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사감사절] 향유 옥합을 깨뜨린 그 심정을 아십니까? (요 12:1-8)..

  • 잡초 잡초
  • 1111
  • 0

첨부 1


향유 옥합을 깨뜨린 그 심정을 아십니까? (요 12:1-8)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감사절 예배를 기뻐하실 것이라 믿어지시면 아멘! 합시다.

복음서 중에서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처럼 기뻐하신 적도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좋으셨는지 마태복음 26장 13절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이 일도 말하여지리라” 하셨을 정도였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흐뭇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로 기뻐하셨느냐 하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베다니에 머무셨을 때, 나사로 집에 갔을 때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얼마 전에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살려내시는 기적을 행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잩치 자리에서 나사로 동생인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옥합을 들고 예수님께 오더니 예수님 발에 쏟아 붓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일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이 행동을 본 사람들이 다 예수님처럼 기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분이 나빴습니다. 특히 가룟 유다는 그 모습을 보고 화를 내면서, 그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다른 제자들도 분개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 향유의 가격이 당시 장정 한 사람의 1년 품삯이 되는 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돈 가치로 따지면 3-4천만 원 정도 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발 한번 닦는데 써 버렸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리아의 심정이 더 공감이 되십니까? 가룟 유다의 반응이 더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 마음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십니까? 아마 여러분 중에도 마리아가 너무 지나친 낭비를 했다고 생각되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향유란 한 방울 한 방울 뿌리며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쏟아 부을 것이면 차라리 팔아서 정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말리시면서 “마리아야,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나 나누어 주어라” 하셔야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오히려 기뻐하시고 “복음이 전해 지는 곳에는 이 일도 반드시 증거되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이 본문은 당시에도 큰 논쟁거리였고,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입니다. 마리아가 정말 지나친 낭비를 한 것일까요?
여러분, 마리아와 가룟유다가 똑같은 일을 놓고서 서로 생각이 다릅니다.  무슨 차이일까? 믿음의 차이입니다.

당시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이해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었던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신 분입니다. 메시야가 아니면 진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마가복음 14장,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이 일이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사로 집이 아니고 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이 잔치가 벌어졌을까? 주석 학자들은 나병 환자 시몬이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의 남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예수님께서 형부의 나병을 고쳐 주신 분입니다. 게다가 마리아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고 가실 때마다 베다니의 집에 들러서 말씀하실 때, 늘 예수님 앞에 앉아 말씀을 귀담아 들었던 여인으로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진정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그 향유 옥합을 하나님께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 점을 이해해야 마리아가 왜 그렇게 했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후로(요11:53)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 현상금이 붙어있는 상태였습니다. (요11:57) 이런 때, 마리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맞이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생각하기에는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아주 흉흉한 때 자신이 예수님께 무엇으로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자기에게 있는 모든 재산인 향유 옥합을 가져다 예수님 발에 부은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무엇인가 해드려야 하겠다는 마음이 든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 드리는 심정으로 향유 옥합을 바쳤습니다. 그에게는 결코 지나치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가진 것이 그것 밖에 없어 그것만 바친 것 뿐이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마리아의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흔히 자식을 위해서는 대신 죽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식이 병들어 죽을 때 자신의 생명이라도 거두어서 이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합니다. 조국을 위하여 이 한 목숨 바친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누가 지나치다고 말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떠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고 나면 하나님께는 너무 지나치게 해드렸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드릴 때 “이것 너무 지나치잖아. 이것 낭비잖아.” 그렇게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마리아와 가룟 유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분명한 믿음을 가졌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믿음의 차이입니다,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고 화를 내고 이것은 낭비라고 말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는 아직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예물드릴 때 지나치다고 화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3년 동안이나 함께 지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도적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에 팔아버렸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보면 마리아의 헌신은 낭비요, 지나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하나님에 합당하신 대접을 받으시지 못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런 대접을 요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한 번도 하나님처럼 대접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섬기고 죽으러 오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처럼 대접해 달라고 요구하신 적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접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종으로 섬기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기막힌 대접을 받으신 것입니다.
향유 옥합 한 병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달랐습니다. 당시 처녀들이 수 년에 걸쳐서 향유를 조금씩 구해서 옥합에 모아 놓았다가 결혼할 때가 되면 팔아서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그 향유를 송두리째 예수님께 부었다는 것은 시집 가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모든 삶은 주님께 다 드립니다.” 그런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앞에서는 아까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신 것처럼, 내게도 하나님은 전혀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 맞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섬겨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정말 하나님 처럼 대접해 보셨습니까?

