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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이 그럴 때냐? (창 1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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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그럴 때냐? (창 19:12-22)

어느 날 술집을 향해 가던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친구는 그 소리를 듣고서 교회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그대로 술집을 향해 갔습니다.

그 날 교회로 간 친구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회개하면서
삶의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술집으로 갔던 친구는 술주정뱅이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교회로 향했던 친구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술집으로 향했던 친구는 그 소식을 감옥에서 호외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운명의 차이는 어느 한 순간의 결단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 대통령이 바로 클리블랜드라는 분입니다.
사람의 운명은 일순간의 결단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어느 가전제품 회사의 광고가 생각납니다.
하물며 인생의 중대한 결정은 그의 일생을 좌우하는 것이므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머뭇거리거나 뒤로 미룰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되기 직전
극적으로 구출되는 롯과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곧 불과 유황이 떨어지기 직전의 긴급한 때입니다.

12-13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위기 속에서 구원의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의미 없이 살던 삶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고 영생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은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내신 독생자가 예수요,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롯은 복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결국 망하게 될 소돔 성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자기 혼자만 몰래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냥 그 성에서 멸망해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이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함께 떠나자’고 권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도라고 합니다.

그들을 그곳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그들이 불심판을 받고, 죽게 되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죄악입니다.
롯은 사위들에게 이 성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위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14절입니다. “농담으로 여겼더라.”
여기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저 농담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즐겁고 살기 좋은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겁니다.
지금 당장에 살기에 바쁘다는 겁니다.
그런 소리는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비록 교회에 나와 예배 시간에 참석하여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지만
성도들의 반응은 모두가 진지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농담까지는 아니라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듣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강하게 강조를 해도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강원도 해변 마을에 있는 어느 교회에 부임을 했습니다.
주일 날 부임 설교를 은혜롭게 전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난 다음에 모든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다음 주 설교를 지난주와 똑같이 했습니다.
교인들은 목사님이 이사하느라 바빠서 설교준비를 못해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서 목사님은 같은 설교를 했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니다 싶어서 ‘왜 같은 설교를 계속하십니까?’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 “도대체 들어 먹어야지” 하시더랍니다.

새로운 말씀을 많이 지속적으로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말씀이라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매주 설교 말씀을 듣다가 보니,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심각한 말씀을 전해도 교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에게 하는 소리로만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롯의 사위들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위기를 불러오는 원인이 아닐까요?

롯이 농담으로 여기는 사위들을 설득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은 흘러가고 이제는 정말로 더 이상 여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롯을 보는 천사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15절입니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아내와 두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천사는 롯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롯이 사위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상황의 긴박성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롯은 지체하지만 천사는 롯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재촉하고 계십니다.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는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얼른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고 계십니다.

제가 군목으로 근무할 때, 제 친구 군목이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한 병사가 상담을 요청해 왔답니다.
그런데 그 때는 가족들이 모두 함께 외식하러 가기로 약속을 했고,
지금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기에 미안하다고 하면서 내일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상담을 하기로 약속한 그 시간,
그 목사는 그 병사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평생 후회하게 될 아픔을 안고 있다고 눈물 머금은 목소리로 고백을 했습니다.
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한번은 다 죽어가는 사람이 말하기를
“형제여, 왜 당신은 나의 영혼에 대해 나에게 좀 더 억지로라도 간청하지 않았소?”

그 때에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
“그렇지. 당신은 내게 말해 주었었지.
하지만 당신은 항상 너무 조용하게 그것을 넘겨 버렸어.
당신이 만약 나에게 무릎을 꿇어가면서까지 재촉했더라면,
또는 나의 목덜미를 잡고 흔들기까지 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때가 늦었구려, 이제는 나 자신이 거의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구려!”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은 사람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게, 더 간절하게 재촉하지 않은 우리에게도 책임은 있습니다.
우리가 한 번 더 재촉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이 있다면,
우리는 롯을 재촉하는 천사처럼 그렇게 재촉해야 합니다.
그대로 두면 그는 멸망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사는 지체하는 롯과 그 가족들의 손을 잡고 인도하여 성 밖으로 나가
그들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천사의 태도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는 롯을 재촉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체하는 롯의 손을 잡고 인도하여 냅니다.
그 천사는 오늘도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강권하여 인도하시는 천사의 모습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 천사처럼 그렇게 강권하고 인도하는 자가 되라 하십니다.

사단은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그대로 멸망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단의 작전은 무엇인줄 아십니까?
뒤로 미루는 일입니다. 지체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도 좋은 일이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전도하고, 봉사하라.
그러나 오늘은 바빠서 안 되고, 내일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전은 최고의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고후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 받는 일은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하십시오. 지금하지 못하면 다음에도 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것인지 결단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지금 이 시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다. 나는 무릎을 꿇고 바쁘게 기도했다.
바쁘게 서둘러야 했고 일터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성급한 기도를 하고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나의 신앙적 의무는 행해졌고 이것만으로도 나의 영혼은 편안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나는 찬양할 시간이 없었다.
친구들에게는 그들이 나를 비웃을까봐 두려워 예수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다. 할일이 너무 많다.’ 그것이 나의 끊임없는 변명이었다.
궁핍한 자에게 온정을 베풀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지체하는 동안에 마침내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갔을 때 나는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주님은 손에 책을 들고 계셨는데, 그 책은 <생명의 책>이었다.
주님께서는 그 책을 찾아보시고는 내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이름이 없군요. 한때 당신 이름을 적으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소!’”

여러분이 좀 더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뒤로 미루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젊은 엄마들에게는 아이를 키우는 일을 핑계로 삼습니다.
사업하는 분들은 돈 좀 벌어 놓고 봉사하겠다고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시험에 합격하면 열심히 하겠다고 미룹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결코 그런 이유들로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가 되면 그런 사람은 또 다른 이유가 생기고 그것을 핑계대고
그는 일평생 신앙생활 제대로 할 수 없게 되고 마지막에 후회하게 됩니다.
결단은 항상 지금이라는 시간에 해야 합니다.
지금 할 수 없는 일은 다음에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때는 시간이 없고, 건강이 없고, 돈이 없습니다.
기억력도 없어지고, 팔다리에 힘도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소식을 듣게 될 때 망설입니다. 지체합니다.
아직은 여유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농담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천사의 재촉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우리도 나아가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재촉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긴박한 종말의식이 필요합니다.
내일로 미루며 지체하다가 더 이상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이라는 시간에 결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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