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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악의 판단기준 (시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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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판단기준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14:1)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자연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그 질서를 이해하고 그 질서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순간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 하는 삶인가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행동 하나하나마다 이것이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은 악한 삶이 된다고, 그런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세상에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법입니다. 법이 어떤 것이 선이고 악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법률들 속에서 왜 그것이 선한 것이고, 왜 그것이 악한 것인지 판단하는 근거를 주는 것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할 때, 자연법사상과 실정법 사상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I. 선악의 기준자

A. 자연법 사상

실정법은 실제로 법이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며, 법률로 정해진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법률이란 사회공동체의 규약이기 때문에 국가가 이러저러한 기준에 의해 법을 만들면 더 이상 그 근거를 요구할 것 없이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정법의 문제는 그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난 후 보면 우리나라 독재정권 때나 나치즘처럼 아주 나쁜 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법사상은 인간 속에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치가 있다는 근거로 만들어 집니다. 우리는 흔희 이것을 ‘경우’라고 말하는데, 법으로는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경우’라고 하는 것이 글로 쓰여 명시되진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하고, 이것으로 부터 자연법이라고 하는 것이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자연법으로 궁국적인 선과 악의 판단이 가능한가에 대해 로마시대 『키케로』는 ‘선악의 목적들, 선악의 궁국적 끝’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책을 썼는데, 선악의 궁국적인 기준이 존재하며, 그것은 인간 본성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본성이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 본성 안에 궁국적인 법들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왜 이렇게 혼란스럽습니까? 그래서 자연법사상으로는 자연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에 대해 많이 연구하지만, 답은 하늘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이루어진 세상은 다양성을 보여 주시만, 이 다양성 안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창조주께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께 답을 찾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위기와 회심의 문제에서 역력히 나타납니다. 인간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에 대한 문제가 너무 많을 때 문제 하나하나의 해결책을 찾아야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내려놓고 하나님 바라보고, 그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게 될 때 인생의 문제에 대해 눈을 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연법사상 또한 궁국적인 선악의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궁국적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B. 성경의 사상

성경은 처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 됩니다. 성경전체를 대표하는 요절은 요한복음 3:16이지만 이것을 올려놓는 토대는 창세기 1:1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할 수 있었고, 예수님이 구속하러 오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요한복음 3:16 전에 요하복음 1:1에서 창세기1:1을 되풀이 한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님께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어떠한 것을 처분할 권한은 소유한 사람에게 있고 이것을 인정하면서 사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양심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인정하는 것 이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복종의 의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하면 세상은, 나는 누구의 것인가?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주인에게 물어보고 사용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침범당할 때 사람들은 분노하고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소유권을 침범하는 것은 자신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고, 이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선악과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인정하는 모든 사람은 즉각적으로 그분께 복종하고 살아야 할 의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말은 이정하지만 실제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은 실천적 무신론자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 우리를 창조하셨고 창조의 목적을 정해놓으셨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II. 선악의 판단기준

무엇이 필요합니까? 목적지를 갈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깊은 회심을 통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놀라운 결단과 각오를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배향하고 살던 사람이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것이 참된 회심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깊은 지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과 어떻게 그 목적대로 살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놓인 처지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은 창조세계에 하나님의 창조의 빛이 현저히 사라졌고, 인간의 영혼도 어두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읽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주신 안내서가 바로 성경입니다.

아직도 지성이 약하여 성경을 봐도 창조의 목적을 다 알 수 없고, 사물의 이치를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한걸음, 한걸음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창조주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동기와 원천이 진실한 사랑,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이 초월적인 사랑은 단순이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 부어주시는 은혜작용의 결과인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의 사랑이 우리 안에 지순의 사랑으로 넘쳐나게 하심으로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순종할 때 지혜를 주셔서 실제적으로 그것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성경을 뒤로하고, 이 세상의 이치만을 깨닫거나 자신의 노력으로 창조의 이치를 깨달아 창조의 목적대로 살겠다고 하면 절대 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창조의 목적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무엇인지 남겨두셨지만 그것은 성경의 빛을 받을 때, 신비한 빛을 발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로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는 자연적, 특히 도덕적 질서를 충분히 보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세계를 향해 당신 안에 있는 표준과 당신의 마음을 인간이 충분히 알고 좇아 살아갈 수 있도록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계획, 창조의 목적, 내가 사는 이유 등을 성경을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아멘’하고 믿는 것이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을 믿어야 하는 이유와 더 잘 믿고, 의무를 더 잘 수행하기 위해 지식을 탐구하여 더 많은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 안에 더 놀라운 사랑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합니다. 마치 지식은 사랑은 모닥불을 더 활활 타오르게 하는 장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이 현재 왜 이렇게 냉담해져 있는지 살펴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을 아는 것에,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실증을 느끼므로 사랑의 불이 점점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법사상은 양심이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너는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느냐’라는 불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인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하신 상세한 내용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인간의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성경 안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악의 판단 기준이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할 때는 불분명하지만, 성경 66권 안에 있다고 할 때는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성경을 늘 연구하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아가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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