추수 감사 예배를 지키지만 성도들마다 감사가 다릅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믿음의 차이입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정말 믿어지는 사람과, 내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에 대해서 아직도 희미한 믿음 밖에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교회가 가까워서 교회 봉사를 많이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차이입니다. 여러분, 돈이 많아야 헌금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고 사랑하는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지 못하면 선교사로 나가는 성도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여기는 감사 예배를 드렸던 적이 있었나?’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기보다는 늘 “이것 해 주세요, 저것이 힘들어요.” 하고 매달리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예배는 셀 수도 없이 드렸습니다. 때때로 은혜도 받았고 간절했던 적도 있었지만, 정말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없습니다.
  다윗은 시편 18편 1절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했는데 저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제게 있어 예배는 의무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예배하면 [떠들지마] 였습니다.
  목사가 되고도 한동안 예배는 제게 중요한 사역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예배를 묵상하면서 참 괴로웠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제 생애에 한 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했던 때가 있었음이 기억났습니다.
  목회와 대학원 공부를 다 잘하기 어려워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에 목회를 위하여 대학원 학위를 포기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라고 여겨졌지만 너무 힘들었습니다. 몸살이 날 정도로 고민하던 그 때, 저는 한 번도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린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목사가 되고도 받으려고만 했지 드렸다고 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단하였습니다. 제 석사 학위가 하나님께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만, 그 때 제가 주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주님, 석사 학위를 바치겠습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그것은 제 옥합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내가 정말 너의 하나님이냐?’ 물어오셨던 순간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너무 망설였지만 분명한 것은 “예, 하나님은 제 하나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 제 목회 삶은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나의 계획, 나의 목표는 다 사라졌지만 주님이 제 삶을 붙잡고 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며 감사 예배를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마리아는 오빠가 다시 살아나서 당연히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놀라운 복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마리아보다 훨씬 더 큰 감격과 감사해야만 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죽었던 오빠를 다시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는 죄와 저주에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생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오빠가 다시 산 정도가 아닙니다. 분명히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으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면 오빠가 다시 살아난 것하고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원수되고 마귀 자식으로 죄의 종노릇하던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시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신 그 은혜와 사랑이 죽은 오빠가 다시 살아난 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받은 은혜가 적어서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드린 지나쳐 보일 정도의 감사를 왜 그렇게 기뻐하셨으며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이 일도 말하여지리라” 하셨을까요? 그 까닭이 있습니다.
가슴 저리는 감사가 있는 믿음이 구원받을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가슴 저리도록 하나님께 감사하는 믿음이 있어야 그 사람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사절을 지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십자가 복음을 믿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감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죄에서 자유함을 믿는다고 하면서 마리아와 같은 감사가 없다면 그가 믿은 것일까요? 하나님의 자녀 됨을 믿은 것일까요? 영생 천국을 소유했음을 믿은 것일까요?
진정한 믿음은 감사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예수님 발에 쏟아부은 것 처럼 그렇게 마음이 절절히 끊는 감사가 그가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진짜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고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내 죄가 다 사함을 받았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내가 천국에 가게 되었고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길을 인도하시고 내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다고 정말 믿는다면, 마리아처럼 감사가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믿지만, 감사는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믿음이 없으면 구원받은 믿음인지를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으로부터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가 자신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주지 않은 일로 1만 달라트 탕감받은 것이 취소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진정한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진정한 뜻은 무엇입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면 거기에 합당한 감사가 있어야 그 믿음이 진짜라는 것입니다.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믿음이 사랑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곧 감사요 믿음이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이 죽으시기까지 내게 은혜를 주신 것을 정말 믿는다면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용서해주는 일은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정말 예수님을 믿는지 정말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지는 사랑을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셔야 합니다.

  지난 목회자 모임에서 어느 목사님께서 소록도를 다녀온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코도 눈썹도 없고 손가락 발가락 없는 이들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할 때, 무엇이라고 기도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안나더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 좋을지 입이 막혔답니다.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목사님에게 “멀리서 오셨나 봐요, 감사해요.” 하는데 사모님과 눈물 밖에 안나더랍니다.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가 한 감사하다는 말이 그렇게 마음에 콱 꽂혀 오는데, 그 동안 목사님 내외는 감사해 본 적이 없었더랍니다. 감사한다고 했어도 다 형식이었고 인색했고 표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감사하다면서 어떻게 조금만 맘에 안들어도 조금만 속상해도 불평하고 원망했는지 자신은 감사를 모르고 살았더랍나다. 소록도에 있는 교인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내내 울었답니다.

  마지막 시간에 그 곳에서 사역하시는 환자인 전도사님이 인사 말씀을 하셨답니다. “여러분은 인간 마지막 섬, 소록도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꼭 가야할 섬이 있습니다. 정말 마지막 섬이 있습니다. 거기 가보셨습니까? 가보지 않았다면 가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섬입니까?” 하고 물으니 ”찌라도라고 아시는지요?“ 하시더랍니다.

여러분은 찌라도를 아십니까?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구원의 하나님, 그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아서 풀무불에 던져질 지경이 되었을 때 담대하게 왕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단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찌라도의 믿음 없으면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추수 감사절을 지키게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구원 받을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오늘 감사절 예배를 드릴 때 마음 속에서부터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예수님 발에 부을 때처럼 가슴이 저린 감사가 있습니까?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지를 이 감사절을 통해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감사하는 믿음이 있는가?’

추수감사절은 마지막 대 추수 때를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감사하는 믿음 만이 구원받을 믿음입니다, 감사절을 지키면서 우리 믿음이 정말 구원받을 믿음인지, 믿음이 떨어졌다면 어디서 문제가 생긴 것인지 점검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늘 부르는 찬송가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 와-
    그 발 위에 입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험한 산 길 오르신 예수-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 놓았네.♪”

  토마스칼라엘은 평생 살면서 자기 아내에게 수고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어느 날 병들어서 죽었습니다. 그는 그 시체를 붙잡고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여보, 5분만 눈을 떠주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이 말을 한번 꼭 해주고 싶어."

귀한 기회를 놓쳐버리고 안타까와하고 몸부림칠 때가 있습니다. 그 후회 중에 가장 뼈아픈 후회가 감사하지 못한 것임을 아십니까?
큰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지내던 사람을 갑자기 어느 자리에서 만났을 때, 얼마나 무안하고 미안합니까? 그렇다면 감사할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그 때는 어떻겠습니까? ‘내게도 감사할 것이 있었는데, 감사할 힘이 있었는데.’ 그때서야 깨달아진다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가장 비참한 것이 다 잃어버린 다음에 ‘그 때 내게 감사할 조건이 있었고 감사할 힘이 있었지.’ 하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감사절을 지키시면서 ‘정말 구원받았다고 하는 믿음이 있다는 나는 정말 감사하는 믿음이 있는가?’ 이 시간에 꼭 돌아보십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