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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요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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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행위를 가지라 (요 2:1~7)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다고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과 함께 그런 변화에 편승하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세상적 변화의 추세에 따라서 엄청나게 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보내신 편지 가운데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신 말씀은 이 시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처음 신앙의 그 상태로 돌아가라는 뜻이 있습니다. 때 묻고 변질된 모습을 버리고 깨끗하고 순수했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라는 의미입니다.

1. 처음 은혜를 회복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6:16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 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옛적 길, 선한 길이란 그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될 마땅한 도리를 뜻합니다.

1) 처음 믿음입니다.

히브리스 6:1에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기초적인 도리(λὀγος)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2:2에는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갓난 아기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시기가 있습니다. 곧 처음 믿음을 받아들이던 당시의 그 꾸밈없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아멘’ 하면서 거기에 길들여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뀜에 따라 죄에 오염되고 변질되어 그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믿음의 능력도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자에게 심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딤전 5:12).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바른 믿음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을 그의 외조모와 어머니를 통해서 전해져온 거짓 없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 1:5).

2) 처음 사랑입니다.

본문말씀 4절에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첫 사랑’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2에는 “네 소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모두 순수하고 거짓 없는 사랑을 뜻합니다. ‘처음 사랑’ 또는 ‘진실 된 사랑’은 성경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고전 13:4-7).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연원(淵源)된 것입니다(요1서 4:7-8). 사람들은 흔히 사랑을 말하지만 거짓된 사랑이 많이 있습니다. 조건적인 사랑, 일시적인 사랑, 동물적인 사랑, 자기 목적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사랑도 많이 있지만 이런 것들이 대부분 진실한 사랑인 것처럼 가장하고 나옵니다. 로마서 12:9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하였습니다.

3) 처음 봉사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의 생활은 섬기는 삶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처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섬기는 일을 즐겨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쓰게 되고, 사람을 섬기며 봉사 하는 것으로 보람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막 10:45). 처음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에서 남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즐겨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고 연륜이 많아짐에 따라 이와 같은 착한 마음은 점점 사라져가고 어느새 군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처음 열심을 회복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1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을 때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고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타성에 젖어버리곤 합니다.

1) 예배의 감격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의무이며 동시에 특권이기도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남의 체험을 하게 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로마서 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예배를 기뻐하시며 이 예배에 임재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4:23). 처음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배의 감격이 있습니다.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정성을 다 바쳐 예배하는 열정이 회복되어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2) 뜨거운 기도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기도를 천사가 금향로에 담아서 하나님의 보좌 앞 향단에 올린다고 했습니다(계 8:3-4). 신약의 야고보는 기도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교훈 한바 있습니다. 야고보서 1:5-8에 보면 먼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믿음으로 구해야 될 것과 또 두 마음을 품지 말고, 단순하고 진실 된 기도를 전제로 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의 정욕을 위한 기도를 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약 4:3). 우리의 기도가 어린아이처럼 정욕이 아닌 순수한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초보적인 신앙의 경우 기도를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셔서 힘을 실어주시고 도와주십니다(롬 8:26). 우리의 기도가 여러 가지 세상 욕심에 오염되어 순수하지 못한 것을 인정해야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도의 열정이 식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만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벧전 4:7).

3) 열심 있는 전도입니다.

전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켜서 복음을 전하도록 내 보냈습니다(마 10:4-7).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 땅위의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 명령을 내렸습니다(마 28:18-20). 성경은 우리가 다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롬 1:1).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제게 화가 미칠까 두렵다고 하였습니다(고전 9:16). 초대교회 성도들은 목숨을 바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국 교회 초기에도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으면서 전도를 하여 오늘날 이와 같은 교회의 부흥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다 전도의 열기가 식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전하는 자의 발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사 52:7).

3.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은 처음 가졌던 마음의 상태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처음에 가졌던 그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면 건전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발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 가졌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일컫습니다(빌 2:5).

1) 겸손한 마음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나(잠 16:18),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잠 16:18, 15:33)”라고 한 솔로몬의 잠언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여간 은혜를 받은 사람도 교만하게 되면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으로 부터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도 결국 교만 하다가 그것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는 자기의 부족을 알고 겸손해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교만한 마음으로 바뀌고 맙니다.
어떤 이유로도 교만한 생각이 들어가면 그때부터 몰락의 길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완 사울이 처음 사무엘을 만났을 때 자기는 왕이 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사양했습니다. 그렇지만 얼마 못가서 그 마음은 없어지고 교만해진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다가 결국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삼상 15:22-23).

2) 수용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시다가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에게 귀신들린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자는 이런 모욕적인 말씀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5:21-28).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은 어떤 말을 들어도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수용할 수 있지만, 초심을 잃게 되면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어떤 것도 수용하지 못합니다. 기분에 맞지 않으면 좋은 일도 훼방을 놓는 본성이 작용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마 11:29). 예수님의 마음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나이다”고 하는 마음입니다(마 26:39).

3) 희망적인 마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히 11:1).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당장은 죽음의 고난이 자기 앞에 있어도 그들은 그 다음에 오게 되는 희망적인 미래를 바라보면서 그 어려움을 견디며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처음 가졌던 마음 곧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찬 내일의 비전을 품게 됩니다. 그 환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오늘의 삶을 슬기롭게 가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 있으면서도 마음의 눈을 열고 부르심의 소망과 장차 받을 기업의 영광과 그리고 그침 없이 공급되는 능력의 은사를 발견한다고 하였습니다(엡 1:17-19). 우리 모두 초심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아니하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힘써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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