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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로 노래하며 (시 14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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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노래하며 (시 147:1~15)

런던 시내의 길 한모퉁이에서 구두를 닦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부채로 인하여 아버지가 투옥되었기에 소년은 구두를 닦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구두를 닦으면서도 소년은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소년을 본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구두 닦는 일이 뭐가 그리 좋니?" 그때마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즐겁지요. 저는 지금 구두를 닦고 있는 게 아니라 희망을 닦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에 소년은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 라는 작품을 쓴 세계적인 작가인 찰스 디킨스(Charles H. Dickens)가 됩니다. 아무리 먹구름이 짙어도 먹구름 뒤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합력하여 선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로 노래하며 살아야 합니다. 찰스 디킨스가 반짝거리는 구두코 위에서 희망의 빛을 보았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희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로 노래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본문 시편 147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로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신 일을 들고 있습니다. 146편에서는 하나님이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때문에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시에서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기에 찬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기쁨과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으로 삶을 채워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노라면 기쁜 일보다 어려움이 더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더구나 신앙적 가치관 대신 물질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면 항상 불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욕망은 큰데, 실제로 그 욕망이 채워지기 않기 때문입니다. 체감온도(體感溫度)가 있는 것처럼 몸으로 느끼는 살림살이는 기쁜 일보다 불만스러운 일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며 살기보다는 짜증스러운 생활을 하며 스트레스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세상적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목표를 가지려는 행위입니다. 즉 예수를 믿음으로서 욕망으로 가득했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욕망을 버린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불만과 불평에서 벗어나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기쁨을 속으로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겉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시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찬양이 기쁨과 감사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찬양하라 내 영혼아' 를 부릅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감사하라 내 영혼아 감사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감사하라". 감사와 찬양은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감사한 마음이 있으면 찬양하게 됩니다. 또한 찬양하면 감사할 거리가 생깁니다. 이제 추수감사절을 앞둔 여러분들도 본문을 통하여 감사로 노래할 이유를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감사로 노래할 이유는,


첫째로 치유하시기에

어느 목사님이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3기말이란 진단이 나왔습니다. 요양원이라는 죽음의 병동에서 절망을 안고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병실로 나비가 날아 들어왔습니다. 나비는 나가지 못하고 창문에서 파드득거립니다. 그것을 바라보니 불쌍하고 자기의 신세 같아 붙잡아 밖으로 날려보내려 했지만, 나비는 잡히지 않으려고 파드득거리다가 오히려 날개가 더 상했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시는데 붙잡히지 않으려고 요리 조리 뻔질거리던 모습이 바로 자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깨달았습니다. 다시 기도하고 다시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해하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기적적으로 폐결핵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다시 목회를 시작하고 공부하여 신학대학 학장까지 지냈습니다. 그리고 '삶에 이르는 병' 이란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한국교계가 존경하는 김정준(金正俊)박사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상심한 자란 마음이 깨지고 상처 난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포로로 잡혀가는 상처를 입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회복하시며 치료하시기에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하나님을 노래함이 마땅하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치료자이십니다. 그들을 치신 하나님이 다시 그들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리시고 어루만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의미가 바로 '여호와 라파' 즉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상처난 우리를 치유하시고 싸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감사로 노래할 이유를 찾게 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께만 구원과 회복이 있고 치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인자하시기에

일본의 아오모리(靑森)현은 사과산지로 유명합니다. 어느 해 가을 사과 추수기에 태풍이 불어왔습니다. 풍작을 눈앞에 두던 농부들에게 재앙이 내린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과들이 익기 전에 땅에 떨어졌습니다. 모든 주민들이 하늘을 원망하며 낙망하고 있습니다. 그때 한 농부는 매달려 있는 사과를 바라보면서 감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아직 매달려 있는 사과들이 있으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떨어진 사과를 보고 불평 원망을 해도 다시 나무에 붙어 익은 사과가 될리 만무하니, 떨어진 사과를 보고 불평하지 말고 매달린 사과를 보고 감사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매달린 사과를 보고 감사하는 순간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일본도 대학 입시경쟁이 치열하기에, 매달린 사과에 의미를 부여하여 "절대 떨어지지 않는 사과" 라는 상표를 붙였습니다. 온갖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은 이 사과를 먹으면 입시생들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전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싼 값을 주고 이 사과를 사서 입시생들에게 선물하는 바람에 그 농부는 대박을 터뜨려 큰 부자가 되었답니다. 아무리 비참한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결같은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이스라엘은 바벨론과 앗수르의 강력한 군사력에 힘없이 굴복했었습니다. 군사의 힘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을 절실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고 들짐승과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능력과 자비를 겸비하신 하나님께서 강한 군대의 힘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보는 힘없는 이스라엘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체험하였기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깨달을 때 감사로 노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자를 볼 수 없는 눈은 영적으로 병든 눈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려지시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인자를 느끼면서 감사로 노래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평안주시기에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Francis Bernadone)에게 한번은 베르나르도(Bernard)라는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친구는 한참을 이야기하다 침대로 가서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진 척 합니다. 성 프란시스가 어떻게 기도하는가를 엿보기 위함입니다. 솔직히 성자는 어떻게 기도하는가 알고 싶었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친구가 잠든 것으로 알고 일어나 기도합니다. 눈과 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경건과 타오르는 열정으로 "오, 나의 하나님, 나의 모든 것" 이라며 기도합니다. 친구는 조용히 귀를 기울여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하는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오, 나의 하나님, 나의 모든 것" 하고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회개나 뉘우침이나 고민스러운 얼굴이 아니라 아주 밝은 얼굴이었습니다. 다시 한참을 아무 말이 없다가 "오, 나의 하나님, 나의 모든 것" 하고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친구 베르나르도는 성 프란시스의 기도가 "오, 나의 하나님, 나의 모든 것" 이란 말 외에 어떤 말도 없음을 알고는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을 냈습니다. "성자라고 해서 기도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를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기도는 단 한 마디 뿐이다" 라며 소문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성 프란시스는 멸망하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외아들을 보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묵상하면서, 감사 찬송의 이유를 "오 나의 하나님, 나의 모든 것" 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로 노래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가운데에 있는 너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셨다"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문빗장을 견고히 하심으로 보호해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복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경내를 평안하게 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감사하며 노래할 이유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는 모든 책의 판권을 국회 도서관에서 발부한다고 합니다. 텍사스에 사는 어느 실업인이 판권 신청을 하였는데 책의 제목이 '백만 번의 감사' (Millions of Thanks)였습니다. 책의 내용은 다른 말은 전혀 없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를 백만 번 되풀이해서 적은 것이었습니다. 국회 도서관은 책으로서 읽을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판권 발부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여 백만 번이나 '감사합니다' 를 적어 하나님을 알리고 싶었던 그의 감사하는 마음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백만 번 감사하며 노래하여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여러분의 삶을 감사로 채우십시오. 고난을 기쁨으로 극복하십시오. 고난이 삶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질은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늘 기쁨을 간직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감사로 노래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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