2천년의 세계사를 지배하게 만드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로 큰 산과 같은 존재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세상 사람들이 기이하다고 여기게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 마지막 고백은 “내 그릇은 작고 나는 부족한데 하나님께서는 넘치도록 부어주셨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고백일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큰 나무를 이루어 그 밑에 수많은 사람들이 쉬어갈 것입니다. 그 가지에 수많은 새들이 둥지를 틀 것입니다. 우리 모두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뜻하신 위대한 인생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